정조 한 마디에 대유행, 조선 선비들의 '인스타 감성'

노시은 2026. 10. 5.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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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일상 속, 차 한 잔으로 일상에 쉼표를 찍습니다. 차 한 잔을 마시며 24절기와 동양화를 오가며 흐르는 시간의 아름다움을 기록합니다.

투명한 물속에서 은빛 솜털들이 유유히 헤엄치는 모습을 눈으로 직접 감상하는 것, 이 또한 차를 즐기는 훌륭한 완상(玩賞)이 되니까요.

내 손에 가장 익숙한 도구들과, 굳은 감각을 상큼하게 깨워주는 차 한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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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 속 노트들과 조선시대 '서가 자랑' 책가도, 그리고 운남백호은침 한 잔

바쁜 일상 속, 차 한 잔으로 일상에 쉼표를 찍습니다. 차 한 잔을 마시며 24절기와 동양화를 오가며 흐르는 시간의 아름다움을 기록합니다. <기자말>

[노시은 기자]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기록을 즐기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내년 다이어리를 무엇으로 구비할지 기분 좋은 고민의 바람이 살랑입니다. 넘길 달력이 아직 몇 장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시선은 벌써 새해로 넘어가는 셈이죠.

저 역시 발빠른 기록광들이 뭘 선택했는지 염탐하기도 하고 화려한 신상 다이어리의 유혹에 슬그머니 시선을 빼앗기며 한 달여를 보낸 끝에, 마침내 긴 고민의 마침표를 찍기로 했습니다. 새것을 들이지 말고, 이미 곁에 있는 것을 아끼며 사용하자!

평소에 마음에 들고 아름다운 노트와 다이어리가 보이면 멋지게 채우겠다 결심하며 사모았지만 왠지 아까워 포장도 뜯지 않고 고이 모셔두기만 한 것들을 드디어 꺼내 사용하기로 한 겁니다.
▲  내년에 주력으로 쓸 다이어리를 뭘로 할지 고민해보는 시간. 그나저나 야금야금 사모은 노트들이 이렇게나 많았다니!
ⓒ 노시은
새로운 것을 사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을 정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한결 가볍고 편안해집니다. 물론 선택의 즐거움마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꺼내 보니 사모은 노트들이 꽤 많더라고요. 어느 것을 먼저 쓸지, 또 다른 행복한 고민이 시작됐습니다.

표지가 귀여운 노트를 택해 기분 전환을 해볼까. 아니면 만년필 잉크를 든든하게 버텨주는 기능이 훌륭한 종이를 고를까. 아니면 용도에 맞게 여러 권의 얇은 노트를 분리해서 사용해 볼까. 고려해야 할 것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조선시대 데스크테리어, 책가도

이 기분 좋은 고민을 핑계 삼아, 꺼낸 노트 몇 권과 만년필 몇 자루, 여기에 매칭시킬 잉크 몇 병을 보고 있노라니 이 풍경, 어디선가 많이 본 듯 익숙합니다. 바로 조선 후기의 화려한 정물화, <책가도(冊架圖)>입니다.
▲  이형록(李亨祿)의 <책가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이다. 이형록은 57세가 되던 1864년에 이응록(李膺祿)으로 개명했다가 64세인 1871년 이택균으로 이름을 바꿨다고 전한다.
ⓒ 공공누리
책가도는 18세기 조선 정조 때 궁중 화원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그려지기 시작한 독특한 장르의 그림입니다. 어좌 뒤를 장식하던 전통적인 일월오봉도 대신, 책이 가득 꽂힌 서가의 모습을 그리게 한 정조의 지독한 학문 사랑에서 출발했죠.

"비록 책을 읽을 수 없을 때라도 서실에 들어가 책을 어루만지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했던 국왕의 말은, 곧 지식인들 사이에서 거대한 유행의 물결을 만들어 냈습니다. 나중에는 단순히 책만 그리는 것을 넘어, 양반층 사이에서 청나라로부터 들여온 진귀한 벼루, 도자기, 향로, 심지어 서양식 자명종 시계까지 화폭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문방청완(文房淸玩 서재의 맑고 아취 있는 기물을 감상하고 즐긴다)'이 대유행하며 병풍 속 칸칸마다 온갖 수집품들이 가득 채워진 것입니다. 서양의 선투시도법과 명암법까지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사물을 입체적으로 배치한 이 그림들은, 조선 지식인들이 자신의 고상한 안목과 취향을 과시하는 고도의 데스크테리어(Desk-terior)이자 컬렉션 전시장이었습니다.

책상 위에 놓인 저의 물건들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비록 연경(베이징)에서 물 건너온 비싼 골동품은 아니지만, 표지가 예뻐서 사놓고 차마 쓰지 못했던 수많은 노트와 손에 익은 만년필은 저만의 애틋한 '문방청완'이었습니다.

