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망진 중년] 아이들은 다 컸고, 우리는 춤바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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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싹 속았수다>의 애순이처럼 요망지게(야무지게), 똘망똘망하게, 유쾌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게 살아온 중년 여성들의 이야기.
우리는 아이들이 초등학생일 때 만났다.
오래 한자리에 머물러 온 우리 셋에게도 기분 좋은 바람이 불었다.
이번 가을 우리 셋에게 찾아온 바람은 춤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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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싹 속았수다>의 애순이처럼 요망지게(야무지게), 똘망똘망하게, 유쾌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게 살아온 중년 여성들의 이야기. 9월엔 '가을에 불어 온 바람'을 주제로 써 봅니다. <편집자말>
[이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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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이아몬드 스텝은 몰라도 파이팅은 제대로! 줌바 수업을 시작하기 전, 우리는 운동화를 가운데로 모아 파이팅을 외쳤다. 서툴지만 함께라서 든든한 우리 셋이다. |
| ⓒ 이수정 |
"물론이죠. 오늘 저녁!"
우리는 마치 독립투사가 결연한 맹세라도 하듯 힘주어 외치고 각자의 센터로 향했다. 그날부터 우리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우리 셋이 이런 날을 맞게 될 줄은 몰랐다.
그대 이름은 바람, 바람, 바람
우리 셋은 같은 지역에서 각자의 아동상담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셋 다 한자리에서 20년이 훨씬 넘었다. 우리는 아이들이 초등학생일 때 만났다.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 우리의 나이도 앞자리가 바뀌었다. 초등학생 아이들은 어느새 다 커서 성인이 되었다.
일명 '조찬모임'도 벌써 십수 년째 이어지고 있다. 일주일에 두 번, 이른 아침이면 만나 커피를 마시고 밥을 먹는다. 늘 같은 장소, 같은 메뉴이다.
나이 터울도 두 살씩. 나는 그중에서 막내다. 우리는 서로를 언니, 동생으로 부르지 않는다. 늘 서로의 호칭은 변함없이 '원장님'이다. 이상하게도 그게 한 번도 어색하지 않았다. 성격도 취향도 제각각이다. 그런데 희한하게 잘 맞았다.
온라인에서 예쁜 옷을 발견하면 서로 링크를 보냈고, 한 사람이 "이거 괜찮지 않아요?" 하면 잠시 후 나머지 둘도 주문했다. 그러다 어느 날에는 셋이 약속이라도 한 듯 똑같은 옷을 입고 나타나기도 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서로 마음 상하는 일도 한 번 없었다.
"요즘 손가락 마디가 아파요."
"저두요."
"살은 왜 이렇게 붙지?"
"그러니까요."
"마음은 또 괜히 출렁거린다니까요."
요즘 우리의 이야기도 예전과 달라졌다. 일과 아이들, 남편 이야기는 줄고 각자의 몸과 마음 이야기가 부쩍 많아졌다. 우리는 요즘 앞다투어 중년의 몸과 마음에 적응하느라 부대끼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우리 뭐라도 해보자고요!"
셋 다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걷기? 등산? 수영? 그러다 나온 것이 줌바였다. 줌바라니. 입으로는 "할 수 있죠" 했지만, 속으로는 셋 다 조금씩 다른 생각을 했을 것이다. '우리가 춤을?' 그래도 일단 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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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 유리벽 너머에서 우리는 잠시 모든 것을 잊고 춤을 춘다. 음악이 흘러나오고, 우리는 그 안에서 마음껏 몸을 움직인다. 아이들이 다 큰 뒤 우리에게 생긴 새로운 저녁 시간이다. |
| ⓒ 이수정 |
"일단 들어와서 해보세요."
창문에 얼굴을 대고 기웃거리는 우리를 발견하고는 강사가 손을 흔들며 웃었다. 그저 등록만 하러 왔을 뿐인데, 어느새 수업에 들어가게 되었다. 우리는 서로를 민망하게 쳐다보고는 블랙홀에 빨려들 듯 음악이 쿵쾅거리는 곳으로 들어갔다. 운동화도 준비하지 못한 채, 결국 맨발이었다.
맨 뒷줄에 엉거주춤 서 있던 우리 셋은 마음의 준비를 할 겨를도 없이 앞사람을 따라 해야 했다. 음악은 쿵쾅거리고 이미 수업 중반에 접어든 상태라 회원들의 기합 소리와 동작은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우리 셋은 그야말로 우왕좌왕하며 맨 뒷줄에서 종종거리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가야 하는데 왼쪽으로 가고, 한 사람은 멈췄는데 다른 사람은 계속 갔다. 방향이 엇갈리면서 서로 부딪힐 뻔하기도 했다. 십수 년 동안 서로의 눈빛만 봐도 대충 무슨 말을 하는지 알던 사이인데, 줌바에서는 눈빛도 손짓, 발짓도 다 통하지 않았다. 음악이 너무 커서 말이 들리지 않으니 한 원장님이 급하게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돌아, 돌아!"
