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로 1분이면 작품 뚝딱…“창작 고통 뺏겼다” 길 잃은 예술계 [AI발 인류지능 퇴보]

최혜리 2026. 9. 22.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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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신진서 9단(오른쪽)은 현존하는 바둑 AI 중 가장 활용도가 높은 카타고(KataGo)와 대국을 했다. 신진서는 이세돌 9단과 알파고 때처럼 동등한 조건으로 대국을 하겠느냐는 주최 측 제안에 "크게 의미가 없다"며 인간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조정을 권하기도 했다. 사진 한국기원


“나는 바둑계에 미래가 먼저 왔다고 생각한다.”

소설가 장강명은 지난해 발표한 르포르타주 『먼저 온 미래』에 이렇게 썼다.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국이 있던 2016년 이후, 바둑계가 쌓아온 문법은 크게 흔들렸다. 이전까지 최상위 고수들의 한수 한수는 ‘예술적 영역’으로 평가됐지만, 이제 프로기사들은 인간이 아닌 AI의 수를 배우고 분석해 철저히 확률로 싸운다. 장강명은 “2016년부터 몇 년간 바둑계에서 벌어진 일들이 앞으로 여러 업계에서 벌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자신이 몸담은 문학계를 포함해서다.

실제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출판·만화·음악·영화 등 콘텐트 업계의 AI 도입률은 2023년 상반기 7.8%에서 2025년 4분기 32.1%로 급증했다. 보고서 발표 이래 최고 수치다. 중앙일보가 만난 창작자들 역시 “AI 활용은 필수”라면서도 “창작 능력이 퇴보하는 것 같다”고 위기감을 표했다. AI 등장 초기 바둑계의 반응과 유사하다.


“AI, 예술도 피할 순 없다”


2022년 11월 오픈AI가 거대언어모델(LLM) 기반 대화형 AI 서비스 챗GPT를 내놓자 문학계가 요동쳤다. 2024년 일본의 아쿠타가와상을 받은 소설가 구단 리에는 수상작 『도쿄도 동정탑』의 약 5%가 챗GPT가 만든 문장을 그대로 쓴 것이라고 했다. 같은 해에 일반인은 윌리엄 셰익스피어 등 유명 시인이 쓴 시와 AI가 쓴 시를 겨우 46.6%의 확률로 구분할 수 있다(미국 피츠버그대 연구팀)는 연구결과도 나왔다.
지난해 12월 장편소설 『할매』를 발표한 황석영 작가. 변선구 기자


이제까지 대부분의 한국문학 작가들은 AI 사용 경험을 드러내는 걸 꺼렸지만, 최근 분위기가 달라졌다. 원로 소설가 황석영은 지난 1월 “신작 장편소설을 집필하며 챗GPT를 자료 조사 및 구성 조수로 활용했다”고 밝혔다. 소설가 김애란 역시 지난 4월 “자료조사나 검색도구로 AI를 유용하게 쓴다”고 말했다. 지난 6월 열린 서울국제도서전 주제문 저자로 AI와 자신의 이름을 함께 올린 소설가 김연수는 “2024년부터 챗GPT 유료 버전을 활용해 다각도의 글쓰기 실험을 이어왔다”고 고백했다.

디자인·영상 분야는 ‘AI 격변’에 대한 체감도가 더 높다. 8년차 시각디자이너 황모씨는 “디자인 프로그램 전반에 AI 기술이 탑재돼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클릭 한 번으로도 쓸만한 결과물이 나온다”고 말했다. 10년 차 촬영감독 김모씨는 “제작비 절감 등을 위해 AI를 적극 활용하는 연출감독이 많아졌다. ‘후반작업에 AI를 쓸테니 공들이지 말고, AI 먹이기 좋게 촬영해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한다”고 전했다.

음악계에선 AI 창작곡이 음반차트 순위권에 오르는 사례도 생겼다. 지난 7일 국내 음원 차트인 멜론 톱 100과 일간 차트에 진입한 곡 ‘마음의 숲’이 대표적이다. ‘조선힙합’이란 닉네임의 일반인이 가사를 쓴 뒤 AI 기술을 적극 활용해 제작한 곡으로, 공감가는 가사와 편안한 멜로디로 발표 후 대중들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AI를 활용해 탄생한 곡이 음원 차트에 이름을 올린 것 자체로도 의미가 크다는 게 업계 평가다.

