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망진 중년] "발 씻겨준 은혜 잊지 않겠다"는 시아버지에게

이인자 2026. 9. 21.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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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신혼 초, 시댁에 들어와 살겠다고 결심한 건, 순전히 아버님의 그 선하고 따사로운 눈빛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 어찌나 간사한지 무사히 고통의 시간을 통과하고 나면, 마치 혼자의 힘으로 이겨낸 거 같아서 아버님이 갚겠다던 은혜를 끝도 없이 소환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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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 전상서] 올해 차례상은 최소한으로, 가족들과는 삽겹살을 굽겠습니다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인자 기자]

아버님, 잘 지내시고 계시지요?

백로(白鷺)가 지나더니 밤공기가 제법 차가워졌습니다. 백로가 되면 제비는 남쪽으로 날아가고 북녘의 기러기가 찾아온다지요. 영혼들이 머무는 세상에도 계절이 바뀌면 옷의 두께가 달라지고, 쓸쓸하고도 그리운 감정이 스며드는지 궁금해집니다.

지난 8월 29일에는 벌초를 했습니다. 혹시 제가 말아 올린 김밥은 드셨을까요?
남편에게 풀을 다 깎고 나면 한 접시 예쁘게 썰어 봉분 앞 상돌에 올리라고 당부했는데, 잊지 않고 전해드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스물다섯 줄이나 말아 쌓아놓고 보니, 단단하고 둥근 그 모양이 꼭 아버님 봉분을 닮은 것 같아 그리움에 울컥했습니다.

그동안 저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누군가의 아내, 엄마가 된 후로 잠시 접어두었던 꿈을 다시 펼치겠다고 글을 쓰고, 책도 냈습니다. 오늘은 이런 저의 글 재주로 아버님 마음을 울리기도 하고, 겁 없이 웃겨드리기도 해 보겠습니다.

서울 전셋집을 마다한 며느리

신혼 초, 시댁에 들어와 살겠다고 결심한 건, 순전히 아버님의 그 선하고 따사로운 눈빛 때문이었습니다. 막내 외아들을 일찍 장가보내시겠다고, 쥐고 계시던 현금을 탈탈 털어 서울에 전셋집이라도 마련해주려 하셨지요.

그런데, 그 돈을 다 내어주시면 시골 살림은 뭘로 견디시나, 집을 보러 다니는 내내 제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들어와 함께 살겠노라 말씀드렸는데, 세상을 다 얻으신 듯 활짝 웃으시던 아버님의 얼굴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철없는 젊은 며느리가 거실 소파에 널브러져 자고 있으면 소리 없이 이불을 가져다 덮어주시고, 먼 길 서울로 출퇴근 하는 게 안쓰럽다며 집안 청소도 다 해놓으시던 참 따뜻한 분이셨어요.

배울 게 많은 분이셨어요. 추수 때면 벼알 하나라도 더 거두려 눈을 크게 뜨시던 눈빛에서 밥 한 톨의 귀함을 배웠고, 참깨를 털어내던 모습에서 깨 한 알이 결코 그저 얻어지는 게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세상의 아침이 새벽 5시부터 시작되는 부지런한 이들이 있다는 것도 아버님을 통해 배웠습니다.

그래서 제가 저의 월급을 아버님께 맡길 생각을 했나 봐요. 제 월급을 받아 들고, 농협에 적금을 부으러 가시던 아버님 모습이 저는 하나도 불안하지 않았습니다. 왠지 복리로 저에게로 돌아올 것만 같았거든요. 어쨌든 아버님은 제게 그런 어른이셨습니다. 그러니 아버님이 돌아가신 이후, 16년 동안 제사상과 차례상 앞에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었지요.

그런데, 아버님 올해는 제가 좀 이상합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드는 것이지요. 이 마음이 갱년기 호르몬의 변덕 때문인지, 이제는 착한 며느리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 때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지금 제 마음은 황금연휴와 같은 쉼의 시간을 온통 저를 위해서만 쓰고 싶습니다.

