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돌처럼 굳는 세상 앞에 선, 열세 살 소녀의 선택

김상목 2026. 9. 28.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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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석화하는 바이러스가 퍼지지만, 뚜렷한 치료법은커녕 실체도 파악하지 못해 흉흉한 세상, 병원에 근무하는 엄마와 단둘이 사는 13살 소녀 '알파'는 파티에서 충동적으로 어깨에 'A' 문신을 새긴다.

알파 앞에 펼쳐진 풍경은 딱 그랬어야 한다.

하지만 너무 당연해 보이던 알파 앞 풍경은 온통 흉흉하기만 하다.

그나마 혈액으로만 전염됨을 아는 알파의 엄마 같은 전문가들도 속 시원하게 장담하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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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알파>

[김상목 기자]

▲  <알파> 스틸
ⓒ 찬란
몸이 석화하는 바이러스가 퍼지지만, 뚜렷한 치료법은커녕 실체도 파악하지 못해 흉흉한 세상, 병원에 근무하는 엄마와 단둘이 사는 13살 소녀 '알파'는 파티에서 충동적으로 어깨에 'A' 문신을 새긴다. 문신 부위는 계속 가렵고 피까지 흐른다. 친구들은 그녀가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 같다며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그저 피하기만 하던 게 어느새 낙인으로 변한다. 낯선 차별과 폭력에 처한 소녀는 혼란스럽다.

감염환자를 매일 치료하던 엄마는 딸이 감염되었나 불안에 미칠 것만 같다. 혈액 검사 결과는 2주가 걸린다. 학교에서 왕따가 공공연히 벌어지고 알파는 벼랑 끝에 몰린다. 그렇지 않아도 미치고 펄쩍 뛸 노릇인데 집에 가보니 낯선 남자가 자기 방에 있다. 한창 대치하던 참에 귀가한 엄마는 삼촌도 몰라보냐며 타박한다. 기억도 나지 않는 엄마의 남동생 '아민'이다. 삼촌과 조카의 불편한 동거가 시작된다.

칸 황금종려상 감독의 비범한 궤적

여기 한 감독이 있다. 프랑스 최고 영화학교를 졸업하고 내놓은 첫 단편은 소녀가 독한 장염에 걸린 후 뱀처럼 허물을 벗게 된다는 설정(!)이다. 텔레비전 영화 연출을 맡겼더니 학창 시절 가해자에게 복수하려는 폭식증 환자가 주인공이다. 비범함을 넘어 괴이쩍은 주인공의 내력과 그로부터 펼쳐지는 평범함을 아득히 초월한 전개, 흔히 '바디 호러'라 불리는 공포영화 하위장르 변주로만 스치기엔 충격적인 설정을 통해 주제의식을 펼치려는 의도가 선명했다.

마침내 첫 장편이 공개된다. 2016년 <로우>는 채식 지향 주인공이 어느 날 인육의 맛을 깨달으며 벌어지는 난장을 화면에 펼친다. 5년 후 선보인 두 번째 장편 <티탄>은 감독의 고약한 취향이 절정에 오른다. 기계에 성적 충동을 느끼던 주인공은 마침내 자동차와 성관계를 맺고 2세를 보기에 이른다. 파격 그 자체인 영화는 감독에게 제인 캠피언의 <피아노> 이후 최초이자 칸 역대 두 번째로 여성 감독에게 황금종려상을 수여한다. 쥘리앙 뒤쿠르노의 이야기다.

여태껏 간략하게 소개한 것만 들어도 머리가 아찔해지며 근처에도 안 가야지 할 이들이 적지 않을 테다. 신작이 나올 때마다 격한 찬반 논란에 휩싸였던 감독의 작업은 단지 21세기 공포 장르의 새로운 유행으로만 취급되기 쉬운 바디 호러를 작가주의와 결합하는 도전의 연속이라 보면 이해가 쉽다. 신체의 불쾌한 변이는 곧 무엇이 정상이고 비정상이냐에 대한 질문이자, 흉한 외모나 낯선 속성 탓에 벌어지는 차별과 배제가 온당한 것인지 질문으로 향한다.

신작을 낼 때마다 호기심 천국과 더불어 논쟁을 몰고 다니는 감독의 신작 소식이 들려왔다. 황금종려상 수상 이후 차기작이라면 누구나 기대와 걱정을 나눠 품을 법하다. 이번엔 대체 또 어떤 기괴한 괴물 같은 영화를 보여줄지, 하지만 혹자는 수위 높은 장르물이 태생적으로 갖는 함정, 내용보단 자극에 경도되며 중독적으로 치닫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염려가 앞섰을 테다. 그리고 마침내 신작 <알파>가 전모를 드러낸다. 과연 세 번째 장편의 실체는 어떨까?

