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인 아닌데 전국에 3개나... 이 미군 동상의 정체

이희용 2026. 9. 21.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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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하철 6호선 역촌역 4번 출구로 나가면 자그마한 근린공원을 만난다.

주변에 아파트가 즐비한 이곳에 미군 동상이 왜 서 있을까.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국군과 미군은 서울 탈환을 위해 9월 22일 이곳 인근에서 북한 인민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경기도 고양군 녹번리이던 당시 지명은 서울시 은평구 녹번동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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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의 월드코리안 20] 미 해군 대위 윌리엄 해밀턴 쇼

[이희용 기자]

▲ 태극기와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 서울 은평구 녹번동 은평평화공원에 세워진 윌리엄 해밀턴 쇼(서위렴 2세) 대위 동상. 좌대 정면에는 이름과 생몰연도와 성경 구절, 오른쪽에는 약력이 새겨져 있다.
ⓒ 이희용
서울지하철 6호선 역촌역 4번 출구로 나가면 자그마한 근린공원을 만난다. 2010년 조성된 은평평화공원이다. 입구에서 40~50m 걸어 들어가면 왼쪽 가슴에 훈장 두 개를 단 군복 차림의 서양 남성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주인공은 윌리엄 해밀턴 쇼 미국 해군 대위다.

주변에 아파트가 즐비한 이곳에 미군 동상이 왜 서 있을까. 좌대 정면의 이름 아래 새겨진 생몰연도(1922.6.5~1950.9.22)를 보면 짐작이 간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국군과 미군은 서울 탈환을 위해 9월 22일 이곳 인근에서 북한 인민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경기도 고양군 녹번리이던 당시 지명은 서울시 은평구 녹번동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3년여에 걸친 6·25 전쟁의 미군 전사자는 3만 6574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계급이 그리 높지도 않고 전공(戰功)이 눈부시게 빼어난 것도 아닌 그를 특별히 동상을 세워 기리고자 한 까닭은 무엇일까.

좌대 정면 이름 아래 새겨진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란 성경 요한복음 15장 13절의 글귀가 해답의 실마리가 될 수 있고, 좌대 뒷면에 새겨진 가계도를 보면 그제야 고개가 끄덕여진다. 아버지, 어머니, 아내, 장남, 맏며느리 등 일가가 한국에서 봉사한 이력이 적혀 있다.

그의 흉상은 대전시 서구 도안동의 목원대 캠퍼스 교회 앞과 경남 창원시 진해구의 해군사관학교 학술정보원 1층 로비에도 세워져 있다. 그가 무슨 인연이 있고 어떤 활동을 펼쳤기에 목원대나 해사가 두고두고 기억하려는 걸까. 그 내력을 더듬어보자.
▲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 가계도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 동상의 좌대 뒤편에는 쇼 대위 가계도와 건립 취지문이 붙어 있다.
ⓒ 이희용
쇼 목사는 군종 제도 도입과 목원대 설립에 앞장
쇼 대위의 아버지 이름은 윌리엄 얼 쇼다. 1890년 8월 22일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태어나 감리교 창시자 이름을 딴 오하이오주의 웨슬리언대를 졸업했다. 1차대전에 의무병으로 입대했다가 군목 장교로 전역한 특이한 경력을 지녔다. 감리교 선교사로 1921년 조선에 파송돼 아내와 딸을 데리고 들어왔다. 윌리엄 제임스 홀이 평양에 설립한 광성고등보통학교(서울 광성고 전신)에서 교사로 일하며 평양보이스카우트 단장도 맡았다. 한국식 이름은 쇼 윌리엄과 비슷한 발음의 서위렴(徐煒廉)으로 지었다.
▲ 윌리엄 얼 쇼 1921년 감리교 선교사로 조선에 파송된 윌리엄 얼 쇼 목사. 1922년 평양에서 외아들 윌리엄 해밀턴 쇼를 낳았다.
ⓒ 목원대
1922년 6월 5일 평양에서 쇼 대위를 낳았다. 1926년 안식년을 얻어 미국으로 돌아가 보스턴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1년 뒤 다시 조선에 와서 평안북도 영변, 황해도 해주, 중국 만주 등지에서 사역하다가 1941년 일제에 의해 추방됐다. 웨슬리언대 신학부장을 거쳐 필리핀에서 선교하다가 1947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6·25가 터지자 주한미군에 자원입대해 군목으로 복무했다. 이승만 대통령에게 건의해 육군에 군종 제도를 도입하도록 하는가 하면 목원대 전신인 감리교 대전신학원 창립 이사로 참여하고 강단에도 섰다.

부인 아델린도 해방 전 평양의 숭덕여학교에서 교육선교사로 활동했다. 1955년에는 대전에 피란민 정착촌 성화장을 지어 전쟁 미망인들을 돌봤다. 쇼 목사 부부는 1961년 은퇴해 귀국했다가 1966년과 1971년 각각 세상을 떠나 서울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 묻혔다.