우리는 춤을 추는 건지 교통정리를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어갔다. 그중에서도 나를 당황하게 만든 것은 '다이아몬드 스텝'이었다. 눈으로 볼 때는 별것 아닌 것 같았다.
'저 정도는 하겠는데?'
그런데 음악이 시작되자 머리와 몸이 서로 다른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머리는 다이아몬드. 몸은 숭구리당당. 숭구리당당 숭당당. 숭구리당당 숭당당!
그런데 어느 순간 거울 속의 내가 헤벌쭉 웃고 있었다. 옆을 보니 두 원장님도 웃고 있었다. 잘해서 웃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못해서 웃겼다. 그런데 그게 좋았다.
쿵쿵 울리는 음악보다 내 심장박동이 더 신나게 뛰는 것 같았다. 잠깐이지만 몸이 가벼워져 하늘을 날아가는 것 같기도 했다. 잘 추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음악이 들리고, 몸이 움직이고, 내가 그 안에 있다는 것이 좋았다. 나는 그날 처음 알았다. 춤을 추면서도 이렇게 몰입할 수 있구나.
두 번째 수업 날, 우리는 벌써 하나의 생존법을 터득했다. '잘 추는 사람 뒤에 서면 된다.' 학원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몸놀림이 날렵해 보였고, 스트레칭하는 자세부터 달랐다. 무엇보다 자연스럽게 앞쪽 자리를 차지하는 모습에서 '경력자'의 향기가 났다.
나는 단번에 결정했다. '바로 저분이야.' 재빨리 그 사람 바로 뒤에 섰다. 그리고 그분만 따라 했다. 오른쪽으로 가면 오른쪽. 손을 올리면 손을 올리고, 돌면 돌았다. 놀랍게도 훨씬 잘됐다. 나는 그날부터 그분을 나의 '워너비 회원'으로 정했다.
물론 부작용도 있었다. 빠르게 방향을 바꾸는 순간이면 여전히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면 앞의 워너비 회원과 눈이 마주쳤다. 아마 그분은 속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이분은 왜 계속 내 뒤에 붙어 계시지?'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아직 혼자서는 길을 잃는 초보자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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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처음엔 어색했지만, 어느새 우리도 춤을 사랑하게 되었다. 줌바 스튜디오 유리벽에 붙어 있는 ‘I LOVE DANCE’라는 문구. 처음에는 과연 우리가 춤을 출 수 있을까 싶었지만, 이제는 이 문구가 조금은 우리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
| ⓒ 이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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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쿵쾅거리는 음악에 맞춰 우리의 저녁이 시작되는 곳. 우리가 다니는 줌바 스튜디오. 저녁이면 이곳에 모여 음악에 몸을 맡기며 하루의 피로를 잊는다. |
| ⓒ 이수정 |
물론 여전히 다이아몬드 스텝에서는 다이아몬드보다 숭구리당당에 가까울 때가 많다. 그러나 다음 동작을 머리로 계산하지 않고 그냥 몸이 음악을 따라가는 순간이 생긴다. 잠깐의 무아지경. 그러다 정신을 차리면 다시 '숭구리당당' 현실로 돌아오기는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어김없이 늘 만나던 곳에서 커피를 마신다. 지난밤 줌바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셋 다 웃음이 터졌다.
"거기서 왜 반대로 갔어요?"
"제가요? 원장님이 먼저 반대로 갔잖아요."
"아니거든요."
누구 말이 맞는지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어차피 셋 다 틀렸으니까. 이야기를 실컷 나누고 각자의 센터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오늘 저녁?"
"물론이죠. 오늘 저녁!"
우리의 목소리가 초가을 하늘로 한 뼘쯤 더 올라갔다. 저녁에 다시 만날 약속 하나가 생긴 것만으로도 우리는 꽤 신이 나 있었다.
이제 아이들은 다 컸다. 오랫동안 우리는 엄마로, 원장으로 살아왔다. 아이들의 시간에 맞추고, 일의 시간에 맞추고, 해야 할 일을 해내느라 저녁은 늘 바쁘게 흘러갔다. 그런 우리에게 요즘 저녁 시간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다.
이제 그 시간에 우리는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고 춤을 춘다. 잘하지 않아도 된다. 우아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음악이 들리면 몸을 움직인다. 가끔 다이아몬드가 숭구리당당이 되어도 우리는 웃는다.
가을바람이 선선하게 불기 시작하는 9월. 오래 한자리에 머물러 온 우리 셋에게도 기분 좋은 바람이 불었다.
그대 이름은 바람, 바람, 바람. 이번 가을 우리 셋에게 찾아온 바람은 춤바람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스토리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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