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하던 쌀 흔해졌어도… 밥만큼 중한 게 어딨나”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경북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에 있는 '시장정미소'에서 최창국(80)씨가 57년째 벼를 도정하고 있다.
최씨는 석유식 발동기(원동기)로 기계를 돌리고 지게와 소달구지로 집집마다 쌀을 배달하던 1970년부터 시장정미소에서 일했다.
최씨는 "인근에 시장이 있어서 간판이 없던 때에도 다들 '시장정미소'로 불렀다"고 설명했다.
시장정미소가 판매하는 쌀 양의 추이를 묻자 최씨는 "옛날의 3분의 1 정도로 줄었다"고 답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북 안동 ‘100년’ 시장정미소 최창국씨
“배고픈 이웃 먼저 생각… 성의를 다해 여기까지 왔다”

경북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에 있는 ‘시장정미소’에서 최창국(80)씨가 57년째 벼를 도정하고 있다. 시장정미소는 1920년대 일제강점기부터 운영돼 100살을 넘겼다. 아직도 소나무와 미루나무 기둥이 슬레이트 지붕 건물을 지탱하고 있고, 내부의 기계는 사람이 손으로 압력을 조절하는 반수동 마찰식이다. 판매·가공·수매를 모두 하는 대형 미곡종합처리장(RPC)이 보편화하면서 개인 정미소는 대부분 사라졌지만, 최씨는 인근 농민이 수확한 벼 한 포대도 받고 두 포대도 받으며 여전히 자리를 지킨다.
최씨는 농민들이 거둬온 나락을 만지고 깨물어 어떻게 도정할 것인지 결정한다. 수분이 적은 ‘마른 쌀’은 추를 더 걸어 내부 압력을 높이고, 덜 마른 ‘녹은 쌀’은 떡지지 않게 살살 깎는 것이 장인의 비법이다. 최씨는 나락을 눈으로 보기만 해도 농토가 진 곳인지 모래땅인지 알고, 지었을 때의 밥맛을 짐작한다. 최씨는 “많던 농촌 사람은 다 없어졌고, 귀하던 쌀은 흔해져 천대받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밥 먹고 사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고, 성의를 다해 일해 왔다”고 정미소를 지킨 자부심을 표했다.
지난 21일과 22일 찾은 시장정미소는 전동 모터 돌아가는 소리, 현미기와 백미기 내부에서 나락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최씨는 “추석에 자녀들에게 줄 쌀을 찧으려는 농민들이 찾아온다”고 말했다. 그는 모처럼의 일감에 바쁜 모습이었다. 석발기(돌 골라내는 기계)를 살피다 기계에서 분리돼 나온 미강(쌀겨)을 정리하고, 싸라기(깨진 쌀)의 상태를 손으로 만져 확인하다간 이윽고 백미가 쏟아져 담기는 자루의 입구를 끈으로 동여맸다.
시장정미소를 찾는 농민들은 느려도 꼼꼼한 장인의 ‘맞춤형’ 기술을 좋아했다. 낙동강 끼고 농사짓는 인근 풍산읍 농민들뿐 아니라 멀리 예천군에서도 찾아온다. 안성근(56)씨는 “여기 와서 쌀을 찧으면 한나절은 걸린다”면서도 “결국 밥맛이 좋기 때문에 이용한다”고 말했다. 트럭을 몰고 온 농민이 “내일 나락 찧을 수 있나요”라고 물었다. 최씨는 “언제든 오시라. 어디서 오셨느냐”고 되묻더니 금세 그의 이웃의 안부를 물었다.
한 손님이 나무 기둥 남은 내부를 가리키며 “이 정미소가 안동 제일의 골동품이고, 골동품이지만 진가리(‘진짜’라는 경상도 방언)”라고 말했다. 천장을 가로로 받친 마룻대에는 상량식의 흔적으로 ‘경자년 십이월 초오일’이 붓글씨로 쓰여 있다. 최씨는 “1960년 음력 12월 5일에 증축하면서 쓴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최씨는 석유식 발동기(원동기)로 기계를 돌리고 지게와 소달구지로 집집마다 쌀을 배달하던 1970년부터 시장정미소에서 일했다. 군을 전역하자마자 친형이 맡고 있던 정미소 일에 뛰어든 것이 시작이다. 친형이 인수하기 이전에도 벌써 40년 넘게 운영된 정미소였다. 이전에는 학교 교감 선생님 출신이 운영했고, 그 전에는 ‘임 사장’이라는 이가 있었다고 최씨는 기억한다.