하지만 옛 선비들이 진귀한 기물을 화폭에 박제해 두고 눈으로 감상하는 데 그쳤다면, 오늘날의 저는 기꺼이 실사용의 기쁨을 누려보기로 합니다. 아껴두었던 노트의 첫 장을 쫙 펼치는 순간, 제 책상 위는 박제된 정물화가 아니라 사유가 흐르는 살아있는 책가도가 되지요.

제철 밤과 함께 하는 운남백호은침
▲  운남에서 나오는 백호은침은 연한 금빛이 도는 털이 그야말로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 노시은
저만의 책가도에 티타임이 빠질 수 없죠. 지금 제철인 밤을 삶아 곁들이고, 작년에 넉넉히 주문해 자주 마신 운남백호은침(雲南白毫銀針)을 마시기로 했어요.

보통 백차라고 하면 가장 먼저 복건성(푸젠성) 복정(푸딩) 지역의 차들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복건성의 백차가 맑고 슴슴하며 단아한 난초 향을 품고 있다면, 운남대엽종(雲南大葉種)으로 만든 운남의 백차는 그 결이 사뭇 다릅니다.

백호은침은 찻잎의 여린 싹눈만을 채엽하여 덖거나 비비는 과정 없이 약한 햇볕이나 그늘에서 자연스럽게 시들려 말리는 위조(萎凋) 과정만을 거칩니다. 인위적인 열을 가하지 않아 찻잎 겉면의 은빛 솜털(백호)이 고스란히 살아 숨 쉬고 있죠.

보이차의 고향이기도 한 운남성의 풍부한 자연, 그 비옥한 흙의 기운을 듬뿍 머금은 대엽종 싹눈으로 만든 운남백호은침은 솜털이 보송보송한 외관과 달리 입안에서 터지는 향미가 무척이나 상큼하고 싱그럽습니다.

묵직하고 두텁게 입안에 닿는 느낌 사이로 싱그러운 풀꽃향과 은은한 달콤함이 복합적으로 피어오르죠. 상큼한 백호은침이 굳어있던 감각을 경쾌하게 깨워줍니다. 오랫동안 포장지에 싸여 잠들었던 노트가 마침내 빛을 보고 잉크를 머금는 그 짜릿한 생동감처럼 말입니다.
▲  흰 솜털이 부유하는 모습을 감상하는 것이 백호은침을 마실 때 즐거움 중 하나이다.
ⓒ 노시은
복숭아 유리 개완(蓋碗)에 우리기로 한 건, 옛 책가도를 들여다보면 장수와 벽사(나쁜 기운을 막음)를 상징하는 복숭아 연적이나 복숭아나무 가지가 심심치 않게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투명한 물속에서 은빛 솜털들이 유유히 헤엄치는 모습을 눈으로 직접 감상하는 것, 이 또한 차를 즐기는 훌륭한 완상(玩賞)이 되니까요. 평소 자주 사용하는 푸른 해골 머그도 꺼냈습니다. 책가도에 등장하는 기이한 모양의 수석이나 이국적인 물건을 대신해서요.
▲  포동포동 살이 오른 제철 밤을 쪄내면 포실포실 은은한 단맛의 속살을 맛있게 먹을 수 있다.
ⓒ 노시은
해골 머그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싱그러운 차 향기를 깊게 들이마십니다. 포슬포슬하게 삶아진 밤 한 알을 입에 넣고 차를 홀짝 머금으니, 서로 다른 결의 단맛이 기분 좋게 어우러지며 입안이 금세 가을의 충만함으로 가득해집니다.
사실, 책상 위에 펼쳐둔 수많은 노트 중 어느 것의 첫 장을 넘길지는 여전히 정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조급할 것은 없죠. 완벽한 새 다이어리를 사지 않았다는 아쉬움은 따뜻한 찻물과 삶은 밤의 고소한 온기 속으로 녹아 사라진 지 오래니까요. 당장 첫 문장을 적어 내려가지 않아도, 곁에 둔 익숙한 기물들과 이 계절의 맛을 천천히 음미하며 행복한 고민의 시간을 조금 더 누려볼 참입니다.
▲  그다지 근사하지 않고 무질서해 보이는 나의 책장. 역시 그림 속 이상적 책가도와 현실의 책가도는 꽤 다르다.
ⓒ 노시은
'인스타그래머블(instagrammable 인스타그램에 올릴 법하게 꾸며진)'한 세팅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내 손에 가장 익숙한 도구들과, 굳은 감각을 상큼하게 깨워주는 차 한 잔. 그리고 내면의 복잡한 생각과 일상의 조각들을 솔직하게 담아낼 빈 종이만 있다면 이 가을의 사유는 이미 더할 나위 없이 풍요로우니까요. 그나저나 내년 다이어리 뭘로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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