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원이 풀어놓은 들국화 1집의 비밀... 그리고 선배 조원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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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중음악사에서 가장 위대한 앨범을 꼽을 때 단연 첫손에 오르는 명반, 바로 들국화 1집(1985)이다. 1998년 대중음악 평론가들이 모여 선정한 최초의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리스트에서 1위를 차지했던 이 앨범은, 9년이 흐른 2007년 전문가 52명이 참여한 100대 명반에서도 변함없이 1위 자리를 지켰다.
최성원 자신의 SNS 회고에 따르면, 들국화 1집 녹음을 앞두고 자신의 새 악기로는 원하는 소리를 낼 수 없음을 직감한 그는 동료이자 베이시스트 선배인 조원익(훗날 하나음악 대표)을 찾아갔다.
이들의 명반 탄생 이면에 자리한 조원익과 최세영 같은 선배 조력자들의 따뜻한 배려가 있었기에 이 거대한 음악 이야기는 앞으로도 한국 대중음악의 가장 빛나는 전설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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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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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5년 발매되어 한국 대중음악사의 지형도를 바꾼 들국화 1집 |
| ⓒ 멜론 |
시대가 바뀌고 새로운 세대의 평론가들이 등장해 평가 기준이 깐깐해졌음에도 그 역사적 가치를 완벽하게 인정받은 것이다. 당시 들국화 1집이 한국 음악계에 던진 충격은 엄청났다. 한정된 방송국이었지만 이 또한 마다하고 텔레비전 방송이나 미디어 홍보에 전혀 기대지 않고, 오직 앨범 자체의 음악성과 소극장 라이브 공연만을 고집하며 음악 주류 시장을 완전히 압도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당시 대중음악 인기의 척도를 판가름해 주던 'KBS 가요 톱10'에 나오는 미남미녀 가수들도 아니었다. 장발에 다듬어지지 않은 야수 같았던 머리칼에서 뿜어져 나올 것만 같았던 거칠면서도 서정적인 보컬 전인권, 그리고 세련된 멜로디를 만들어내는 베이시스트 최성원. 이 두 사람이 만나 오직 진정한 음악의 매력만으로 대중을 단숨에 사로잡은 것이다.
전인권이 무대 위에서 감성을 폭발시키는 밴드의 '기폭제'였다면, 유려한 멜로디와 치밀한 편곡으로 밴드를 폭발력 있게 승화시킨 인물이 바로 최성원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기에 한국적인 록 스피릿의 뼈대를 세운 조덕환, 클래시컬하고 프로그레시브한 건반으로 사운드의 격을 높인 허성욱까지 가세하며 네 명의 천재들은 완벽한 앙상블을 이뤄냈다. 그렇게 이 앨범은 단숨에 '한국 록은 들국화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공식을 세웠다.
"해외 록 밴드인 줄"… 전설의 사운드를 빚어낸 '빌린 베이스'
그리고 현재까지 이 명반을 들을 때마다 수많은 음악 팬과 전문가들을 사로잡은 또 하나의 미스터리가 있었다. 바로 1980년대 한국 음악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베이스 사운드였다. 마치 록의 본고장인 영국 밴드들이 낸 소리처럼 시대를 훌쩍 뛰어넘은 이 베이스 톤의 비밀이 최근 베이시스트 최성원의 고백으로 40년 만에 풀렸다.
최성원 자신의 SNS 회고에 따르면, 들국화 1집 녹음을 앞두고 자신의 새 악기로는 원하는 소리를 낼 수 없음을 직감한 그는 동료이자 베이시스트 선배인 조원익(훗날 하나음악 대표)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가 소유하고 있던 1960년대 빈티지 펜더 재즈 베이스를 무작정 빌려달라고 떼를 썼다. 연주자에게 분신과도 같은 악기를 기꺼이 내어준 조원익의 후배 사랑이 없었다면 지금의 들국화 1집 베이스 사운드는 탄생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명기만 있다고 명반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최성원 특유의 베이스 핑거링이 빈티지 펜더와 만났을 때 뿜어져 나오는 출력은 엄청났다. 당시 오리엔트 사운드의 최세영 사장 겸 엔지니어는 기계의 게이지가 터질 듯이 올라가는 이 낯선 연주를 깎아내지 않았다. 오히려 "녹음 게이지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네. 녹음하기 아주 좋아!"라며 그 압도적인 사운드를 고스란히 테이프에 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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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7년 발매된 고 유재하의 유작이자 독보적인 명반 <사랑하기 때문에> |
| ⓒ 멜론 |
그런데 1위로 올라선 유재하의 첫 음반 제작에 참여하고 프로듀싱을 맡았던 인물이 다름 아닌 최성원에게 베이스를 빌려준 조원익이다. 자신이 아끼는 악기를 선뜻 빌려주어 오랜 기간 '부동의 1위'를 지킨 명반의 탄생을 도운 그가, 훗날 그 1위 자리를 넘겨받은 또 다른 명반을 직접 제작했다는 사실은 마치 반전을 거듭하는 영화 속 한 장면처럼 흥미롭다.
유재하의 찬란한 음악 여정은 단 한 장의 앨범으로 안타깝게 끝이 났지만, 그 시작과 끝에는 선배 조원익이 있었다. 1986년 겨울, 유재하는 선배 조원익을 찾아가 자신의 계획에 대해 얘기했고, 이듬해인 1987년 8월 데뷔 앨범이자 유작이 된 <사랑하기 때문에>를 발표하게 된다.
음반이 나온 후 유재하의 부탁에, 선배 조원익은 매니저 역할을 해주기도 한다. 짧았던 매니저 역할은 결국, 너무도 일찍 세상을 떠난 천재 뮤지션의 마지막까지 도맡는 가슴 아픈 인연으로 이어졌다.
자신의 귀한 악기를 조건 없이 내어주고, 후배의 청사진을 기꺼이 품어주며 현실로 만들었던 선배, 그리고 후배의 마지막 가는 길까지 따뜻하게 지켜준 그런 선배들이 있었기에. 척박했던 1980년대 한국 대중음악계는 검열 또 검열, 금지곡이 난무하던 군부 독재의 어두운 황무지 속에서도 이토록 위대한 명반이라는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었다.
아마도 최성원 역시 막연히 들국화의 화려한 음악적 테크닉을 자랑하고 추억하기보다, 묵묵히 후배들의 뒷배가 되어주고 밑거름이 되어준 음악 선배들을 더욱 자랑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오로지 음악으로 승부하며 대중과 직접 호흡한 밴드 들국화, 그리고 천재 뮤지션 유재하. 이들의 명반 탄생 이면에 자리한 조원익과 최세영 같은 선배 조력자들의 따뜻한 배려가 있었기에 이 거대한 음악 이야기는 앞으로도 한국 대중음악의 가장 빛나는 전설로 남을 것이다.
부디 바라건대, 이들의 찬란했던 음악 여정이 한 편의 훌륭한 음악 영화로도 제작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엘비스>,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 엘튼 존의 <로켓맨>에 결코 뒤지지 않을, 한국 록 역사의 산증인인 이들이 스크린 위에서 다시 한번 살아 숨 쉴 그날을 사뭇 기대해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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