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한 치정극인 줄 알았는데... 두 여성이 마주한 진실

김상목 2026. 9. 29.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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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조바심이 난 줄리는 더 급히 뒤를 쫓고, 어느새 자신을 미행한다고 여긴 여인 역시 흡사 경주하듯 두 여인은 숨바꼭질을 벌인다.

천천히 뜯어보니 셀린느와 줄리 두 사람이 번갈아 앙젤로 출연하는 중이다.

셀린느와 줄리, 또래의 두 여성은 전통적 가족 관계에 얽매이진 않지만, 반대급부로 불안정한 현실에 직면한 독신 생활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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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셀린느와 줄리 배 타러 가다>

[김상목 기자]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줄리'는 공원 벤치에서 실용 마법 사전을 읽던 참이다. 지나가던 또래 여인이 스카프를 흘린 걸 발견한 그녀는 돌려주고자 부르지만, 상대는 뭐가 그리 바쁜지 아무리 불러도 듣지 못한 채 정신없이 어딘가로 걸음을 재촉한다. 조바심이 난 줄리는 더 급히 뒤를 쫓고, 어느새 자신을 미행한다고 여긴 여인 역시 흡사 경주하듯 두 여인은 숨바꼭질을 벌인다.

다음날 제대로 대면한 그녀들은 통성명한다. 알고 보니 상대는 마술사 '셀린느'다. 둘은 금방 오랜 친구처럼 지낸다. 줄리의 집에서 부대끼던 둘은 우연히 얻은 사탕을 입에 머금은 순간 낯선 저택에 발을 들이는 꿈인지 환상인지 모를 순간을 함께 체험한다. 눈앞에서 거듭 반복되는 저택에서 벌어지는 은밀한 사건을 목격한 두 사람은 헤어날 수 없다.

'누벨바그' 세대의 숨은 고수
▲  <셀린느와 줄리 배 타러 가다> 스틸
ⓒ 라이트하우스
'누벨바그'란 단어를 듣는 순간 떠올리는 몇몇 이름과 얼굴들은 누구일까? 장 뤽 고다르와 프랑수아 트뤼포, 에릭 로메르, 아녜스 바르다가 첫 순서일 테다. 하지만 '뉴 웨이브 New Wave', 즉 '새로운 물결'을 뜻하는 누벨바그는 몇 명의 위대한 감독으로만 수렴되지 않는다. 영화가 탄생한 국가에서 이미 반세기 넘게 전성기를 구가하던 기존 영화를 냉철하게 비평하던 '카이에 뒤 시네마' 그룹 평론가들이 직접 영화를 연출하며 빚어진 일군의 신진 작가와 경향의 총합인 셈.

당연히 누벨바그라 해도 복잡한 세분화를 겪는다. 카이에 뒤 시네마 출신 여부로 나뉘고, 훗날 이탈하거나 새로 합류하는 구성원도 부지기수였다. 이들이 한창 활약하던 1960년대는 격동의 시절이었고, 급진적인 정치 참여와 입장 개진을 둘러싼 논쟁은 이른바 '센강 우안 vs. 좌안' 파벌로 구별될 만큼 격렬했다. 절친하던 이들이 원수 대하듯 결별하기도, 서먹하던 관계를 극적으로 화해하기도 했다. 어디부터 어디까지 누벨바그라 할지 논쟁은 끝날 생각이 없다.

그중 자크 리베트(1928 ~ 2016)란 감독이 있다. 영화사에 웬만큼 정통하지 않으면 이름은 들어봤어도 그 너머 작품 전반까지 훑는 경우는 드문 작가다. 물론 자크 리베트가 실은 고다르나 트뤼포보다 덜 알려졌을 뿐, 더 중요하고 위대한 감독이라 강변하려는 건 아니나 그냥 도매금으로 묻어가기엔 그만의 고유한 경향과 매력이 만만하지 않다. 하지만 진입장벽이 제법 높은 편이라는 게 소개에 제약이 된다. 난해함이 악명 높은 고다르 못지않은 덕분.

하지만 호승심에 리베트 영화를 접하면, 다른 감독과 궤를 달리하는 기묘함에 탄복하거나 고개를 흔들거나 확연히 갈린다. 일단 길다. <아웃 원>의 경우 13시간 가뿐히 돌파한다. 다른 작품도 서너 시간은 기본이다. 대중적 성공을 거둔 <누드모델>도 4시간에 필적한다. 하지만 단지 장황하기에 턱이 높은 건 아니다. 전통적인 서사 전개를 파괴하고 해체하는 실험성이 유독 강렬하다. <셀린느와 줄리 배 타러 가다>는 그런 감독의 스타일이 녹아난 대표작이다.