13살 소녀가 직면한 혐오와 차별의 장벽
▲  <알파> 스틸
ⓒ 찬란
13살, 어른이 되기엔 아직 한참 멀었어도 어린애 취급받기는 싫은 나이. 부모에게 의존하던 세상을 보는 시야를 스스로 갖추기 시작할 때이기도 하다. 낯선 세계에 흥분하면서도 두렵기도 하다. 알파 앞에 펼쳐진 풍경은 딱 그랬어야 한다. 풋풋한 첫사랑의 흥분과 어른 흉내 내며 처음 맛보는 일탈의 짜릿한 쾌락 앞에 흥분의 연속이다. 수학여행 가서 맛보는 술과 담배를 떠올려보라. 단순히 타락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문제다. 당연히 반항기도 따라붙게 마련.

하지만 너무 당연해 보이던 알파 앞 풍경은 온통 흉흉하기만 하다. 10대의 치기로 파티에서 독한 술도 좀 들이켜고 내친김에 미인가 시술로 문신 하나 새겼다. 용 무늬도 아니고 고작 알파벳 하나가 전부. 그런데 이게 문제다. 바늘이 비위생적이었는지 체질이 금속 알레르기가 있었는지 며칠씩 후유증이 계속된다. 하지만 평소라면 주변에서 종종 접하는 통과의례에 불과했을 일이다. 그러나 시기가 문제다. 사람이 대리석처럼 굳는 석화 현상이 창궐한 시절이다.

혼이 좀 나긴 해도 엄마가 의사라 응급 처치도 했고 파상풍 주사 맞는 것쯤으로 대수롭잖게 넘어갈 문제라 여겼다. 그러나 문제는 주변의 시선. 슬금슬금 주변을 피하는 건 약과다. 친구들은 숙덕거리며 노골적으로 따돌림을 개시한다. 알파는 억울하고 울화가 치민다. 주눅 들지 않고 거세게 맞설수록 충돌은 격화한다. 치고받다 보면 출혈도 생긴다. 순간 사방에서 비명이 퍼진다. 혈액으로 전염된다는 바이러스의 공포가 실시간 확산한다. 등교조차 하지 못한다.

매일 병원에서 환자와 씨름하던 엄마는 비이성적인 학내 분위기에 격분하지만, 공포를 가라앉힐 뾰족한 수는 없다. 알파는 집에 갇힌 채 시간만 죽이는 신세, 게다가 삼촌은 불편하기 짝이 없다. 그에겐 뭔가 문제가 있어 보인다. 검사 결과 나오는 데 시간이 걸리자 내색하진 않지만, 엄마 역시 초조함과 짜증이 늘어간다. 딸 걱정만 해도 큰일인데 남동생 역시 석연찮은 비밀이 숨은 듯하다. 한편 삼촌과 조카는 티격태격 다투면서도 묘한 인연을 쌓기 시작한다.

보이지 않는 장벽으로 차단된 세계의 풍경

알파가 사는 도시엔 점점 거친 모래바람이 잦아진다. 몰래 방을 빠져나오기 위해 애용하던 창문 밖 비계는 이제 소녀가 몸을 가누기도 힘들 정도로 흔들린다. 붉은 모래바람은 한 치 앞도 눈을 뜨고 쳐다보기 힘들게 만든다. 병원은 석화 바이러스 환자로 넘치고 의료인력은 피로에 시달린다. 치료법이 없다는 소식에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유언비어가 판을 친다. 그나마 혈액으로만 전염됨을 아는 알파의 엄마 같은 전문가들도 속 시원하게 장담하지는 못한다.

그나마 전염병 아포칼립스 장르의 흔한 법칙처럼 공권력이 감염자를 격리하거나 강제수용소로 보내는 말세는 벌어지지 않지만, 사회적 공포는 걷잡을 데 없이 끓어오른다. 알파가 다니던 학교 안 풍경은 (흔히 학교가 '작은 사회' 혹은 '사회의 축소판'이라 불리듯) 그런 세계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압축한다. 조금씩 수위가 올라가는 혐오의 장벽은 알파의 숨이 턱 막힐 지경. 물리적 수위가 높진 않아도 피해자가 느끼는 체감은 절대 가볍지 않은 수준으로 급상승한다.

