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집회에서 울려퍼진, 알다가도 모를 노래

김형민 2026. 10. 2.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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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좋아하지 않는 어린이 있을까마는, 나 역시 열렬히 만화를 좋아했다.

전쟁 통에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반가웠던 두 사람은 술잔을 기울였고, 박시춘의 집에서 노래 하나를 만들기 시작했다. "유엔군이 북진을 한다니 통일도 이젠 멀지 않은 것 같소. 우리 군인들 사기를 높일 노래 하나 만듭시다."

입산한 이래 얼어 죽고, 맞아 죽고, 굶어 죽어 가며 '해방된 나라'를 꿈꿨던 그들의 입에도 이 노래는 찹쌀처럼 달라붙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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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로 읽는 현대사] 한 군가의 굴곡진 역사 <전우여 잘 자라>

[김형민 기자]

만화 좋아하지 않는 어린이 있을까마는, 나 역시 열렬히 만화를 좋아했다. 길창덕 선생이 <소년중앙>에 연재했던 '꺼벙이'는 지금도 내 어린 시절 친구처럼 정답다. 페이스북을 시작했을 때 꺼벙이를 프로필로 쓴 적이 있을 정도다.

방학 때마다 외갓집에 악착같이 찾아갔던 이유도 그곳에서 정기 구독하던 <소년중앙>의 꺼벙이를 보기 위해서였다. 세탁기가 빨래도 해 주고 전기밥솥이 밥도 해 주는데 왜 숙제를 대신해 주는 전기숙제기는 없냐며 가전 대리점을 찾아다니던 꺼벙이에 공감했고, 키 큰 친구와 농구를 이겨 보겠다고 신발에 스프링을 달았다가 멈추지 못해 "꺼벙이 살려!"를 외치는 모습에 깔깔댔다.

그중에서도 오래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꺼벙이의 반공 글짓기 숙제를 대신해 주던 아버지 이야기였다. 6·25 참전 용사였던 아버지는 낙동강 전투를 써 내려가다가 전사한 상관을 떠올리며 엉엉 울고 만다. 전사한 소대장을 끌어안은 하사관의 대사는 이랬다. "낙동강아 흐르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뭔가 멋있는 대사 같아서 친구들에게 써먹었더니 여덟 살짜리 녀석들이 죄다 "노래 가사 아이가" 하고 웃었다. 팔을 휘두르며 노래를 부르는 녀석도 있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흐르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래 가사는 낙동강아 '잘 있거라')

작사가 유호와 작곡가 박시춘이 6·25 전란 통에 만든 노래
▲  1950년 8월. 남한 최후의 방어선인 낙동강. 국군은 낙동강 전선을 사수하고 북진에 나섰다.
ⓒ 퍼블릭도메인
듣고 보니 그리 낯설지 않은 노래였다. '전우'가 뭔지 '시체'가 뭔지도 잘 몰랐을 꼬꼬마들이 이 노래를 그렇게 읊고 있었으니, 이 노래는 단순한 군가가 아니었던 셈이다. <전우여 잘 자라>는 <신라의 달밤> <비 내리는 고모령> 등 수많은 히트곡을 함께 만든 작사가 유호와 작곡가 박시춘이 6·25 전란 통에 만들어낸 노래다.

전쟁이 터진 뒤 작사가 유호는 한강을 건너지 못했다. 여섯 살 아들과 갓난아이를 데리고 피난 갈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서울이 함락되던 6월 28일, 한 국군 병사가 청파동 언덕길로 뛰어 올라왔다. 철모도 없고 군복은 흙먼지투성이인 패잔병이었다. 그러나 총을 든 손은 굳건했고 눈초리는 형형했다. 인민군을 향해 총을 쏘려 했지만 총알마저 떨어진 것을 안 그는 총을 팽개치고 오늘날의 효창공원 쪽으로 사라졌다. 퇴로가 끊긴 국군 병사들은 자신의 마지막 자리에서 싸우다 산화해 갔다. 유호는 그중 하나를 눈에 담아 두었다.