고전적인 서사 구조를 유쾌하게 해체
▲  <셀린느와 줄리 배 타러 가다> 스틸
ⓒ 라이트하우스
셀린느와 줄리는 이상한 사탕을 먹고 낯선 저택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관찰자 시선으로 응시한다. 두 여인은 연극이나 영화를 관람하듯 반복되는 사건 전개를 품평하며 상황 관련 추리를 거듭한다. 처음엔 그저 지금 눈앞에 벌어지는 풍경이 무엇인지 파악하느라 애쓰고, 대충 짐작되자 마치 텔레비전 드라마 보면서 가족끼리 벌이는 잡담처럼 수다를 떤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그냥 유쾌하고 느슨한 소동극인 양하다. 등장인물을 물고 뜯고 맛보기가 무한정 이어진다.

슬슬 반복되는 사건에 보는 관객도 지루해질 즈음, 문득 어떤 깨달음이 뇌리를 스친다. 단순한 막장 통속극의 반복이 아니라 이건 전통적인 드라마 서사의 해체와 변주를 의도한 것이구나 확인하는 순간이다. 똑같은 사건이 거듭되면서 셀린느와 줄리는 처음엔 어처구니가 없다가도 점점 등장하는 캐릭터를 분석하고 의혹의 범인이 누구일지 탐정처럼 추리를 시도한다. 셜록 홈스와 조수 왓슨이 따로 없다. 뻔한 치정극은 두 여인의 시선을 타고 해부되기 시작한다.

저택은 화려하고 가족은 부유하지만, 어딘가 뒤틀려 있다. 가장 올리비에와 어린 딸 마들린, 유모 앙젤과 처제 까미유, 그리고 소피가 거주한다. 까미유와 소피는 상처한 올리비에를 노골적으로 유혹하는 중이다. 물밑 갈등이 점점 노골적으로 수면 위로 부상하고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는 순간, 마들린이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누가 어린 소녀를 살해한 걸까? 셀린느와 줄리의 관심은 여기에 집중되기 시작한다. 단순히 드라마 보듯 품평하는 걸론 성이 차지 않는다.

언젠가부터 유모의 얼굴을 관객은 유심히 살피게 될 법하다. 천천히 뜯어보니 셀린느와 줄리 두 사람이 번갈아 앙젤로 출연하는 중이다. 장난기 어린 깜짝 출연이 아니라 어느새 그녀들이 관전자를 넘어 행위자로 개입하기 시작했다는 징후다. 그냥 머릿속 망상인 줄 알았는데 미스터리를 풀고 마들린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려는 결연함과 장난기가 뒤섞인 도전을 감행하는 셈이다. 화면을 경계로 넘어설 수 없다는 금기를 초월하는 은근한 파격이다.

두 여성의 우정과 연대
▲  <셀린느와 줄리 배 타러 가다> 스틸
ⓒ 라이트하우스
셀린느와 줄리, 또래의 두 여성은 전통적 가족 관계에 얽매이진 않지만, 반대급부로 불안정한 현실에 직면한 독신 생활자다. 줄리는 통념적 이성애에 여전히 매달리고 셀린느는 마술 실력보단 외모지상주의 세태에 나이트클럽에 몰려든 남성 관객들의 관음적 시선에 시달려야 한다. 오랜 세월 학습된 사회적 관념에 여전히 구속되고, 경제적 자립과 세속적 성공을 위해 가부장제 사회의 인습을 참고 견뎌야 한다. 잠재된 불만은 현실의 무게 앞에 발화하지 못한 채로.

그런 처지의 두 여성이 만난다. 물론 68혁명이 휩쓸고 간 1970년대 프랑스는 21세기 한국보다 더 개방적으로 보이긴 하지만, 구체제의 유산은 금방 사라지지 않는다. 대중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 역시 진취적 미래보다는 대중의 취향을 빙자해 전통적 가치관과 사회 통념을 강화하는 데 일조한다. 겉으론 새로운 변화가 세상을 바꾸는 것 같아도 아직 갈 길이 까마득하다. 해결해야 할 과제 역시 산적했지만, 이쯤에서 만족하잔 생각도 자연스레 들만한 모순의 시간.

화면 바깥의 시대 상황을 상상하며 <셀린느와 줄리 배 타러 가다>를 본다면 그런 시대 배경이 순식간에 한가득 펼쳐지는 '마법'이 시작된다. 뜬금포로 영화 속 현실과 경계가 점점 흐릿해지는 (마법 사탕에 의지한) 두 친구의 환상체험은 누군가에겐 '꿈', 누군가에겐 '몽상'으로 비칠 테다. 혼자라면 그러다 말 테지만, 감독은 명백히 둘이 함께 모험을 떠나게 만든다.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주인공 곁에 든든한 동료가 출발부터 함께하는 것처럼.

