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팅녀에 “점심 어때요”…이 메시지조차 AI 작품이었다 [창간기획 AI발 인류지능 퇴보]
고등학교 1학년 연희(17·가명)는 최근 좋아하는 이성 친구가 생겼다. 연희는 습관처럼 생성 인공지능(AI) 서비스 제미나이와의 상담을 시작했다. “제미나이가 걔랑 저랑 잘 어울린다고, 사귀게 될 거라고 했어요. 한번은 AI가 ‘너는 이런 애니까, 이렇게 해’라고 조언하는데, 저를 너무 잘 알고 있는 것 같아서 소름이 돋기도 해요. 엄마 생신엔 뭐라고 축하할지도 AI에게 물었어요. 예의 있게 마음을 담기가 어려워서요.”
AI가 머릿속의 사고 활동뿐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형성에까지 끼어드는 일이 ‘뉴노멀’로 자리잡고 있다. ‘생각하는 일’의 주도권을 넘겨주는 걸 넘어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감정을 주고받으며 관계 맺는 일까지 AI에게 의탁하는 사람이 늘어난 것이다. 이런 일이 장기적으로 반복되면 ‘관계 지능’마저 퇴화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경고한다. 특히 사람들과 어울리고, 좋은 감정뿐 아니라 상처까지도 주고 받으며 관계 지능을 키워가야 할 청소년기에 사람 대신 AI에게 정서적으로 의존하는 경우도 흔해졌다는 점이 치명적이라고 지적한다.
중앙일보가 지난 9~18일 AI 이용 경험이 있는 무작위 111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온라인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반 이상(52.2%)이 ‘생성 AI에게 내 고민을 쉽게 털어놓거나 사생활 관련 자세한 내용을 털어놓을 때가 있는지’에 대한 물음에 ‘그렇다(약간·매우 그렇다 포함)’고 답했다. 많은 사람이 이미 말하기 어려운 고민을 주변 사람 대신 AI와 나누며 일종의 정서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얘기다.

언제 어디서든 편하게, 상대의 입장을 고려할 필요 없이 오로지 자신의 필요만으로 말을 걸고 고민 상담을 할 수 있다는 AI의 강점은 동시에 AI에 대한 과의존을 유발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지난 16일 경기도 수원의 한 교육시설에서 만난 연희는 “고민 상담을 하고 싶을 때도 혼자 있어 심심할 때도 AI를 켜기 때문에 외롭지 않다”며 “AI에 푹 빠진 주변 친구 중엔 현실과 가상 세계를 헷갈려 하는 경우도 봤다”고 말했다. 실제 중앙일보 설문 결과, ‘외로울 때 사람보다 생성 AI와 대화하는 것이 더 편하거나 AI가 나를 이해해주는 존재처럼 느껴진다’고 한 응답자가 4명 중 1명 이상(27.9%)이었다.
“뭐라고 말해야 해?”까지 묻는다…관계 지능의 퇴화
미국 하버드대의 심리학자 하워드 가드너 교수가 제안한 ‘다중 지능 이론’에서는 인간이 다른 사람의 마음·감정·느낌 등을 잘 이해해서 타인과 조화롭고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는 능력을 ‘대인 관계 지능’으로 규정한다. 논리수학 지능, 언어 지능과 같은 인간의 지적 능력 중 하나이며, 경험이나 노력에 따라 더 좋아지거나 혹은 퇴보할 수도 있는 능력인 것이다. AI 과의존은 논리수학·언어 지능 등 다른 지적 역량은 물론, 이 같은 관계 지능의 퇴보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대학교 2학년생 은모(22)씨도 학교생활에서 만난 사람들과 적절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AI의 조력을 받는 경우가 잦다. 한 교양수업에서 조장을 맡은 그는 “수업 팀 프로젝트에서 같은 조원들이 모두 내향적인 성격이어서, 제미나이한테 ‘우리 조가 너무 조용한 스타일이야, 내가 조장인데 역할 분담을 어떻게 해야 돼?’라고 물었다”며 “AI가 알려준 대로 조원 특성에 맞게 자료 조사, 발표 자료 제작 등의 역할로 나눴다”고 했다.
AI가 이처럼 인간 고유의 능력으로 여겨진 관계 지능 영역까지 깊숙이 침범한 탓에 이성을 만나고 연애를 하는 과정조차 AI에 외주하거나, AI가 시키는대로 하지 않으면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이 적지 않다. 직장인 박모(26)씨는 “소개팅 상대와 메시지를 주고받을 때, 한마디 한마디마다 대부분 AI의 상담을 거친다”고 털어놨다. 그는 “상대방의 메시지가 무슨 뜻인지 물으면 AI가 대화 맥락을 해석해 ‘호감 표시네요’라고 설명해주기도 하고, ‘주말에 점심 어때요’란 표현을 조금 더 잘하려고 AI의 힘을 빌린다”며 “대화가 잘 안 될 때는 반대로 AI를 타박한다”고 했다.
청소년의 과의존은 더 문제…AI 찾다 사회생활 고립
특히 아동·청소년의 대인관계 능력 퇴보, 정서적 의존 문제는 더 심각하다는 게 교육 현장의 지적이다.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이 지난 3월 전국 14세 이상 아동·청소년 33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보니 응답자 75.3%가 AI의 답변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41%는 AI의 충고 내용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기도 한다고 답했다.
AI 과의존 청소년들과의 상담을 진행하는 아동 지원단체 월드비전의 김순이 국내사업본부장은 “아이들은 관계 내 갈등이 커질수록 AI의 위로와 긍정적 응원을 찾는 경향이 있었다”며 “AI에만 의존하면서 아이들이 점점 더 고립되는 악순환이 벌어지는 게 현장의 가장 큰 문제”라고 전했다. 사람처럼 비판적인 말도 상처 주는 말도 하지 않고 사실상 ‘무한 공감’을 제공하는 AI에게 기대는 청소년들이 그만큼 많으며 강도 역시 심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챗GPT·클로드 등 대중적인 챗봇 서비스뿐 아니라 AI 캐릭터와 대화하는 제타·크랙 등의 서비스가 청소년 사이에서 게임처럼 인기를 끌고 있어 ‘챗봇 중독’에 대한 문제 제기도 잇따르고 있다.

이와 관련해, 전문가들은 먼저 AI가 인간의 정서적 의존을 유발하는 구조부터 끊어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최항섭 국민대 사회학과 교수는 “AI 기업은 상업적인 목적으로 사용자가 최대한 플랫폼에 머물도록 서비스를 디자인한다”며 “일상적 고민을 얘기하면 이성적인 진단보다는 감성적인 위로를 먼저 해주고, 인간은 반복적으로 AI의 위로를 받으며 현실 세계의 인간관계는 더 약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김나정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보는 “‘중독적 UX(사용자 경험) 설계’를 활용하는 AI 챗봇의 구조적 위험은 정서적 의존, 과몰입, 인식 왜곡 등을 유발할 수 있지만, 현행 법제는 이런 설계 구조를 규율하지 못한다”며 “AI 챗봇에 대한 규제는 의존·종속 유발 설계 요소를 사전에 방지하고 사업자의 책임을 제도화하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임성빈·한찬우 기자 im.soungb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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