"지금 도우러 가지 않는 건 양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쇼 대위는 평양외국인학교를 다니다가 1941년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아버지 모교인 웨슬리언대를 다녔다. 2차대전이 발발하자 해군에 입대해 초계어뢰정 부장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했다가 1946년 9월 중위로 전역했다.

1947년 한국으로 돌아와 미군정청에 근무하며 해군 창설을 제안하는가 하면, 해군사관학교 전신인 조선해양경비대 사관학교가 세워지자 교관으로 부임해 항해술과 함정운용술을 가르쳤다. 평양 사투리가 섞이긴 했지만 한국어가 유창한 데다 2차대전 참전 경험도 있어 생도들에게 인기가 아주 높았다고 한다. 2018년 해사가 그의 흉상을 설치한 까닭이다.
▲ 쇼 목사와 쇼 대위 부자 1939년 평양외국인학교를 졸업한 윌리엄 해밀턴 쇼(왼쪽)가 미국 유학에 앞서 아버지 윌리엄 얼 쇼와 찍은 사진.
ⓒ 목원대
쇼 대위는 1950년 2월 미국으로 돌아가 매사추세츠주 이스트브렌트리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펼치면서 하버드대 대학원 철학박사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공부를 마치고 아버지 뒤를 이어 선교사로 한국에서 봉사할 마음을 먹은 것이다.
하버드대 대학원에 진학한 지 넉 달 만에 6·25가 터졌다는 뉴스를 라디오로 들었다. 평양에서 태어나 17살 때까지 자란 쇼 대위에게 한국은 모국이나 다름없었다. 재입대와 학업을 놓고 고민에 빠졌다. 주변에서는 모두 "2차대전에 참전해 군 복무를 마쳤으니 이제 학업에 매진하라"라고 권했다. 그러나 그는 그럴 수 없었다.
▲ 아이젠하워 장군과 쇼 소위 2차대전에 참전한 윌리엄 해밀턴 쇼 소위(맨 오른쪽)가 아이젠하워 연합군 총사령관(오른쪽에서 세 번째)과 함께 함정을 타고 가고 있다.
ⓒ 목원대
아버지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긴 편지를 띄우고 전선으로 떠났다. 아내와 두 아들을 남겨둔 채였다.
지금 한국인들은 전쟁 속에서 자유를 지키려고 피 흘리고 있는데, 제가 흔쾌히 도우러 가지 않고 다른 사람이 한국인을 위해 희생해 평화가 이뤄진 다음 선교사로 가려 한다면 제 양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쇼 목사는 쇼 대위가 외아들이니 걱정이 컸겠지만 자신도 이미 군목으로 재입대한 터라 말릴 생각도 없었다.
▲ 윌리엄 해밀턴 쇼 가족사진 윌리엄 해밀턴 쇼가 한국전 참전을 위해 재입대하기 전 미국에서 찍은 가족사진이다. 오른쪽은 장남 로빈슨이고 왼쪽의 아내 후아니타는 차남 스티븐을 안고 있다.
ⓒ 목원대
한국어와 한국 지리에 능통한 쇼 대위는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 특별보좌관 겸 정보장교를 맡아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사전 정찰에 나서는 등 중요 임무를 수행했다. 이미 큰 공을 세웠고, 정보장교로서 할 일도 많았지만 그는 "한국인 친구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후방의 안전한 막사에만 있을 수 없다"라면서 서울수복작전에도 자원했다.
미군 제1해병사단 5연대에 배속돼 녹번리 전투에 참가했다. 9월 22일 아침, 미 7해병연대의 서울 접근을 위해 적 후방 정찰에 나섰다가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인민군 매복조에 저격당했다. 구조대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2시간 동안 계속된 총격으로 만신창이가 돼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불과 28세의 나이였다.
▲ 양화진에 잠든 쇼 가족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세워진 쇼 목사 부부(뒤쪽)와 쇼 대위(앞쪽)의 묘비.
ⓒ 이희용
아버지와 함께 '한미 참전용사 10대 영웅'에 선정

전사 후 그는 중위에서 대위로 일계급 특진했다. 쇼 목사는 "한국을 사랑했던 아들의 뜻"이라며 시신을 양화진에 묻었다. 자신과 아내도 뒤따라 묻힐 자리였다. 묘비명으로 요한복음 15장 13절을 영문으로 새겼다. 한국과 미국 정부는 1956년 각각 금성을지무공훈장과 은성훈장을 추서했다.