명절 차례상과 17명의 손님상을 차리는 게 당연하고, 하물며 즐거웠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평소에 하지 못한 자식의 도리, 또 아내의 도리를 몰아서 한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그 도리를 다하고 나면 몸이 기진맥진해져서 며칠 동안 아무것도 할 수가 없더라고요. 이제 인정해야겠습니다. 왕복 4시간을 출퇴근 시간에 쓰고도 명랑 쾌활하던 저는, 며느리는, 아내는, 엄마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요.

그래서 아버님, 올해는 '자본의 힘'을 많이 빌려볼까 합니다. 그냥 최소한으로만 사서 상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남편도 요즘 제 몸과 마음을 살피더니 그렇게 하자고 하네요. 실은 형식적인 차례도 건너뛰고 싶지만 곱게 한복을 차려입으시고 차례를 지내러 오시는 작은 시아버님께 오시지 말라고 할 용기는 아직 없습니다.
▲ 추석 삼겹살 손님들과 삼겹살 파티
ⓒ 이인자
가족들이 먹을 음식은 삼겹살로 대신할까 합니다. 남자들이 좀 번거롭긴 하겠으나 오래간만에 마당에서 숯도 피우고, 숯불향이 가득한 삼겹살 파티를 즐기겠습니다. 대신 삼겹살은 기왕이면 오도독뼈도 자잘하게 보이고, 뽀얀 지방층이 붉은 살코기와 고르게 섞인 것으로, 넉넉하게 준비하겠습니다.

기왕 말씀드린 김에 한 가지 더 부탁드려 볼까 합니다. 올해 아버님 제삿날을 달력에서 따져보니 하필 12월 31일입니다. 정말 어쩌지 싶었습니다. 올해 마지막 날에는 해가 지는 서쪽으로 가서 석양을 감상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이번 아버님 제사는 가벼운 성묘로 대신할까 합니다.

아버님, 그 약속을 들어주세요

제 부탁은 여기까지입니다. 아버님 혹시 기억나시나요? 아버님이 돌아가시던 그 해, 허리 숙이기가 힘드다시며 제게 발을 좀 씻겨달라고 부탁을 하셨지요. 저 그때 참 행복했었습니다. 시어머니도 계신데, 왜 제게 그런 부탁을 하셨을까. 그래 어쩌면 아버님에게 나는 정말 특별한 사람이구나 싶었거든요. 아버님 발에서 두꺼운 검은 때가 줄줄이 씻겨 나오는데, 왜 진즉 씻겨드리지 못했나 자책도 했었습니다.

"내가 죽어서도 발 씻겨준 은혜는 잊지 않으마."

그때 아버님이 이런 말을 하셨었지요. 솔직히 고백하자면 사는 게 힘들 때면 아버님의 그 약속을 떠올렸습니다. 아버님은 뭐 하시나. 꼭 갚겠다던 그 은혜를 지금 좀 갚아주시지 하고요. 어쩌면 그때마다 아버님은 은혜를 갚아주신 건지도 모르겠어요. 대체로 고통은 구름처럼 흘러갔으니까요.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 어찌나 간사한지 무사히 고통의 시간을 통과하고 나면, 마치 혼자의 힘으로 이겨낸 거 같아서 아버님이 갚겠다던 은혜를 끝도 없이 소환시켰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님 그 약속 여전히 유효한 거지요? 그렇다면 올해 차례상이 이게 뭐냐고 혼내지 마시고, 제삿날에도 그동안 고생했으니 바람이나 쐬고 오라고 흔쾌히 허락해 주세요.

물론, 저는 알고 있습니다. 아버님의 선한 눈빛은 아마도 그래도 된다 하시겠지요. 그래도 이렇게나마 아버님께 편지를 쓰는 것은 아버님을 기억하는 제 마음을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부디, 영혼들이 사는 그곳에서는 소주 너무 많이 드시지 마시고, 드시더라도 소금 몇 알, 찌개 한 숟가락으로 안주 삼지 마시고, 꼭 제대로 챙겨드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밖에 없는 며느리, 언제나 잘해라, 지치지 마라 격려해 주십시오.

아버님이 많이 보고 싶습니다.

2026년 9월 15일 추석을 앞두고, 며느리 올림.

《 group 》 요망진 중년 : https://omn.kr/group/2026_midlife
<폭싹 속았수다>의 애순이처럼 요망지게(야무지게), 똘망똘망하게, 유쾌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게 살아온 중년 여성들의 이야기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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