두 여성의 연대로 감행된 모험은 사건의 구경꾼을 모험의 주역으로 변신하도록 이끈다. 물론 화면 속 그녀들의 도전은 엉망진창 슬랩스틱 코미디랑 별다를 게 없어 보이지만, 작품 구조를 곱씹으며 돌아보면 그야말로 이런 파격이 없다. 연출가로서 절대 어기면 큰일날 것 같은 오래 물려받은 규칙이 산산이 부서지기 때문. '실험'과 '해체'가 남용되는 21세기 시류에서 봐도 50여 년 전 제작된 작품이란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거리낌 없이 구조를 '인수분해'한다.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이야기의 매혹
▲  <셀린느와 줄리 배 타러 가다> 스틸
ⓒ 라이트하우스
3시간 가볍게 넘기는 이야기는 불친절하고 모호하기 짝이 없다. 처음엔 대체 '나는 누구? 여긴 어디?' 급으로 관객을 난감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요즘처럼 조금만 길어도 중간에 해설을 과도할 정도로 붙이는 작법에 익숙한 이들에겐 더욱 곤혹스럽다. 하지만 기왕 양잿물 마신 바엔 접시까지 핥아주마! 하고 자포자기한 관객은 서서히 화면 속으로 걸어 들어가듯 이야기 속 일부가 된다. 숫제 셀린느와 줄리 옆에서 함께 저택을 응시하는 세 번째 일원이 된 듯.

통속 전개라면 두 주인공은 눈앞 풍경에 개입할 수 없다. 소녀는 살해되어야 하고 관람자는 욕하면서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객체로 머물 뿐이다. 그게 당연시된다. 이건 21세기 한국 관객 역시 같은 조건이다. 그러나 자크 리베트는 그게 왜 당연한 거냐며 영화 매체의 가능성을 전통적 서사 구조를 비틀고 뒤집어 한계에 도전한다. 동시에 다중이 접속하듯 집단 경험하는 현대 대중예술의 진가를 꿰뚫어본 결과다. 평론가의 시선이 진가를 본격 발휘한 것.

물론 영화는 스크린 내에선 뭐든 가능하다는 또 다른 환상을 관객에게 주입하려는 만용과는 간격을 띄운다. 대안적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과 현실의 장벽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건 별개의 문제다. 3시간 넘게 셀린느와 줄리는 현실의 파리 도심을 누비고 꿈속 저택을 헤매지만, 제목처럼 '배 타러 가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제목이 맥거핀인가 하고 갸우뚱하던 관객 앞에 190분이 지나서야 마침내 고대하던 센 강 노 젓는 풍경이 당도한다. 모든 게 잘 풀린 듯하다.

하지만 이 순간 망치로 머리를 때리듯 (지금껏 충분히 파격을 맛봤음에도) 새로운 충격이 도착한다. 셀린느와 줄리는 권태 가득한 1970년대 파리 일상에서 탈주하는 꿈을 꾸지만, 게임에서 특정 단계를 완수하고 나면 다음 단계가 등장하듯 그녀들의 모험에 끝과 완성이란 애초 성립될 수 없는 것. 그렇게 세계의 진실을 관객에게 일깨우듯 주인공들 역시 세상의 한계를 온전히 초월할 수 없으며 그 안에서 걷고 뛰는 존재임을 다시금 관객들의 뇌리에 각인한다.

영화는 유쾌한 소동극과 미스터리 추리극 사이에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무너뜨리길 거듭한다. 평범한 상류층 저택과 도시의 일상 풍경이 어느 틈에 초현실적 시공간으로 변모하고 관객은 어어 하면서도 자연스레 받아들인다. 현실에서 잠시 탈출하라 권하지만, 다시 돌아와 일상과 대면해야 함을 감추지 않는다. 영화를 단지 대중을 현실도피로 이끄는 게 아니라 세상과 직면하는 매개로 고민한 누벨바그 세대의 결기는 이 작품에서도 어김없이 펄떡거리고 있었다.

<작품정보>

셀린느와 줄리 배 타러 가다
Céline et Julie vont en bateau
1974 프랑스 판타지, 미스터리, 코미디
2026.09.30. 개봉 194분 15세 관람가
감독 자크 리베트
출연 줄리엣 베르토, 도미니크 라부리에 외
수입/배급 라이트하우스

27회 로카르노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  <셀린느와 줄리 배 타러 가다> 포스터
ⓒ 라이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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