석 달 뒤 서울이 수복됐다. 명동 거리를 걷던 유호 앞에 밀짚모자를 쓴 박시춘이 나타났다. 전쟁 통에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반가웠던 두 사람은 술잔을 기울였고, 박시춘의 집에서 노래 하나를 만들기 시작했다. "유엔군이 북진을 한다니 통일도 이젠 멀지 않은 것 같소. 우리 군인들 사기를 높일 노래 하나 만듭시다."

유호의 머릿속에는 서울 함락 때 보았던 패잔병의 이글거리던 눈과 서울 수복 후 환호 속에 들어오던 해병대가 엇갈렸다. 그가 가사 한 줄을 읊으면 박시춘은 기타를 튕겼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 전선을 거꾸로 건너 북진해 오는 병사들의 심경을 그대로 담은 노래였다. 추풍령을 넘어 서울로 올라와 한강을 바라보았을 때, 전쟁 초기부터 그때껏 살아남은 병사들은 이 노래를 듣는 것만으로도 울컥했으리라. "한강수야 잘 있더냐 우리는 돌아왔다."

전쟁이 끝난 지 수십 년 뒤의 꼬마들까지

노래는 삽시간에 군인들과 국민들 사이에 퍼졌다. 38선을 넘어선 국군 장병들은 한강, 임진강, 대동강, 청천강에 "잘 있더냐"고 인사하며 "우리가 이제 왔다"고 포효하듯 노래했다. 싸워 이겨도 죽는 사람은 죽었다. 구멍 뚫린 철모와 피 묻은 인식표만 보아도 죽은 전우의 얼굴이 꽃같이 별같이 떠올랐을 것이다. 자신도 언젠가 화랑 담배 연기 속에 사라질지 모를 운명임을 알던 병사들은 노래를 부르며 죽어 간 이들을 기리고 자신들의 생존을 확인했을 것이다.

맹랑하게도 남쪽 산악지대의 빨치산들도 이 노래를 즐겨 불렀다. <태백산맥>에는 빨치산들이 "반동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라고 개사해 부르는 대목이 나온다. 입산한 이래 얼어 죽고, 맞아 죽고, 굶어 죽어 가며 '해방된 나라'를 꿈꿨던 그들의 입에도 이 노래는 찹쌀처럼 달라붙었을 것이다. 그들의 원한도 피에 맺혀 있었고, 꽃같이 별 같이 사라진 동료들도 그만큼 많았을 테니 말이다.

3년의 전쟁 동안 남과 북의 수많은 사람이 서로의 손에 죽었다. 그만큼 이 노래는 전쟁을 경험한 사람들의 뼛속 깊숙이 새겨졌다. 심지어 어린아이들도 고무줄놀이하며 이 노래를 불렀다. 나보다 열 살 아래인 여자 후배도 고무줄을 뛰며 이 노래를 불렀다고 했으니, 전쟁이 끝난 지 수십 년 뒤의 꼬마들까지 고무줄을 '전우의 시체' 삼아 뛰어놀았던 셈이다.
▲  3·15의거 당시 ‘독재 타도’, ‘학원자유 보장’을 외치고 있는 마산고등학교 시위대 모습이다
ⓒ 진실화해위
다정한 친구와 동료, 전우를 잃으면서도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했던 비장한 결기는 또 한 번 역사의 물돌이를 맞는다. 1960년 3·15 부정선거였다. 1960년 3월 17일 자 <조선일보> 사설은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를 부르며 낙동강을 건넜던 6·25의 젊은 용사들을 떠올리면서, 그들이 목숨을 바쳐 지킨 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선거가 이토록 무참해진 현실을 통탄했다. 전우의 시체를 넘으며 지킨 대한민국이 겨우 이것이란 말이냐는 절규였다.

