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역사상 유일했던 '국가부채 0달러'… 그 이후의 재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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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서는 우주가 창조된 직후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고 묘사한다(창세기 1장 2절). 아직 하늘과 땅, 낮과 밤의 구분이 없는 혼란스러운 상태다. 중국에서는 그런 상태를 천황(天荒)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케인스를 파천황으로 등극하게 만든, 진짜 파천황이 있었다.
그가 보기에는 파산의 위험이 없는 정부는 국가부채나 재정적자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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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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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늘과 땅, 낮과 밤의 구분이 없는 혼란스러운 상태를 중국에서는 천황이라고 표현한다. 직역하자면 하늘이 거칠다는 뜻인데, 당나라 시절 강릉부가 그러했다. |
| ⓒ unsplash |
소설 <삼국지>의 주요 무대이기도 했던 강릉부는 중원의 배꼽에 해당한다. 양쯔강을 끼고 있어 중국의 통상과 교통의 요충지였다. 수도인 장안이나 낙양으로 물자를 나를 때 반드시 거쳐야 했으며,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했다. 그런데 창피스럽게도 과거에 합격한 사람이 없었다. 수많은 사람이 도전했지만, 진사과조차 통과하지 못했다. 그래서 강릉부는 '천황'으로 불렸다. 풍요로운 물질생활과는 달리 문화적으로는 미개하다는 뜻이다.
그러한 때 유태(劉蛻)라는 인물이 등장하여 마침내 그 지역의 명예를 살렸다. 서기 850년 흙수저 출신인 유태가 진사과에 합격한 것이다. 그래서 훗날 손광헌이 그 지역의 역사를 기록한 <북몽쇄언(北夢瑣言)>에서 일개 지역 하급 관리였던 유태를 '파천황(破天荒)' 즉 혼돈의 시대를 끝낸 영웅으로 소개했다.
어느 분야에서나 새 시대를 개척하는 파천황이 있다. 97년 전 대공황이 시작되었을 때 재정적자를 통해 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주장했던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좋은 예다. 그는 경제가 어려울 때는 정부도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는 기존의 발상을 뒤집었다. 그의 파천황적 아이디어가 무지몽매했던 각국의 정책가들을 일깨워 세계 경제를 살렸다.
그런데 케인스를 파천황으로 등극하게 만든, 진짜 파천황이 있었다. 케인스보다 스무 살이나 어렸던 아바 러너다. 제정 러시아 출신의 경제학자 러너는 영국에서 자본주의 경제의 핵심을 간파했다. 그가 볼 때 재정정책의 목적은 수지 균형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경기를 살리고 실업을 없애는 것이다. 재정정책은 물가와 총수요를 관리하는 통화정책과 더불어 경제정책의 두 축을 이룬다.
그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소위 IS-LM 모델이 탄생했다. 재정정책이 지배하는 IS 곡선과 통화정책이 지배하는 LM 곡선을 통해 거시경제 현상을 체계적으로 설명한다. 그 모델은 보통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존 힉스와 하버드대학교의 앨빈 한센이 완성했다고 알려졌지만, 아바 러너가 보이지 않는 공헌을 했다.
러너는 기능적 재정(functional finance)과 건전한 재정(sound finance)을 구분했다. 그러면서 오로지 균형재정만을 최고로 생각하는 규범적 재정관에서 벗어나야 자본주의의 붕괴를 막는다고 예언했다. 그가 보기에는 파산의 위험이 없는 정부는 국가부채나 재정적자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21세기의 현대화폐이론(MMT)은 그런 생각이 극단적으로 전개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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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일 서울 중구 하나은행 딜링룸 현황판에 코스피와 삼성전자, 하이닉스 주가가 표시되고 있다. |
| ⓒ 연합뉴스 |
이때 정부가 내놓은 해법은 미래대응기금을 만드는 것이다. 양입위출(量入爲出), 즉 경기 흐름에 따라 변동하는 세수에 맞춰 나라의 씀씀이를 조절하는, 중국 주나라 때부터 내려오던 구시대적 발상에서 깨어나 미래 세대와 장기 국가경쟁력 확보를 위해 목돈을 마련해 두자는 제안이다.
그에 대한 반대 논리도 만만치 않다. 방송과 신문을 통해 연일 쏟아지고 있다. 기금의 지속가능성이 의심된다, 미래와 상관없는 단순 보조금 지원에 불과하다, 국회와 지방정부의 기능이 위축된다는 등 일일이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다.
이러한 때 러너가 80년 전 제안했던 '기능적 재정'이 문제 해결의 좋은 실마리가 된다. 재정정책을 검토할 때 건전성 여부만 따지는 규범적 자세를 지양하고, 효과적인지 여부만 따지는 기능적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옳고 그름'에 대한 생각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당장 법인세 수입은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데, 합의를 이루기 힘들다.
일부 학계와 야당이 주장하는 것처럼 미래대응기금의 지속가능성이 낮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당장에 쏟아지는 법인세를 국가부채 상환에 쓰는 것도 지속가능성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190년 전 미국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1830년대 초 미국 경제는 전례 없는 호황을 맞았다. 신용 팽창에 따라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고 투기 붐이 일 정도였다. 덕분에 세수도 엄청나게 늘어났다. 앤드루 잭슨 대통령은 그때 거둬들인 세금을 국가부채를 상환하는 데 사용했다. 덕분에 독립전쟁 때부터 존재했던 연방정부의 부채가 빠른 속도로 감소해서 1835년 말 마침내 0달러에 이르렀다. 미국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하지만 1837년 초 잭슨 대통령의 퇴임과 더불어 지독한 불황이 시작되었다. 일자리가 사라지고 은행들의 부도가 이어졌다. 1837년 금융위기다. 쏟아지는 세금을 아무 생각 없이 국가부채 상환에만 쓴 결과다. 21세기 한국은 이런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한다. 일시적인 재정 흑자가 재앙이 되는 일을 막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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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홍근 기획예산처 장관이 8월 28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2027년도 예산안과 2026~2030년 국가재정운용 계획에 대해 브리핑하고 있다. |
| ⓒ 연합뉴스 |
뉴딜 정책보다 먼저 시작된 후버 댐의 경우 콜로라도강의 범람을 막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주변 7개 주가 수자원 배분 원칙을 두고 오랜 기간 신경전을 벌이는 바람에 착공이 늦어졌다. 9년의 협상과 타협 끝에 1931년이 되어서야 건설이 시작되었다.
