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균이냐, 요구르트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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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교회를 시작하고 세계화한 나라는 중국이다.
발효과학에 비유하자면 전자는 빚어진 '요구르트'이고 후자는 변화를 일으키는 '유산균'이다.
성도는 요구르트의 달콤함에 안주하지 않고, 스스로 유산균이 되어 번식해야 한다.
교회는 요구르트 공장이기를 멈추고 살아 숨 쉬는 유산균을 쉼 없이 배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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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교회를 시작하고 세계화한 나라는 중국이다. 그러나 제자 공동체로 꽃피운 나라는 인도다. 인도는 ‘전 성도 사역자화’에 최적화된 영적 토양을 지녔다. 최근 열린 델리 집회와 2년 전의 비하르 집회가 그 명백한 증거다. 델리에서는 청년 대학생들이 사역자로 자원했다. 비하르에서는 평신도들이 목양의 주역으로 헌신했다.
비하르 집회에는 1000명의 평신도 사역자가 모였다. 그들은 저마다 5명에서 30명 규모의 가정교회를 직접 목양하고 있었다. 지난주에는 사랑의병원 암환우 선교팀 26명이 일본 선교를 다녀왔다. 조잔케이 오타루 아사히카와 삿포로를 순회하며 복음을 전했다. “이 땅에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눈물로 부르짖었다. 참가자 절반은 말기 암 환우였지만 그들은 연약한 환자에 머물지 않았다. 담대한 사역자로 변모했다.
요구르트는 훌륭하고 귀한 음식이다. 우유라는 원료에 보이지 않는 정성이 응축된 결실이다. 그러나 요구르트는 결국 ‘소비되기 위해’ 존재한다. 반면 유산균은 멈춰 있는 완제품이 아니라 스스로 약동하는 생명체다. 유산균은 스스로 증식한다. 주변을 발효시켜 끝내 새로운 요구르트를 만들어 낸다.
교회 안에도 두 갈래 신앙이 흐른다. 한쪽에는 은혜를 누리며 치유와 안식을 누리는 성도가 있다. 다른 한쪽에는 그 은혜를 이웃에게 끊임없이 흘려보내는 성도가 있다. 그들은 말씀으로 영혼을 살리고 넘어진 지체를 일으켜 세운다. 발효과학에 비유하자면 전자는 빚어진 ‘요구르트’이고 후자는 변화를 일으키는 ‘유산균’이다.

깊이 있는 설교를 듣는 것은 소중하며 훈련받고 돌봄을 받는 과정도 필요하다. 그러나 신앙의 종착지가 영적 소비자에 머문다면 그것은 부르심의 본질을 놓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은혜의 전달자로 부르셨다. 성도는 요구르트의 달콤함에 안주하지 않고, 스스로 유산균이 되어 번식해야 한다. 목회자의 역할도 맛있는 요구르트를 계속 공급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성도를 유산균으로 깨우고 무장시켜야 한다. 이 부르심을 일깨워 주는 진리가 바로 ‘만인사역자론’과 ‘상급 신앙’이다.
히브리서는 참된 신앙의 기준을 선언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성경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참된 믿음의 두 기둥으로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상 주시는 이’심을 믿는 것을 나란히 놓는다. 믿음의 본질은 ‘하나님의 존재’와 ‘공의로운 보상자이심’을 믿는 것이다.
상급 신앙은 부차적인 선택 사항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온전한 믿음의 본질이다. 하나님이 공의로운 보상자이심을 바라보지 않는 신앙은 성경적 신앙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이 상급을 심장에 품고 살았다. 영원한 상급은 고난을 견디게 하는 실체였다.
그는 사도로서의 정당한 권리를 내려놓았다. 사례비도 스스로 거절했다. 그가 치열하게 계산한 것은 하늘의 상급이었다.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고전 9:18) 복음을 위한 거룩한 항복과 자기부정 속에 진짜 상급이 있다. 바울은 이를 꿰뚫어 보았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4) 바울을 달리게 한 원동력은 ‘부름의 상’이었다.