그 아우성은 거리로 번졌다. 대학생들보다 먼저 뛰쳐나온 고등학생들도 이 노래를 불렀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3월 15일 선거 당일 마산에서는 사람들이 죽었다. 그리고 마산 앞바다에 최루탄이 눈에 박힌 김주열의 시신이 떠올랐다. <부산일보> 논설위원이자 부산고등학교 국어 교사였던 김태홍은 통절한 시를 썼다. "눈동자에 탄환이 박힌 소년의 시체가 대낮에 표류하는 부두, 학생과 시민이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민주주의와 애국가와 목이 말라 온통 설레는 부두인 것이다."

또 하나의 전쟁이었다. 민주주의는 또 하나의 낙동강 전선 뒤에서 총 맞고 최루탄 박힌 채 신음하고 있었다. 적어도 1960년 봄, 낙동강은 서울에도 충청도에도 전라도에도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돌아왔다"고 외칠 한강수 너머 경무대 앞으로 수만 명이 쏟아져 들어갔다. "우리가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어머니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그런 유서를 남기고 거리로 나섰다가 머리에 총을 맞은 여중생도 있었다. 경찰이 난사하는 카빈총 앞에서 스크럼을 짜고 내닫던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은 울면서 악을 쓰며 노래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민중의 노래로, 민주주의 지키는 군대의 노래로
▲  영화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한 장면. <전우여 잘자라>는 이 영화의 주제가이기도 했다
ⓒ 한국영상자료원
1960년의 봄, <전우여 잘 자라>는 진중가요가 아닌 민중의 노래로, 민주주의를 지키는 군대의 노래로 사람들의 어깨에 결연하게 내려앉았다. 그 뒤 이 노래는 이만희 감독의 걸작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주제가로 돌아왔다. 영화 속 두 해병은 중학 동창이지만 한 사람의 형이 '빨갱이'가 되어 다른 사람의 가족을 죽인 악연으로 얽혀 있다. 죄책감에 시달리던 해병은 말한다.

"같이 있는 동안 같이 있는 거야."
"이런 감정으로 어떻게 같이 있어?"
"이렇게 이렇게 같이 있는 거야. 우리들의 죄는 아니니까."

그 후 70년 동안 한반도 사람들은 그렇게 '이렇게 이렇게' 같이 살아왔다. '이런' 감정으로, 그들의 죄도 아니면서. 그래서 장동휘 분대장의 마지막 말이 가슴을 울린다. "너희 둘만은 꼭 살아 돌아가서 증인이 돼라. 수많은 사람이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죽었다고. 인간은 반드시 전쟁이 필요한지 물어봐라." 그런 영화의 뒤에 흐르는 <전우여 잘 자라>를 당시 관객들은 어떤 마음으로 들었을까.

그로부터 또 반세기가 흘렀다. 한동안 주말의 광화문에 가면 <전우여 잘 자라>가 요란하게 울렸다. 백발이 성성한 사람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떼 지어 불렀다. 그들의 전의는 왕성하고 의지는 결연했다. 그들에게는 "낙동강아 흐르거라 우리는 전진한다"고 외치던 6·25의 비장함만이 남아 있는 듯했다.

그러나 이 노래는 그렇게 단순한 노래가 아니었다. 낙동강을 넘어 돌격하던 국군의 함성이면서 독재 정권을 향해 몰려가던 사람들의 절규였고, "인간에게 전쟁이 왜 필요한지 물어보라"고 외치는 영화에 흐르던 역설의 노래이기도 했다.

노래는 역사 속에서 이미 여러 얼굴을 얻었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얼굴 하나만 붙들고 늘어지는 모양이다. 광화문에서 꽝꽝 울리는 <전우여 잘 자라>를 들으며 나는 어린 시절 친구 꺼벙이의 투덜거림을 다시 떠올린다. "나 참 정말 어른들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알다가 모를 일이 우리 역사에 어디 하나둘이겠느냐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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