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미국의 투자 압박, 국제법 기반한 통상 정책으로 풀어야

2026. 9. 22.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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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150주년에 되돌아본 한반도 통상의 역사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1876년 조선 정부는 개항을 결정했다.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은 것이다. 이후 한국은 150년 동안 통상을 통해 세계 10대 통상 국가의 하나로 성장했다. 한국과 같이 인구수가 작고 내수 규모가 크지 않은 국가에서 통상은 유일한 성장 방안이었다. 1960년대 이후 통상을 가장 중요한 국가적 전략으로 삼은 이후 한국은 본격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 1882년 청과 맺은 통상협정, 조선이 속국이라는 굴욕적 내용 포함
해방 후 통상권 되찾았으나 미국의 원화 가치 절하 등 요구로 갈등
1980년대 미국의 9번째 교역국 됐지만 무소불위 수퍼 301조 대상국
1876년 강화도 조약 후 150년 위기를 기회로…미국의 투자 요구받아

1981년 걸프 오일에 대한 한국 정부의 과세 문제와 관련하여 전 미국 부통령 월터 먼데일(왼쪽)이 한국에 방문해 노신영 외무장관의 영접을 받고 있다. [중앙포토]

1882년 청과 맺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통상을 통한 한국의 성장 과정은 항상 순탄하지 않았다. 그 첫 번째 길목은 1882년 청나라와 맺은 통상협정이었다. 조선은 중국과 조공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다. 조공은 강대국 옆에 위치한 작은 국가가 생존하기 위한 중요한 전략 중 하나였다. 조공외교에는 따로 조약이 필요하지 않았다. 유교의 화이관과 관례에 따라 작동했다.

1882년 관행을 깨고 청은 조선에 통상조약을 요구했다. 조선은 임오군란 진압 과정에 개입했던 청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청과 조선 사이의 통상조약은 불평등 조약이라는 점도 문제였지만, 조약 내에 조선이 청의 속국이라는 내용과 조선의 왕을 청의 북양대신과 동급으로 규정했다는 점에서 굴욕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후 중국의 하급 장교에 불과했던 위안스카이가 조선에 배치되어 국내 정책에 개입하면서 청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막을 내렸을 때 이를 축하하기 위해 독립문이 건설되었다. 이는 일본을 응원했기보다는 위안 스카이에 의해 조성된 불편한 조청 관계의 마침표를 의미했다. 게다가 청은 유학의 정통성을 잇는 왕조가 아니었다.

환율과 원조구매지 갈등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잃어버렸던 한국의 자주적 통상권은 1945년 해방으로 되찾을 수 있지만, 미군정 3년을 거친 후인 1948년이 되어서야 한국 정부는 통상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분단과 전쟁으로 망가진 한국은 미국의 원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한미 간에 환율문제가 발생했다. 미국은 한국에 대한 무상원조를 줄이기 위해 한국의 통화가치를 절하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더 많은 원조를 받기 위해 일본과 동일하게 고정환율을 요구했다. 전쟁 기간 유엔군에 대여한 돈(유엔군 대여금·Advances to UN Forces)을 회수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달러를 받기 위한 정책이기도 했다. 환율 조정을 위해 1953년 설날 통화개혁을 실행했다.

미국은 1953년 한미합의의사록을 통해 한국 정부의 요구를 부분적으로 수용했다. 양국 정부는 일시적으로 환율을 고정하되 일정 수준 이상의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경우 환율을 올리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1950년대 중반 환율은 1달러당 180환에서 500환으로 인상되었다. 그런데도 시장에서 거래되던 1200환이 넘는 실질 환율에는 절반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또 다른 갈등은 원조구매지 문제였다. 미국은 가격이 싸고 운임을 줄일 수 있는 일본산 물품을 원조에 이용하고자 했지만, 이승만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미국 기업의 활동이 제한되었고, 1955년 임명된 신임 주한미국대사는 건강상의 이유로 5개월 만에 이임하였다. 미국은 오히려 외국기업의 투자 촉진법 마련을 한국 정부에 요구했다.

미국은 1959년 12월 환율 현실화를 위해 미국이 신임대사를 임명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신임대사가 임명된 지 5개월 후 4·19 혁명이 발발했고, 미국이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주한미국대사를 통해 경무대에 전달했다는 풍문도 있었다.

코리아게이트 파문
1960년대 한국 정부는 수출이 유일한 급속 발전의 길이라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어떤 나라도 수출주도산업화 전략을 적용하지 않을 때였다. 미국 정부는 한국의 기술 수준과 자본 규모를 고려해서 노동집약적 경공업 제품의 양산을 권고했다. 한국 정부가 바라는 중공업 중심의 산업전략은 거부되었다. 가발·이쑤시개·메리야스 등이 한국의 주요 수출품이었다.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면서 메리야스 수출이 급증했다.

베트남 전쟁에서 돈을 너무 많이 지출한 미국은 1970년대 초 면직물 수입을 제한했다. 한국을 비롯해 저임금 국가로부터 수입되는 값싼 면직물이 미국 기업의 사정을 어렵게 했다는 판단이었다. 관세가 올랐고, 경공업 기업의 수출 길이 막혔으며, 그 대안으로 중화학 공업화가 시작되었다.