시장정미소라는 이름은 최씨 형제가 지은 것이 아니다. 원래부터 그저 시장정미소였다. 최씨는 “인근에 시장이 있어서 간판이 없던 때에도 다들 ‘시장정미소’로 불렀다”고 설명했다. 과거 가곡리 일대 농가가 200호에 달할 때에는 정미소 근처에 ‘중리시장’이라는 5일장이 섰었다. 시장에 나와 파는 물건은 각기 달랐지만, 사람들이 돌아갈 때는 하나같이 초가집 정미소에 들러 보리쌀을 샀다. 그때 정미소는 보리쌀과 밀도 찧었고, 명절이면 쌀을 빻는 바로 옆에서 가래떡과 시루떡도 지었다.
100년 영업의 비밀은 이익보다 사람을 우선한 것이다. 최씨는 “이제는 밥 못 먹는 사람 하나 없지만 예전에야 어디 그랬느냐”고 말했다. 수십년 전, 동네에 이사온 한 가장이 정미소를 찾아와 “사장님, 내가 아쉬운 소리를 좀 하러 왔습니다” 한 적이 있었다. 그는 “배고파서 왔다. 보리쌀 몇 말만 꿔달라”고 했다. 최씨의 형이 보리쌀을 담아 주며 “먹고 모자라면 더 오시라, 일해서 갚든지 하시라”고 말해줬다. 그 가장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농사지은 쌀을 시장정미소로 가져와 도정했다.
최씨는 “지금은 쌀이 남아돌지만, 그땐 가을철이 되면 보리쌀 꿔가는 사람 천지였다”고 말했다. 한 아낙은 중리시장에서 과일과 채소를 팔다가 해가 지면 좌판을 거두고 시장정미소에 들렀다. 종일 판 소득으로 살 수 있는 보리쌀은 팔남매가 먹기엔 부족한 양이었다. 최씨 형제는 “나중에 돈 벌면 주시오” 하면서 자루에 보리쌀을 더 담아줬다. 배고파 하는 사람이 있으면 “자루만 갖다 두라”며 보리쌀을 먼저 내주기도 했다. 최씨는 “배고픈 사람을 늘 우선했다”고 말했다.
배고픈 사람, 어려운 사람을 먼저 챙기는 사랑방 역할은 시장정미소의 오랜 전통이자 장수 비결이다. 시장정미소는 매일 아침 인근 양조장에서 막걸리 두 말씩을 배달시켰다. 곡식 빻아 달라고 찾아온 농민들이 기다릴 때 내줄 요량이었다. 최씨의 형수가 풍로로 가마솥 밥을 지어 된장과 함께 내왔다. 최씨는 “나한테 보탬이 되는 손님이 오신 것인데, 커피 한 잔 찬물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는 것이 나의 철학”이라고 설명했다. 최씨는 “그런 마음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못 왔다”고 말했다.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 쌀 때문에 생긴 시장정미소의 에피소드는 무궁무진하다. 최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 당시 정부가 ‘7분도(分度)로 찧어 먹어라’ 했던 때가 생각난다”고 말했다. 쌀 껍질 벗겨내는 도정률을 70% 정도로 제한하라는 것이었는데, 결국 전국적 식량 부족에 따른 쌀 절약 고육책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아낙이 시장정미소를 찾아와 “아버지 제사인데, 신지밥(‘제삿밥’의 경상도 방언)을 해야 하니 백미로 좀 해 주소” 하고 간곡히 부탁했다.
최씨는 평소보다 압력을 더해 쌀을 하얗게 깎아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하필 기계가 돌아갈 때, 안동시 양정계(농촌 행정을 담당하던 옛 부서) 공무원이 불시 점검을 나왔다. 공무원은 “왜 법을 어기고 이렇게 백미를 찧었느냐”고 지적했다. 정미소에 있던 아낙이 “우리 아버지 제사를 지내느라 내가 부탁했다”고 변론했지만 소용 없었다. 시장정미소는 한 달 영업정지 처분을 받았다. 최씨는 “예전엔 그렇게 백미가 귀했는데, 요즘은 건강 때문에 일부러 ‘현미로 해 달라’ ‘5분도로 덜 깎아 달라’ 하는 사람들도 있다”며 웃었다.
