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하던 개개비 떠나고 알짜 탄소저장고 황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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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1936년 고복수가 발표한 노래 '짝사랑'의 첫 구절이다. 노래를 잘 모르는 사람도 이 대목은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노래가 떠올리는 풍경이다.
가을 산을 은빛으로 뒤덮는다면 대개 억새이고, 강변에서 사람 키보다 높게 빽빽한 숲을 이룬다면 갈대일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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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1936년 고복수가 발표한 노래 ‘짝사랑’의 첫 구절이다. 노래를 잘 모르는 사람도 이 대목은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목을 길게 빼고 “으아악” 하고 우는 새가 정말 있나 싶다. 으악새의 정체를 두고는 오래전부터 말이 많았다. 왜가리 같은 새를 가리킨다는 설명도 있고 억새를 뜻하는 말이라는 주장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노래가 떠올리는 풍경이다. 찬바람 부는 가을 물가, 달빛 아래서 서걱거리는 키 큰 풀. 억새일 수도 있고 갈대일 수도 있다. 우리에게 가을의 쓸쓸함은 오래전부터 이런 풀밭의 풍경과 함께 묻어난다.
물이 흐르고 흙이 쌓이고 스스로 정화
억새와 갈대는 생김새가 비슷해 자주 헷갈린다. 둘 다 벼과 식물이고 가을이면 키 큰 줄기 끝에 꽃차례가 달린다. 억새는 산과 들처럼 비교적 마른 곳에서 잘 자라지만 갈대는 강가와 호숫가, 하구와 습지처럼 물을 좋아한다. 가을 산을 은빛으로 뒤덮는다면 대개 억새이고, 강변에서 사람 키보다 높게 빽빽한 숲을 이룬다면 갈대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으악새’가 억새를 뜻한다고 해도 그 노래가 불러오는 가을 물가의 풍경에는 갈대도 아주 잘 어울린다.
갈대는 대단해 보이는 식물이 아니다. 화려한 꽃도 없고 먹을 만한 열매도 없다. 겨울이면 마른 줄기가 쓰러지고 거기에 비닐봉지와 쓰레기까지 걸린다. 하천을 정비하면서 갈대를 싹 베어내면 물가가 갑자기 훤해진다. 보기에는 한결 말끔하다. 그렇다면 갈대가 몽땅 사라진다면 어떨까? 가을 풍경이 조금 허전해지는 것 말고 다른 문제가 또 있을까?
갈대를 이해하려면 땅 위보다 땅속을 봐야 한다. 땅 위에서는 줄기들이 제각각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땅 아래에서는 굵은 땅속줄기가 옆으로 길게 뻗어 있다. 거기에서 다시 뿌리가 내려 흙을 붙잡는다. 갈대밭 아래에는 촘촘한 뿌리와 땅속줄기의 망이 깔려 있다. 갈대는 씨앗만 기다리지 않는다. 땅속줄기를 계속 뻗어 옆으로 퍼지면서 어느새 넓은 군락을 만든다.

강물과 파도는 끊임없이 흙을 깎고 옮긴다. 갈대가 빽빽하게 자란 곳에서는 줄기가 물살을 방해해 흐름이 느려진다. 물속을 떠다니던 흙 알갱이도 그 사이에서 가라앉는다. 땅속의 뿌리와 줄기는 그렇게 쌓인 흙을 붙든다. 콘크리트처럼 물길을 막는 것은 아니다. 물은 드나들고 갈대는 흔들린다. 그러면서 흙이 한꺼번에 쓸려나가는 것을 늦춘다. 특히 강과 바다가 만나는 하구에서는 이런 일이 되풀이되면서 습지의 모양이 조금씩 달라진다. 바닷물이 밀려드는 하구에서는 갈대 줄기들이 작은 방파제처럼 파랑(波浪)의 힘을 나누기도 한다. 태풍이나 큰비를 막아낼 만큼 대단한 방벽은 아니지만, 이런 작은 저항이 오랜 시간 쌓이면 물가의 침식 속도와 퇴적 양상을 바꾸는 데 보탬이 된다. 이 차이는 보잘 것 없어 보여도 오래간다.
갈대가 물을 깨끗하게 한다는 말도 자주 듣는다. 그렇다고 갈대가 정수기 필터처럼 오염물질을 몽땅 빨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갈대는 자라면서 물과 흙에 있는 질소와 인 같은 영양분을 흡수하고 일부 금속은 몸에 축적한다. 땅 위의 갈대만 쳐다보면 절반밖에 보지 못한다.
갈대 줄기에 막혀 물의 속도가 느려지면 부유물이 가라앉는다. 뿌리 주변에는 수많은 미생물이 살면서 유기물을 분해하고 질소 화합물의 형태를 바꾼다. 갈대의 줄기와 뿌리 안에는 공기가 이동하는 조직이 발달해 있어 물에 잠긴 땅속까지 산소가 전달된다. 덕분에 뿌리 주변에서는 여러 미생물이 활동할 수 있다. 이런 성질 때문에 생활하수나 농업 배출수를 처리하인공습지에 갈대를 심기도 한다. 물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갈대 한 포기라기보다 갈대와 흙, 물, 미생물이 함께 있는 습지다.

