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이 삼킨 가장의 자리, 넘지 못한 사랑[슬레이트]

이종길 2026. 9. 30.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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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자본주의는 남성의 존재 가치를 경제적 유용성으로 치환한다.

경제력과 문화자본을 모두 갖춘 상우는 세련된 태도로 호석이 수행하지 못하는 남성적 역할들을 대체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폐의 두께는 곧 남성의 근육이자 가장의 권위다. 이 감독은 호석의 패배를 통해 자본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하층민 남성에게 허락된 사랑이나 권위가 위태롭다는 것을 논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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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 감독 '가능한 사랑'
해고 노동자의 자리를 자본가가 서서히 찬탈
정복 시도는 끝내 미완, 사랑까지 삼키진 못해
영화 '가능한 사랑' 스틸 컷.

현대 자본주의는 남성의 존재 가치를 경제적 유용성으로 치환한다. 노동력을 잃은 남성은 임금만 빼앗기지 않는다. 가부장적 권위와 남성성마저 반납한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가능한 사랑'은 자본이 가장의 자리를 위협하는 이 잔혹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해고 노동자 호석(설경구)이 겪는 물리적·정신적 몰락과 자본가 상우(조인성)가 그 빈자리를 서서히 침식하는 모습을 통해 거대 자본이 하층민의 권력을 어떻게 찬탈하는지 보여준다.

호석은 SP중공업 해고 직후 공황장애를 앓으며 신체적 통제력이 마비됐다. 독주에 의존해야 간신히 눈을 붙이는 육체는 가족을 보호할 동력을 잃은 지 오래다. 경찰 특공대에게 짓밟히던 기억이 몸과 마음을 패배의 시간에 가뒀다. 상실감은 열등감과 자기 파괴적 분노로 발현한다. 해고를 피한 동료가 아이의 생일 케이크를 사는 평범한 일상을 미행하며 자신을 '텅 빈 유령'으로 규정한다. 심리치료실에서 자본의 횡포를 규탄하는 동료들의 목소리를 헛소리로 치부하며 연대의 가능성도 스스로 파괴한다.

자본은 그 빈틈을 신속하고 우아하게 차지한다. 경제력과 문화자본을 모두 갖춘 상우는 세련된 태도로 호석이 수행하지 못하는 남성적 역할들을 대체한다. 고깃집 회식 자리에서 능숙하게 고기를 구워 호석의 아들 철이에게 내민다. 호화 별장에서는 직접 태권도 품새를 가르치고, 대물림된 권력의 상징인 호루라기 부는 법을 전수하며 유사 가부장으로 군림한다. 미옥(전도연)과 철이는 무기력한 호석 대신, 현실의 문제를 즉각 해결하고 고급스러운 안락함을 제공하는 상우의 권력에 속수무책으로 길든다.

영화 '가능한 사랑' 스틸 컷.

밑바닥으로 추락해 언어와 논리를 잃은 남성이 선택할 수 있는 저항은 짐승과 같은 원초적 일탈뿐이다. 이 감독은 별장의 지하실 화장실 장면으로 거세된 남성의 절망을 시각화한다. 만취한 호석이 최고급 자재로 꾸며진 화장실 사방에 무차별적으로 오줌을 갈긴다. 다른 수컷의 영토에 체취를 남겨 잃어버린 통제권을 되찾으려는 몸부림이다. 상우는 그의 침범에 분노하기는커녕 오히려 낄낄거리며 자신도 바닥에 오줌을 눈다. 그 순간 하층민의 결사적인 저항은 상류층 자본가의 지루함을 달래줄 가벼운 유희 거리로 전락한다.

두 남성의 격차는 물의 은유로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호석은 새벽 숲속 개천에서 괴성을 지르다 물속에 고꾸라진다. 반면 상우는 자신의 사유지 해변에서 알몸으로 바다를 유려하게 가르며 수영한다. 호석의 개천이 절망과 허우적거림의 공간이라면, 상우의 바다는 통제력을 과시하는 정복의 공간이다.

남성성을 둘러싼 계급의 지배력은 지하 홈바에서도 나타난다. 조명이 비추는 무대 위에서 미옥은 짙은 교태를 띠며 유행가를 부른다. 상우는 그녀에게 바싹 붙어 클라리넷을 연주하며 유사 부부의 앙상블을 연출한다. 그 아래에서 호석은 만취한 채 몸을 가누지 못하고 우스꽝스러운 막춤을 춘다. 아내를 빼앗긴 자리에서 상우의 흥을 돋우는 슬픈 광대로 전락한 것이다. 잠에서 깨어 지하로 내려온 철이가 이 광경을 목격한다. 아비는 힘을 잃고 어미는 자본에 매혹당한 현실 앞에서 아이는 뒷걸음질 치며 시선을 돌린다. 해고 노동자 가족이 겪는 경제적 몰락은 이렇게 가족의 도덕적·구조적 해체로 이어진다.

영화 '가능한 사랑' 스틸 컷.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폐의 두께는 곧 남성의 근육이자 가장의 권위다. 이 감독은 호석의 패배를 통해 자본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하층민 남성에게 허락된 사랑이나 권위가 위태롭다는 것을 논증한다. 그러나 상우의 정복은 끝내 완결되지 않는다. 호석의 가족이 떠난 별장에서 아내 예지(조여정)와 함께 밤을 보내면서도 시선이 미옥이 있던 자리를 맴돈다. 반면 호석은 보름달 아래에서 순수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새 출발을 다짐한다. 자본이 가장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어도, 사랑까지 빼앗지는 못하는 셈이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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