귀했던 쌀은 흔해졌고 정미소 문턱을 넘는 기구한 사연도 뜸해졌다. 이젠 쌀을 많이 먹는 것이 나쁜 식습관으로 통하기마저 한다. 최씨는 “하루 한 끼도 쌀밥을 못 먹던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쌀이 천대받고 있다. 쌀 한 되로 음료수 한 병도 못 사는 세상이 됐다”고 말했다. 보관하다가 색깔이 변하면 쌀을 그냥 버리는 이들도 있더라며 최씨는 안타까워했다. 요즘 세태에 어떤 생각이 드냐고 묻자 최씨는 “부강해지고 잘 살아서 그렇다. 세월 따라 잘 살면 되지”라고 답했다.

시장정미소가 판매하는 쌀 양의 추이를 묻자 최씨는 “옛날의 3분의 1 정도로 줄었다”고 답했다. 그는 “한창 때는 매일 40㎏짜리 오십 가마도 팔고 칠십 가마도 팔았는데, 지금은 두 가마도 못 판다”고 말했다. 인구당 쌀 소비량은 줄기만 한다. 그나마 한때는 시장정미소가 학교와 병원에도 급식용 쌀을 납품할 수 있었으나, 대형 RPC를 내세운 기업들이 판로를 잠식했다. 최씨는 “정부 도정공장, 농협, 기업체들이 점령했다”고 말했다.
최씨가 정미소에서 체감하는 추석 풍경도 56년 세월 속에서 사뭇 달라졌다. 다들 모여 떡 해가던 ‘명절 특수’는 이제 없다시피하다. 최씨는 “옛날에는 추석 때가 되면 갖은 음식을 장만했는데, 지금은 농촌 인구가 고령화돼 ‘영감 할마이’밖에 없다”고 말했다. 최씨는 “이젠 핵가족이 돼서 추석에 다들 어디 여행을 가는 듯하다”고도 말했다. 간혹 하회마을 관광을 온 서울 사람들이 고풍스러운 외관을 보고 정미소에 들어오는데, 왕겨와 미강은 물론 벼의 모습도 알아보지 못한다. 찾아온 이들이 “이게 뭐냐”고 물으면 최씨는 “매일 잡수시는 쌀이다”고 웃으며 답해준다.
최씨의 둘째조카 병형(65)씨가 한 농가가 맡긴 800㎏ ‘통백’을 기중기에 걸었다. 병형씨는 하늘에 매달린 나락 통백 밑단을 터 투입구에 흘려보냈다. 최씨가 “이제 찧기 시작한다”며 현미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전기 모터를 돌리자 나락이 기둥 형태의 승강기를 타고 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1차 석발기에서 돌, 흙, 먼지를 걸러낸 나락은 현미기에 들어가 겉껍질(왕겨)이 벗겨졌다. 갈색 현미가 된 나락은 흙과 먼지를 진동으로 재차 거르는 2차 석발기로 요란하게 이동했다. 최씨가 발판을 딛고 올라가 2차 석발기에 모이는 나락의 색깔을 확인했다.
2차 석발기를 빠져나온 나락은 다시 승강기를 타고 이동, 현미기 옆의 백미기 쪽으로 이동했다. 나락은 백미기에서 저희들끼리 부딪히며 누런 속껍질(미강)을 벗었다. 최씨는 “압력을 너무 높이면 떡이 돼 버린다”며 백미기 출구를 누르는 추의 무게를 세심하게 조절했다. 최씨는 제강기를 거쳐 나오는 싸래기를 쥐어 보며 나락의 상태를 확인했다.
백미기에서 속껍질까지 벗은 나락은 마지막으로 색채 분리기 쪽으로 옮겨졌다. 누런 빛깔의 쌀을 골라내 없애는 기계인데, 이 정미소에서 가장 신식인 기계다. 색채 분리기 공정까지 마친 쌀은 눈부시게 하얀 색이었다. 최씨와 조카는 ‘시장정미소’ 이름이 새겨진 자루에 20㎏씩 ‘10분도’ 백미를 담았다. 윤기 흐르는 쌀을 한줌 쥔 최씨는 “쌀이 참 좋네”라고 혼잣말을 했다.