갈대밭에는 세입자도 많다. 여름이면 개개비가 갈대 줄기 사이에 둥지를 짓고 새끼를 키운다. 해오라기는 몸을 숨기거나 쉬기도 한다. 물속의 줄기와 뿌리 주변에는 작은 물고기와 수서곤충이 숨어든다. 곤충은 다시 새와 물고기의 먹이가 된다. 사람 눈에는 그저 풀이 무성한 곳일 뿐이지만 그곳에서 태어나고 먹고 숨는 생물에게는 딴 세상이다. 겨울철 마른 갈대밭도 완전히 비어 있지는 않다.
갈대밭 아래에는 탄소도 쌓인다. 갈대는 봄부터 여름까지 빠르게 자라 많은 줄기와 잎, 뿌리를 만든다. 가을이 되어 줄기와 잎이 죽으면 일부는 분해되지만 뿌리와 유기물의 상당 부분은 땅속에 남는다. 특히 물에 잠긴 습지의 흙에서는 산소가 부족해 유기물이 천천히 분해된다. 식물이 공기에서 가져온 탄소가 흙 속에 오래 머물 수 있는 까닭이다. 갈대 몇 포기를 심는다고 기후위기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갈대밭을 없애면 눈에 잘 보이지 않던 탄소 저장고도 함께 건드리게 된다.
물론 갈대가 없어진다고 개개비가 당장 멸종하고 강둑이 무너지고 물이 썩는 것은 아니다. 부들이나 다른 습지식물이 어느 정도 그 자리를 메울 수 있다. 다만 이전과 똑같지는 않다. 갈대에 많이 의지하던 생물은 살 곳을 옮겨야 하고 물의 흐름이나 퇴적되는 흙의 양도 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갈대를 많이 심으면 될까. 그것도 간단하지 않다. 갈대는 땅속줄기로 빠르게 퍼진다. 한 번 자리를 잡으면 넓은 면적을 빽빽하게 차지해 다른 습지식물이 들어설 공간을 없앤다. 탁 트인 물가가 필요한 생물에게도 좋은 일은 아니다. 미국 체서피크만에서는 유럽에서 들어온 것으로 보이는 갈대 계통이 넓게 퍼져 토착 식물과 경쟁했고, 지금은 대표적인 침입식물 가운데 하나로 관리되고 있다. 갈대가 필요하다고 해서 갈대밭이 넓을수록 좋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어느 곳에서는 갈대를 보전하고 어느 곳에서는 베어낸다. 사람이 산책하는 하천변과 철새가 번식하는 습지를 똑같이 관리할 수는 없다. 식물 하나를 두고 좋은가 나쁜가를 먼저 묻기보다 그 식물이 어디에서 얼마나 자라고 있는지를 살피는 편이 낫다. 자연을 관리하려면 장소와 때부터 봐야 한다.

계절마다 변신하는 누런 갈숲의 향연
가을과 겨울이면 하천변의 갈대를 베어내는 모습을 흔히 본다. 산책로가 넓어지고 물도 잘 보인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이라면 필요한 작업일 때도 있다. 하지만 물가 전체가 공원처럼 보여야 할 이유는 없다. 습지는 원래 반듯하지 않다. 물이 들었다 빠지고 풀이 쓰러지며 지난해의 마른 줄기 사이로 새 줄기가 올라온다. 낙엽과 죽은 줄기도 곧바로 쓰레기가 되는 게 아니다. 곤충의 은신처가 되기도 하고 썩어서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사람 눈에는 어수선해 보여도 습지에서는 아직 쓸모가 남아 있는 것들이 많다.
가을이 오면 갈대는 초록빛을 잃는다. 잎은 누렇게 마르고 바람이 불 때마다 스산한 소리를 낸다. 겨울에는 줄기가 꺾이고 쓰러진다. 봄꽃이나 단풍처럼 화려하지도 않다. 고복수의 노래가 아니었어도 사람들은 그 풍경에서 쓸쓸함을 느꼈을지 모른다.
하지만 쓸쓸한 것은 갈대가 아니다. 갈대는 봄이면 다시 싹을 올리고 여름이면 키를 높인다. 가을이면 꽃을 피우고 겨울이면 마른다. 어느 계절은 싱그럽고 어느 계절은 을씨년스럽다고 이름 붙이는 쪽은 사람이다.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노래를 듣고 가을 물가에 나가면 갈대가 전과 조금 다르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바람에 흔들리는 누런 풀숲은 계절이 지나간 흔적만은 아니다. 그곳에서는 물이 흐르고 흙이 쌓이고 작은 생명들이 제 할 일을 한다. 갈대에게 가을은 쓸쓸한 계절이 아니라 다음 봄으로 가는 길목이다.

전 국립과천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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