(전작들에 비하면 무척 순화된(!) 외관이지만) 감염된 환자들의 초상은 비위 약한 이들이라면 '헉' 할 만큼 충격적이다. 그야말로 인간이 대리석 조각상처럼, 그것도 수천 년 지나 풍화된 형상으로 변해가는 과정이 여과 없이 펼쳐진다. 당연히 끔찍한 고통이 수반되며 신체 기능을 조금씩 잃어간다. 전염성이 거의 없다는 걸 익히 알더라도 근처에 가기 꺼릴 법하다. 타인에 일부러 해를 끼치지 않는 그들이 배척되는 모습은 인류 역사에 왠지 익숙한 그것이다.

혈액으로 전파되기에 단순 접촉으론 전염되지 않는 바이러스 증상은 1990년대 초반 후천성면역결핍증, 오늘날 AIDS라 불리는 그것을 은유한다. 체계적 예방조치가 시급한 와중에 신보수주의를 표방하던 미국(과 다수 국가) 정부는 국가가 할 책임을 다하기보다 사회적 소수자에게 전가하는 행태를 보였다. 지금도 여전히 극우 개신교계가 펼치는 동성애 혐오가 이때 태동한다. 의료 서비스에서 배제된 성 소수자가 떼죽음을 당해도 오히려 비난만 받을 뿐이었다.

소수자를 제물 삼는 사회에 던지는 우화
▲  <알파> 스틸
ⓒ 찬란
▲  <알파> 스틸
ⓒ 찬란
감독이 굳이 고국 프랑스가 아니라 (한국 관객에겐 크게 차별화되지 않지만) 1990년대 전후 미국을 배경으로 설정한 건 역사적 사실을 고려한 것. 줄리아 뒤쿠르노의 전유물이 아니라 이 시기를 어렴풋하게나마 기억하는 동 세대 감독 상당수가 작품 속 배경이나 소재로 활용하는 참이다. 보수 vs 진보 지향, 기성 vs 청년 세대 갈등으로 홍역을 앓던 서구 사회에서 우경화한 대응은 새로운 전염병을 방어하기보단 도덕적 단죄와 희생양 찾기로 봉합하려 했던 것.

사회적 우경화가 정치 갈등을 넘어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배제로 노골화하자 상황을 우려한 문화예술계 대응도 잇달았다. 뜻밖에도 당대 정상급 팝스타들이 반격의 선봉에 섰던 건 잊힌 기억이다. 마돈나는 자신의 대표곡 "Vogue"를 1990년 발매하며 1970년대 뉴욕 성 소수자들의 클럽문화에서 탄생한 '보깅'을 안무로 채용하고 뮤직비디오와 세계 순회공연에 게이 댄서들을 채용할 만큼 전력으로 맞섰다. 마녀사냥에 맞선 문화 투쟁이 전 세계적으로 펼쳐졌다.

물론 영화는 AIDS를 둘러싼 1990년대를 독창적으로 재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특정 질병은 핑계에 불과하다. 문제는 사회가 책무를 다하기보다 소수자를 희생해 무마하려는 고질적 행태다. 마녀사냥이 그랬고 오랜 세월 계속된 한센병 환자 격리 역시 같은 궤다.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조센징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가 어떤 의도로 유포되었나 떠올려보자. COVID-19 창궐 당시 특정 지역, 집단에 대한 따돌림과 유언비어 역시 대동소이하다.

어쩌면 문명 이후 인류의 역사에서 끝없이 반복해온 싸움의 풍경을 <알파>는 색다른 방식으로 재구성한다. 꿈에 나올까 겁나는 충격적인 시각 이미지는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으려는 미끼에 불과하다. 감독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타자와 경계를 긋는 것으로 '나'와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정상성 신화'를 부정하며 대항 논리를 단호하게 천명한다. 숨 가쁘게 휙휙 바뀌는 변화 속에서 고정된 틀에 갇히지 말고 변형과 전이로 인간성은 재구성된다는 주장이다.

처음엔 감염자를 힐끗 외면하던 소녀는 자신이 그리 될 수 있다는 공포를 넘어 조금씩 타자를 향한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한다. 그들을 연민하고 같은 인간으로 받아들이며 두려움을 극복하자 성숙한 인간으로 세계의 문을 열 각오가 선다. 대리석처럼 굳어가는 형상이 괴물이 아니라 '아름다움'으로 표현될 때 비로소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출발점이 마련된다. 그 지극히 당연한 메시지를 관객이 받아들이는 순간, 영화의 결말 또한 '아름다움'으로 표현될 테다.
▲  <알파> 포스터
ⓒ 찬란
<작품정보>
알파
Alpha
2025 프랑스 드라마, 바디 호러
2026.09.30. 개봉 128분 15세 관람가
감독/각본 줄리아 뒤쿠르노
출연 멜리사 보로스, 골쉬프테 파라하니, 타하르 라힘
수입/배급 찬란
공동제공 소지섭, 51k

78회 칸영화제 경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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