그 상급의 실체는 명확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살전 2:19~20) 바울은 성도들을 제자 낳는 사역자로 길러냈다. 즉 유산균으로 키웠다. 참된 상급은 나를 통해 살아난 ‘사람’ 그 자체다. 상급 신앙의 핵심은 제자를 키우는 데 있다. 사도 바울이야말로 스스로를 쪼개어 번식한 유산균 신앙의 원형이다.
대학 시절 필자는 한국대학생선교회(CCC)에서 캠퍼스 복음화에 헌신했다. 그 과정에서 낙제를 겪었다. 덕분에 의예과를 3년 만에 수료했다. 그러나 캠퍼스에 쏟아부은 1년간 놀라운 은혜가 임했다. 그때 양육한 형제들이 또 다른 제자를 낳았다. 의대를 졸업할 무렵에는 영적인 7대 손자까지 이어졌다. 성장 속도는 저마다 달랐다. 그러나 대다수가 지금까지 신실한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사역의 열매가 준 기쁨은 낙제의 상처를 압도했다. 중요한 원리가 있다. 한 번이라도 사역의 열매를 맛본 성도는 평생 사역자가 된다. 구원은 값없는 은혜의 선물이다. 그러나 구원은 종착역이 아니다. 새로운 사역이 열리는 출발점이다. 구원받은 자의 손에는 소중한 자원이 쥐어진다. 시간 재능 재정 직업 관계 은사다.
구원 이후의 삶은 청지기적 위탁의 시간이다. 성경은 엄중히 묻는다. ‘내가 맡겨준 은혜의 자원으로 너는 무엇을 하였느냐.’ 달란트 비유의 한 달란트 받은 종을 보라. 그는 주인의 것을 탕진하지 않았다. 착복하지도 않았다. 단지 땅에 묻어두었을 뿐이다. 그러나 주인의 책망은 매서웠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마 25:26,30)
우리의 질문은 바뀌어야 한다. “교회 생활을 잘 하고 있는가”에 머물러선 안 된다. “맡겨주신 달란트로 다른 영혼을 살리고 있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만인사역자론은 선택적 구호가 아니다. 성도의 실존적 정체성이다. 성령은 각 사람에게 유익을 주려고 은사를 나누어 주셨다.(벧전 4:10) 은사는 곧 사명이다. 사명이 있다는 것은 결산할 날이 온다는 뜻이다.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 12:48) 이것이 상급 신앙의 본질이다.
만인사역자론은 삶의 모든 자리를 사역지로 바꾼다. 목회자에게는 강단과 양 떼를 돌보는 달란트가 있다. 기업인에게는 정직한 경영으로 공의를 세우는 달란트가 있다. 의사에게는 치유의 손길이 있다. 교사에게는 다음세대를 깨우는 가르침이 있다. 부모는 가정을 세우는 사역자다. 청년은 열정의 시간을 바치는 사역자다. 은퇴자는 기도와 영적 혜안을 쏟는 사역자다.
성도들이 만인사역자임을 깨닫지 못하고 달란트를 묻어둔 채 영적 유예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안타깝다. 신앙생활이 오래되면 예배자에서 세련된 ‘관객’으로 변질되기 쉽다. 그러나 마지막 날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은 물으실 것이다.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은혜는 ‘나’에게 갇히면 썩게 마련이다. 영원한 상급은 언제나 타인에게 흘러간 사랑과 희생에 맞닿아 있다. 냉수 한 그릇의 섬김, 영혼을 해산하는 수고에 면류관이 약속돼 있다. 주님은 다섯 달란트 남긴 자와 두 달란트 남긴 자를 똑같이 칭찬하셨다. 주님이 보시는 것은 크기가 아니다. 맡겨진 일에 대한 충성과 진실함이다.

유산균은 작다고 낙심하지 않는다. 살아있기만 하면 전체를 발효시킬 것을 알기 때문이다. 교회가 경계해야 할 함정이 있다. 성도를 ‘요구르트 소비자’로 머물게 하는 안일함이다. 화려한 프로그램으로 성도를 영적 유아로 묶어두어선 안 된다. 그것은 생명력 없는 요구르트 공장과 같다.