그해 9월 22일 6주기에 맞춰 정긍모 해군 참모총장, 김석범 해병대 사령관, 백낙준 연세대 총장, 김활란 이화여대 총장 등 43명이 기금을 모아 쇼 대위가 전사한 자리에 한자로 '徐煒廉 二世 戰死 紀念碑(서위렴 이세 전사 기념비)'라고 새긴 비석을 건립했다. 도시계획에 따라 철거 위기에 놓이자 2001년 응암어린이공원을 거쳐 2010년 은평평화공원 동상 옆으로 옮겼다.
▲ 서위렴 2세 전사 기념비 윌리엄 해밀턴 쇼(서위렴 2세)를 기리기 위한 기념비. 그가 전사한 녹번동에 1956년 건립했다가 2001년 응암어린이공원을 거쳐 2010년 은평평화공원으로 옮겼다.
ⓒ 이희용
쇼 목사는 아들의 희생을 기리고자 독지가 5955명으로부터 1만 4500달러를 모금해 1957년 목원대에 해밀턴 기념교회(채플)를 세웠다. 2018년에는 흉상 제막식도 열었다. 좌대에는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준 분, 한국인보다 더 대한민국을 사랑한 분, 핏값으로 목원대학교 채플을 세운 분, 여기 그의 숭고한 희생으로 세워진 채플 언덕에 고인의 흉상을 건립하여 그의 한국 사랑, 목원 사랑을 후대에게 널리 기리고자 합니다"라고 새겼다.
우정사업본부가 2015년 6·25 전쟁 발발 65주년을 맞아 호국 영웅 10명의 우표를 발행할 때 쇼 대위는 심일 육군 소령, 김교수 육군 대위, 손원일 해군 중장, 이근석 공군 중장, 차일혁 경찰 경무관, 밴 플리트 미8군 사령관, 칸 영국군 중령, 진두태 해병대 중위, 몽클라르 프랑스군 중령과 함께 얼굴이 새겨지는 영예를 누렸다. 그해 9월에 이어 올 9월에도 연거푸 이달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됐다.
▲ 호국 영웅 10인 우표 2015년 6·25 전쟁 발발 65주년을 맞아 발행된 호국 영웅 우표 세트. 맨 오른쪽 아래가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
ⓒ 우정사업본부
▲ 한미 참전용사 10대 영웅 국가보훈처와 한미연합사령부가 2023년 4월 한미동맹 70주년 기념으로 선정해 발표한 ’한미 참전용사 10대 영웅’ 포스터. 벤 플리트 부자와 쇼 부자가 포함돼 있어 실제로는 12명이다.
ⓒ 국가보훈부
국가보훈처와 한미연합사령부도 2023년 4월 한미동맹 70주년 기념으로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 밴 플리트 미8군 사령관과 밴 플리트 주니어 공군 대위 부자, 딘 헤스 공군 대령, 랠프 퍼켓 주니어 육군 대령, 김영옥 미 육군 대령, 백선엽 육군 대장, 김두만 공군 대장, 김동석 육군 대령, 박정모 해병대 대령과 함께 쇼 목사와 쇼 대위 부자를 '한미 참전용사 10대 영웅'으로 꼽았다.
부인, 아들, 며느리, 손주 대대로 한국 사랑 실천
▲ 인공지능으로 복원한 쇼 대위 사진 인공지능 얼굴 복원 기술을 활용해 고해상도 컬러 사진으로 복원한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 2023년 7월 28일 부산 유엔평화기념관에서 열린 ‘6·25 전쟁영웅 특별사진전'에서 공개됐다.
ⓒ 국가보훈부
남편을 잃은 쇼 대위의 부인 후아니타는 하버드대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1956년 두 아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건너왔다.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하며 세브란스병원에 사회사업실을 개설해 자원봉사자로 일했다.

맏아들 로빈슨은 하버드대에서 '조선시대 법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하버드대와 존스홉킨스대 법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풀브라이트 장학재단, 하버드 법률연구센터와 함께 한국 대학생들을 위한 장학 사업과 미국 초청 연수 사업을 펼쳤고 서울대 법대 초빙교수로도 활동했다. 한국학 연구에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39살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차남 스티븐 리처드는 오하이오주 법원 판사를 지냈다.

로빈슨의 아내 캐롤도 하버드대에서 한국어와 근대 중국사를 전공한 한국학자다. 주미 한국대사관의 역사 편찬 작업에 참여해 미 연방의회 도서관 등에서 한미 외교 자료들을 발굴하는 성과를 거뒀다. 2007년 서울대에서 영문으로 출판한 저서 <외세에 의한 한국 독립의 파괴>는 한일 강제병합 과정에서 미국이 어떻게 일본을 도왔는지를 자세히 밝혀놓았다.

책 서문에 "100여 년 전 미국이 공공선이라는 미명 아래 작은 나라 조선에 대해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생각해 보라. 미국인의 한 사람으로 사죄의 뜻을 표하고 싶어 이 책을 썼다"라고 밝혔다.

로빈슨과 캐롤 부부의 딸 줄리는 1990년부터 4년간 주한미군 장교로 경기도 오산 공군기지에서 복무했다. 아들 데이비드도 연세대에서 근무했다. 쇼 목사와 쇼 대위 부자의 한국 사랑과 헌신은 4대에 걸쳐 이어졌다.
▲ 쇼 대위 맏며느리와 손자 2010년 6월 22일 은평평화공원에서 열린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 동상 제막식에서 쇼 대위 맏며느리 캐롤(오른쪽)과 손자 윌리엄이 헌화를 준비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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