백미를 쥐는 그의 오른손은 넷째 손가락이 짧았다. 셋째 손가락도 심하게 뒤틀린 모습이었다. 잘린 넷째 손가락을 가리키자 최씨는 “백미기를 만지다 피댓줄(가죽 벨트)에 감겨서…”라고 말했다. 그는 1년여 전 기중기에 매단 밧줄이 끊어지며 무거운 통백이 자신을 덮쳐 허리를 크게 다친 적도 있다. 최씨는 “촌에 기계 만지다 다친 사람이 나 뿐이겠느냐”고 반문했다. 크게 다치고도 정미소 일을 계속해온 심정을 묻자 그는 “직업인데, 할 것은 해야 한다”고 말했다.
시장정미소는 쌀 찧어준 값을 쌀로 받는다. 도정한 뒤 백미 열 한 포대가 나오면 그 중 한 포대를 정미소가 갖는 식이다. 적게 생각되지 않느냐고 묻자, 최씨는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며 “성의껏 양심껏 일하면 다 다시 오게 돼 있다. 그래야 나도 계속 일한다”고 말했다. 옛 모습을 간직한 정미소가 전국에 몇 있다지만 대개 전시장이나 커피숍처럼 변했다. 시장정미소처럼 매일 기계를 돌리는 곳은 없다시피하다. 최씨는 “지금까지 돌리는 것은 우리뿐”이라고 자랑스러워했다. 퇴직 후 정미소 일을 배워 지금은 일을 전담하듯 하는 병형씨도 “힘 닿는 대로 열심히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이 크게 줄었다고 했다. 무슨 영향이 가장 큰가.
“농촌에 빈집만 있지 사람이 없다. 젊은 사람도 없고, 애 우는 소리가 안 나니 참 문제다.”
-어떤 마음으로 이토록 오랜 시간을 일했나.
“얼마 안 남은 사람들이 농사지어 방아 찧으러 오는 것이다. 찾아오는 이들을 우리 집안 어른들같이 모셔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일을 해볼 생각은 없었나.
“직업이라는 건 그렇게 쉽게 바꾸거나, 바꿔지는 게 아니다.”
-쌀이 흔해졌고, 그나마 사람들은 점점 먹지 않는다. 어떤 마음이 드는가.
“뭘 어떡하겠는가. 잘 살게 되면서 그렇게 된 것이지. 세월 따라 잘 살면 되지.”
최씨는 “육안으로 보면 밥맛을 다 안다”고 말했다. 대기 온도가 맞고, 물이 제대로 대지고, 땅도 기름진 ‘삼합’이 이뤄져야 쌀에 광택이 난다는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서서히 잘 말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을 자주 했다. 대규모로 도정하는 곳들은 건조기를 이용해 금방 말려 버리는데, 그러면 밥맛이 덜해진다는 것이다. 최씨는 과거 조상들이 벼를 벤 뒤 들판에 일정 기간 세워 말리며 낱알을 통통하게 만드는 ‘발걸이’ 풍습도 있었다고 말했다. 일본 농민은 낱알이 아래쪽으로 향하도록 세워 말렸는데, 경북 농민은 벼가 자란 모습대로 낱알을 위로 해 세웠다고 한다.
그는 정미소 일을 하면서 논농사도 직접 오십 마지기(약 1만평) 규모로 짓고 있다. 농민 마음을 본인이 더 잘 안다. 최씨는 “경북 쌀은 알아주는 상품이었는데, 기후변화로 재작년부터 나락에 윤기가 덜해졌다”며 걱정했다. 여름에 폭염이 심해져 쌀의 광택이 예년만 못해지고, 유명한 경북 사과도 농사가 잘 안 된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품종 개발에 힘쓰고, 농민 지원책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염소를 키운다는 한 농민이 찾아와 “사료로 쓰겠다”며 미강 자루 여러 개를 사서 트럭에 싣고 갔다. 최씨가 떠나는 트럭을 배웅했다. 최씨는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성의로 곡식을 도정했고, 이웃이 나락을 보관하도록 무료로 창고를 열어줬다. 최씨가 문득 “나는 세상에 뒤처져서, 세상이 6학년이라면 나는 유치원이다”고 말했다. 그에게 “언제까지 정미소에서 일하겠느냐”고 물었다. 최씨는 “밥 먹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느냐”며 “건강이 허락하는 한 죽을 때까지 할 것”이라고 답했다.
안동=이경원 이슈&인터뷰팀장 neosarim@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