7년 차 작곡가 B씨도 올해부터 작곡 AI 수노를 활용해 작곡한다. 그는 “과거엔 분야별 전문가와 협업하며 돈이 많이 들었지만 이제 월 4만원 정도의 AI 구독료만 내면 혼자서도 곡을 제작할 수 있어 비용이 획기적으로 줄었다”고 했다.

닉네임 '조선힙합'을 쓰는 일반인이 만든 곡 '마음의 숲' 앨범 커버. 사진 조선힙합


게임·애니메이션 등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야 하는 영역에선 AI로 이미지 제작 효율이 극대화됐다. 게임 UA(유저 유입)영상제작자 A씨는 “후가공을 거쳐야 하지만, 몇 개월 이상이 걸릴 작업물도 1분이면 만들어낼 수 있어 혁신적이다. 업무 시간의 70%는 AI를 붙잡고 있다. 가끔은 AI가 날 돕는 건지, 내가 AI를 돕는 건지 헷갈린다”고 했다.


“시행착오 할 기회 빼앗겼다”


AI는 이처럼 예술과 창작 분야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효율성을 더해줬다. 그러나 그와 비례해, 창작자의 상상하는 능력 자체는 고갈시키고 있다는 공포도 커지고 있다. 자동화된 도구에 의존하면서 ‘창의 지능’과 예술적 숙련도를 쌓는 과정 자체가 생략되기 때문이다.

지난해엔 AI를 지속해서 사용하다 멈췄을 때, 사용자의 창의적 성과가 떨어졌다는 연구결과(중국 베이징대 연구팀)도 나왔다. 연구팀은 7일간 챗GPT를 사용하며 창의적 과제를 성공적으로 해낸 집단이 AI 사용을 중단하자 창의력 면에서 성과가 크게 떨어졌고, AI를 사용하며 생긴 ‘콘텐트 동질화’가 꾸준히 관찰됐다고 밝혔다.

AI가 없을 때부터 창작 활동을 해 온 창작자일수록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4년 전부터 AI를 접한 8년차 디자이너 황모씨는 “실패와 수정을 거치며 얻는 노하우가 실력이 되는데, AI 등장 이후 시행착오가 사라졌다”고 했다. 작곡가 B씨 역시 “AI는 대개 평균적인 값을 내놓는다. AI를 쓰면 틀에 갇히는 기분이 들어 일부러 활용하지 않고 작업할 때도 많다”고 이야기했다.

남예원씨는 AI 동아리에서 AI기반 콘텐트 제작 플랫폼 '에이크론'의 지원을 받아 실습을 하고있다고 전했다. 사진은 그가 에이크론에서 AI 영상 작업을 한눈에 보는 '노드' 기술을 배우는 모습. 사진 남예원


예술 교육 현장의 고민은 더 깊다. 서울예대 방송영상과 1학년 남예원(23)씨는 업계 분위기에 따라 챗GPT·나노바나나 등 AI를 적극 배우고 있지만, “고민을 통해 아이템을 발굴하고 발전시키는 일이 줄어드니 우려된다”고 털어놨다. 유준오 성균관대 영상학과 교수는 “AI가 짜준 프롬프트를 영상생성 AI에 그대로 입력해 과제를 제출하는 학생도 봤다. 너무 이른 단계에서 사고를 멈추지 않도록, 생성된 영상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이해하는 기본기 교육이 필수적”이라고 진단했다.


“AI, 비판적으로 인식해야 창의성 지킨다”


황수현 안무가와 김재리 무용연출가가 기획하고 강호정, 김용빈, 박유라, 허성욱 안무가가 참여한 기획 'AI-IA'의 한 장면. 박유라 안무가가 사진 속 공간을 실시간으로 찍고, 미드저니와 챗GPT를 번갈아 사용하며 AI를 통한 공연음성해설을 시연하는 모습이다. 사진 국립현대무용단
AI는 예술의 영역을 대체하게 될까. 창작자들은 인간의 ‘창의 지능’을 완전히 상실하지 않으려면 결국 이 질문을 넘어서야 한다고 말한다. AI를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도구 이상의 가능성을 모색해야 창작자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시인 김언과 문학평론가 허희는 사이버텍스트 디자이너 권보연과 함께 2022년부터 AI 스터디를 진행하며 AI를 언어적 특성을 지닌 ‘문학 기계’로 규정했다. 허 평론가는 “기술이 문학의 어떤 것을 바꾸는지 알려면, 기술을 사용해보고 검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모임을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유준오 교수는 “향후 살아남는 창작자들은 자신의 생각을 검토하고 시험하는 도구로 AI를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최혜리 기자 choi.hyer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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