1970년대 중반에는 미국에서 한국에 쌀을 수출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커미션 문제로 인해 코리아게이트가 발생했다. 이 사건은 한국 정부의 미 의원들에 대한 로비 사건과 함께 국제적인 파문을 일으켰다. 코리아게이트를 주도했던 프레이저 하원의원이 연임에 실패하면서, 1970년대 말 일단락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1980년대 초 한국의 유례없는 흉년으로 인해 미국의 쌀 수출이 급증할 때 또 한 번 쟁점이 되었다. 당시 주한 미지상군 철수 문제가 가장 큰 관심사였지만, 한미 간에 핵심 문제는 한국의 값싼 전자제품 수출, 금융과 서비스 분야에서 한국의 시장 개방, 미국 군사제품의 구매 이슈 등이었다. 1981년 미국의 전 부통령 먼데일은 걸프 오일에 대한 한국 정부의 과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301조와 말보로 담배
1980년대 이후 통상은 한미 간에 더 중요한 현안이 되었다. 미국 정부는 한국 정부가 합법적으로 집권하지 않았다는 정치적 약점을 이용해 과감한 시장 개방을 요구했고, 한국 정부는 이러한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미국은 경제 안정화 정책 실행뿐만 아니라 1970년대 중화학공업에 대한 중복 과잉투자를 해결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미국은 1980년대 중반 통상법 301조를 들고 나왔다. 레이건 행정부의 정책은 현 미국 통상정책의 전사라고 할 만큼 강력했다. 시장 개방과 함께 지적 재산권 문제를 제기했다. 당시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처음으로 미국과 지적 재산권 문제를 합의한 국가가 되었다. 비대칭적 한미관계는 미국의 통상압력이 작동하는 배경이 되었다. 처음으로 외국계 은행과 보험사가 문을 열었고, 말보로 담배는 수입개방의 상징이었다.

두 차례의 오일쇼크와 1979년 이란·니카라과 등 동맹국에서의 반미봉기로 미국의 경제가 좋지 않았다. 1985년 미국의 무역적자는 1970년의 3배가 넘는 1500억 달러에 달했다. 반면 1980년 마이너스 성장의 위기를 넘긴 한국은 1986년 대미수출 160억 달러에 흑자 70억 달러를 기록했다. 1982년 한국은 미국의 9번째 교역 대상국이었고, 6번째 수출시장이자 4번째 농산물 시장이었다.

우루과이 라운드와 FTA
1990년대에 이르러 관세무역일반협정(GATT)은 지역 및 양자 간의 협상으로 전환되었다. 통상법 301조는 미국 무역과 투자에 악영향을 미치는 외국의 불공정 무역 행위를 시정하는 데 필요한 조처를 할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했다. 미국의 통상규칙에는 행정부뿐만 아니라 의회가 깊숙이 관여했고 미국의 무역대표부(USTR)가 전체적인 통상협상을 관할하기 시작했다.

통상법 301조에 이어 1980년대 후반 승인된 수퍼 301조는 대통령에게 전권을 부여하였다. 특히 수퍼 301조는 미국이 지정한 국가에서 생산·제조한 물품을 수입 금지하는 무제한, 수단 불문의 무역 보복 조치를 가능하도록 했다. 미국 무역대표부가 결정하면 대상국을 조사했고, 1988년 이후 한국과 일본이 수퍼 301조의 대상 국가가 되기도 했다.

1990년대 북한 핵 문제가 제기되면서 통상 문제는 부차적 문제가 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 시기 농산물 시장 개방 문제, 2006년 이후 한미 FTA는 지속해서 통상 마찰의 원인이 되었다. 2008년 미국산 소고기 개방은 사회적으로 큰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리고 요즘 다시 한미 간의 통상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성격이 바뀐 현재의 위기
현재 진행되고 있는 쿠팡 논란은 한국 입장에서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한국 정부가 외국 기업에 배타적인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한국의 민주화 이후에도 미국 대사관은 한국 사회의 뇌물과 촌지 관행을 주시해 왔다. 한국 사회 내부에 외국기업에는 불리한 불공정한 관행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150년 전 강화도조약 이후 한국은 통상을 통해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섰다. 세 차례에 걸친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잘 극복해 왔다. 지금의 4차 산업혁명은 한국에 기회가 될 수도 있고, 거대한 위기를 의미할 수도 있다. 이제 시장개방을 넘어 강대국에 대한 투자를 요구받고 있다. 150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통상의 역사는 각국이 자국 산업보호와 국익을 내세워 세수를 최대화하는 과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끊임없이 문제가 불거졌다. 지난 150년간 한국은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 그리고 3차 산업혁명과 코로나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높은 수준의 과학기술과 국제법에 기반한 통상정책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점을 체득했다. 미국과의 통상 현안 해결에 있어서 정부와 기업의 현명한 대응을 기대해 본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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