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세계유산 추진하는 아시오 광산 가보니…강제동원 흔적 없고, 초라한 목조비만

유성운 2026. 9. 24.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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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오 광산의 조선인 징용 노동자 추모비. 사진 유성운 특파원

아시오 조선인 강제 동원 희생자 (足尾朝鮮人强制動員犧牲者).
15일 일본 도치기현의 한 도로변에는 높이 1m가량의 작은 목조 위령비가 놓여 있었다.

조선인 희생자들을 기리는 민간단체가 세운 작은 목조 위령비였다. 주변엔 아무것도 없는 도로변 수풀 사이에 자리한 데다 별도의 안내가 없어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자동차를 타고 주변을 30분가량 빙글빙글 돌다가 겨우 찾았다.

위령비 옆 안내판에는 73명의 이름과 나이가 적혀 있었다. 0~3세 영유아도 다수 포함돼 있다.
이들은 10㎞가량 떨어진 도치기현 닛코시 아시오(足尾) 구리광산에서 일했던 조선인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다. 아시오 광산은 일본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아시오 광산의 세계유산 등록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이날 오전 일본 도치기현 닛코시 아시오(足尾) 구리광산 정문 앞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추진을 알리는 플래카드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일본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는 도치기현 닛코시 아시오 구리광산. 사진 유성운 특파원

갱도 안으로 들어가자 에도시대 광부들이 망치와 정으로 암벽을 깨는 모습부터 근대식 굴착기를 이용한 작업까지 광산의 역사가 시대별로 펼쳐졌다. 일본 근대 산업화를 떠받친 대표적인 광산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전시다.
아시오 광산에서는 에도시대인 1610년경부터 구리를 채굴했다. 1877년 사업가 후루카와 이치베에(古河市兵衛)가 인수한 뒤 서양식 채굴·제련 기술과 전력 설비 등을 도입하면서 생산량이 급증했다.
1890년대에는 일본 전체 구리 생산량의 약 40%를 차지했다. 1916년 아시오 지역 인구는 3만8000명을 넘어 당시 도치기현에서 우쓰노미야에 이어 두 번째로 많았다고 한다.

일본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는 도치기현 닛코시 아시오 구리광산. 사진 유성운 특파원

하지만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이다.
급속한 개발의 이면에는 주변 주민들의 피해가 있었다. 광산 폐수와 제련소 매연이 농경지와 주민들의 삶을 덮친 ‘아시오 광독 사건’이다. 일본 산업화의 부작용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공해 사건으로 꼽힌다.

특히 전쟁 중 조선인과 중국인 노동자들도 대거 동원됐다는 사실은 아시오 광산에 짙게 드리운 그림자다. 1946년 일본 후생성 조사 자료를 토대로 한 연구에 따르면 1940년 8월부터 1945년 5월까지 아시오 광산에 동원된 조선인은 2416명에 달한다.
닛코시의 공식 아시오 광산 연혁에도 “전시 노동력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한반도에서 노동력을 조달해 갱내외 작업에 종사시켰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현재 아시오 광산의 전시에서 조선인 2400여명의 역사를 확인하기는 쉽지 않았다.
에도시대 채굴 방식부터 근대 광산기술의 발전 과정까지 상세하게 설명하면서도, 조선인 노동자에 관한 내용은 전시 동선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연혁에 한 줄 등장했다. 노동력 부족으로 조선인 노동자를 사용했다는 취지였다. 이들이 어떤 경위로 일본에 왔고 어떤 방식으로 광산에 동원됐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찾기 어려웠다.

일본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는 도치기현 닛코시 아시오 구리광산. 사진 유성운 특파원

희생자를 기리는 시설에서는 조선인과 중국인의 차이가 컸다.
조선인 위령비로부터 2㎞ 남짓 떨어진 곳에는 높이 13m의 철근콘크리트 위령탑과 주변 추모 공원이 마련되어 있었다.
아시오에 강제동원된 중국인은 약 200명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을 기리는 ‘중국인 순난열사 위령탑’은 중일 국교정상화 이듬해인 1973년 세워졌다. 도치기현 차원의 실행위원회가 건립을 주도했고, 현민들이 당시 2000만엔을 모금했다고 한다.

아시오 광산 중국인 징용 노동자 추모비. 사진 유성운 특파원

일본은 앞서 군함도와 사도광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는 과정에서도 조선인 노동의 강제성을 어떻게 설명할지를 놓고 한국과 갈등을 빚었다. 세계유산의 ‘전체 역사’를 충실히 설명하겠다는 약속이 제대로 이행되고 있는지를 둘러싼 논란도 이어지고 있다. 아시오 광산 역시 산업화와 공해 극복의 역사를 세계유산의 가치로 내세우고 있다.

닛코=유성운 특파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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