테네시강 유역 개발공사(TVA), 워싱턴 주의 그랜드 쿨리 댐, 뉴욕 주의 트라이버러 다리와 맨해튼의 링컨 터널도 마찬가지다. 현역 정치인들의 끈질긴 협상력과 설득력이 미래 세대를 위한 국가기간시설을 가능케 했다. 물론 예산 낭비를 이유로 한 야당의 반대도 많았지만, 여당과 행정부가 국민의 지지를 얻어냈다.
우리는 어떠한가? 코로나19 위기 때 문재인 정부는 디지털 뉴딜, 그린 뉴딜을 외치면서 114조 원에 이르는 대규모 재정지출 계획을 발표했다.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온 그 계획에는 철저한 사전 준비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그냥 밀어붙였다.
그래서 필자가 '피렌체의식탁' 칼럼을 통해 "장관부터 말단 직원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큰돈을 만져 본 적이 없다. 따라서 정부는 재정집행의 효율성에 특별한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걱정했었다. 미래대응기금도 마찬가지다. 충분한 검토와 준비가 없는 미래대응은 지지받기도 어렵고, 성공하기도 힘들다.
'기능적 재정' 차원에서 합리적인 방법
국회의 견제 기능이라든지, 지방재정의 취약성 증가, 기본소득 또는 보조금 성격의 지출 등도 꼼꼼히 따져봐야 할 중요한 이슈다. 하지만 그런 문제는 경제와 정치가 뒤섞인 응용문제다. 문제를 단순화할 필요가 있다. 기능적 재정과 규범적 재정의 분리다. 기능적 재정을 따로 떼어 검토하면, 즉 거시경제적 효과에만 집중하면, 흥분이 가라앉는다.
그런 관점에서 미래대응기금의 운용 방법에 대해 한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정부의 계획에 따르자면, 총 162조 원의 기금 자금 중 104.4조 원은 민간 금융기관에 위탁되어 운용된다. 목표 수익률은 연 3.85%다. 10년물 국고채 수익률이 연 4.4%에 이르는 상황에서 차라리 빚을 갚느니만 못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그런 계산을 할 때 빠뜨린 것이 있다. 세금으로 거둔 돈이 한국은행을 통해 정부부문으로 흡수되지 않고, 시중에 머물러 유동성을 늘린다는 사실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화가 원화로 바뀌어 시중에서 돌면 물가가 오른다. 현재의 국고채 수익률 4.4%는 더 상승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 일을 막으려면 미래대응기금의 관리는 한국은행에 맡겨야 한다. 기금 자금이 한국은행에 흡수되어 시중 유동성이 줄어드는 만큼 한국은행은 통화안정증권 발행비용을 낮출 수 있다. 그래서 정부와 한국은행 간에 따로 이자 지급 약정을 맺는 것이 가능하다. 또는 정부가 한국투자공사(KIC) 등에 예탁해 해외에서 자금을 굴릴 수도 있다. 요는 법인세로 거둬들인 세금이 시중에 풀려서 물가를 자극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대공황 때 미국이 정확하게 그런 방법을 취했다. 1934년 미국은 금의 공정가격을 온스당 20.67달러에서 35달러로 인상하여 달러화의 가치를 41%나 낮췄다. 수출 경쟁력 제고를 통해 경기를 부양하려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미국 연방정부가 가진 금의 재평가 이익이 28억 달러나 생겼다. 지속가능성이 없는, 일시적인 회계상의 이익이다. 그 규모는 세출의 43%, 세입의 95%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미국 정부는 운용 방법을 고민하다가 그중 일부인 20억 달러를 바탕으로 외환안정기금(ESF)을 설치했다. 그리고 해외에서 자금을 운용키로 했다. 환율안정을 위해 우리 정부가 운용하는 외국환평형기금의 원조다. 지난 7월에는 미 재무부가 엔화 환율 인하를 위해 ESF 자금 일부를 사용했다.
한국의 미래대응기금도 그렇게 운용되는 것이 '기능적 재정' 차원에서 합리적인 방법이다. 국내에서 거둔 세금을 국내 금융시장에서 굴리면서 운용수익률을 국채 수익률과 비교하는 것은 솔직히 말해서 어리석다. 해외에서 굴리는 것이 물가 관리와 환율안정 측면에서 지극히 합리적이다. 이런 필자의 제안이 파천황은 아니다. 경제학자라면, 규범적 재정이 아닌 기능적 재정을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덧붙이는 글 | 위 기사의 전문은 아래 링크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http://www.firenzedt.com/news/articleView.html?idxno=33217 필자 차현진은 한국은행에서 39년간 근무한 ‘찐 중앙은행맨’이다. 한은의 정책과 기획 파트를 고루 섭렵했고, 워싱턴사무소장, 부산 본부장 등을 거쳤다. 금융경제 분야를 대중적으로 해설하는 데 뛰어나다. <은행 너머의 금융> <금융 오디세이> <숫자 없는 경제학> <돈 밝히는 세계사>와 같은 경제교양서적을 다수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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