목회자의 영광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슈퍼맨’에 있지 않다. 성도를 무장시키는 데 있다. 성도가 사역자로 서게 도와야 한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1~12)
이 본문은 만인사역자론의 뼈대다. 여기서 ‘봉사의 일’로 번역된 헬라어는 ‘에르곤 디아코니아스’다. ‘디아코니아’는 단순한 잡무가 아니다. 주님께 위탁받은 거룩한 ‘영적 사역(Ministry)’을 뜻한다. 킹제임스성경(KJV)은 이를 ‘사역의 일(work of the ministry)’로 정확히 번역했다. 반면 현대 번역은 이를 단순한 ‘봉사(service)’로 축소했다. 성도를 보조적 자원봉사자로 전락시키는 우를 범했다.
또한 ‘온전하게 하여’는 헬라어로 ‘카타르티스모스’다. 의학적으로는 ‘부러진 뼈를 맞추어 치료하는 것’이다. 어부에게는 ‘찢어진 그물을 깁고 수리하는 것’이고 군인에게는 ‘전투에 투입하도록 완전무장시키는 것’이다. 의미는 분명하다. 지도자는 성도를 온전하게 훈련시키는 코치다. 성도의 찢어진 그물을 꿰매 줘야 한다. 삶의 현장으로 파송해야 한다. 그곳에서 진짜 사역(디아코니아)을 감당하게 해야 한다.
유산균은 또 다른 유산균을 낳는다.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 2:2) 바울에서 디모데로 이어진다. 디모데에서 충성된 사람들에게로 이어진다. 또 다른 사람들에게로 전수된다. 이 거룩한 4대의 생명 계승이 유산균 신앙의 정수다. 복음의 소비는 한 세대로 끝난다. 복음의 발효는 세대를 이어 도시와 민족을 바꾼다.
인생에서 가장 뼈아픈 낭비는 맡겨주신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는 것이다. 단 한 사람도 품어보지 못한 채 빈손으로 주님 앞에 서는 일이다. ‘만인사역자론’은 성도의 정체성을 선포한다. ‘상급 신앙’은 사역을 지속할 영원한 동기를 부여한다. 모든 성도는 은사를 위탁받은 청지기이자 삶을 결산해야 할 사역자다.
교회는 요구르트 공장이기를 멈추고 살아 숨 쉬는 유산균을 쉼 없이 배양해야 한다. 구원은 은혜로 받는다. 사명은 무한한 은혜의 무게만큼 높고 깊고 넓다. 끝까지 충성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상급이 주어진다.(마 25:21)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인 돈 파이퍼의 ‘천국에서 90분’이라는 책이 있다. 사고로 사망 판정을 받았다가 90분 만에 살아난 교사의 수기로 그 시간 동안 겪었던 짧은 천국 체험 스토리다. 그가 천국 문에 들어섰을 때 특별한 환영단이 마중을 나왔다고 한다. 그들은 생전에 그를 위해 기도해 준 사람들이었다. 그에게 복음을 전해 준 은인들이었다. 그들은 벅찬 기쁨으로 뛰어나와 그를 맞이했다.
혹시 오늘 밤 주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부르신다면 우리는 무엇을 손에 쥐고 그 은혜의 보좌 앞에 서겠는가. 수없이 축적했던 지식의 파편이나 소비했던 은혜의 기억들이 아니라, 내가 눈물로 사랑했던 사람, 나를 통해 복음을 듣고 살아난 영혼, 내가 낙심의 늪에서 건져 올린 지체의 손을 잡고 서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의 성공한 목회자들에게도 묻고 싶다. 화려한 무대 위에서 소비되기 쉬운 달콤한 요구르트를 빚어내는 일에 계속 안주할 것인가. 아니면 강단 아래로 내려가, 자신처럼 거룩한 생명력을 뿜어내며 세상을 발효시킬 또 하나의 유산균을 배양할 것인가.

황성주 해밀리 회장·사랑의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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