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을 알기에 셔터를 누른다, 붙잡아 두고 싶어서 [나의 오래된 사진 이야기]

이재필 2026. 9. 20.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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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이자 작가로 활동하며 전통시장과 주변의 일상을 기록해왔다. 오래된 필름카메라를 통해 사라져 가는 풍경과 기억, 기록의 의미를 묻는 이야기를 전하려 한다.

내장 파인더가 없는 L이 카메라를 눈앞에 가져가지 않고도 순간적인 거리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스트리트 사진에 어울린다면, R은 작은 창을 통해 세상을 한 번 더 신중하게 바라보라고 권하는 카메라다.

누군가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고, 나는 뷰파인더로 그를 바라보며, 훗날 누군가는 이 사진을 통해 그 시선들을 다시 겹쳐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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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그랜더 베사 R과 흑백 필름으로 기록한 조선 후기 안동 체화정

사진가이자 작가로 활동하며 전통시장과 주변의 일상을 기록해왔다. 오래된 필름카메라를 통해 사라져 가는 풍경과 기억, 기록의 의미를 묻는 이야기를 전하려 한다. <기자말>

[이재필 기자]

▲ 아이폰 15촬영 보이그랜더 베사 R 35mm 컬러스코파 렌즈와 매칭된 베사 카메라
ⓒ 이재필
매서운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겨울, 보이그랜더(Voigtländer)의 베사(Bessa) L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다. 오래된 카메라를 하나씩 꺼내어 먼지를 털고 사용하는 일은, 어느새 카메라 자체를 소개하는 일이라기보다 그 기계와 함께했던 시간을 다시 불러내는 시간이 되었다. 이번에 가방에 넣은 카메라는 베사 R이다.
베사 L과 R은 L39 스크루 마운트를 공유하며 다양한 렌즈를 쓸 수 있다는 점에서 꽤 닮아 있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다. 바로 '파인더'의 유무다. 내장 파인더가 없는 L이 카메라를 눈앞에 가져가지 않고도 순간적인 거리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스트리트 사진에 어울린다면, R은 작은 창을 통해 세상을 한 번 더 신중하게 바라보라고 권하는 카메라다.
▲ 보이그랜더 베사 R 촬영 창가의 꽃 창가에 놓인 꽃 한 송이. 파인더 안으로 들어온 순간, 평범했던 사물이 하나의 장면이 되었다.
ⓒ 이재필
눈을 가려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카메라의 뷰파인더는 흔히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사진을 찍을수록 그 반대라는 생각이 든다. 파인더는 '보여주는' 장치라기보다 '보이지 않게 가려주는' 장치다.

카메라를 눈에 가져다 대는 순간, 냄새와 소리, 끊임없이 움직이는 세상의 파편들은 검게 닫히고 작은 사각형 하나만 남는다. 무엇을 담을 것인가보다 무엇을 버릴 것인가를 결정할 때, 비로소 내가 무엇을 응시하고 있었는지 알게 된다.

이날은 내가 가장 편안하게 느끼는 35mm 화각의 컬러 스코파(Color-Skopar) 렌즈에 오랜만에 코닥 T-MAX 흑백 필름을 물렸다. 35mm는 너무 멀지도, 지나치게 파고들지도 않는 적당한 온도의 거리를 만들어준다.
▲ 보이그랜더 베사 R 촬영 - 산과 구름 늦여름의 산 위로 솟아오른 구름. 흑백의 계조 안에서 오히려 계절의 무게가 묵직하게 다가온다.
ⓒ 이재필
발걸음이 닿은 곳은 안동 풍산읍에 자리한 체화정이다. 조선 후기에 지어진 이 정자는 형제간의 우애를 상징하는 곳으로, 하회마을의 화려한 연못과는 또 다른 고즈넉한 매력을 품고 있다. 관광지라기보다는 길을 걷다 우연히 마주친 누군가의 고요한 정원 같다.
▲ 보이그랜더 베사 R 촬영 - 체화정 연꽃 꽃이 피고, 지고, 연밥이 되어가는 생로병사의 시간이 하나의 연못 안에 겹쳐 있다.
ⓒ 이재필
색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시간
여름이 끝나가는 무렵의 연밭은 절정기보다 훨씬 흥미롭다. 갓 피어난 연꽃 옆에 웅크린 봉오리가 있고, 그 너머엔 꽃잎을 모두 떨군 연밥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시작과 절정, 그리고 끝이 불과 몇 걸음 안에 공존한다. 흑백의 프레임 속에서 초록이라는 단일한 색으로 묶여 있던 잎들은 빛의 방향에 따라 저마다 다른 짙고 옅은 회색으로 변모하며 시간의 흐름을 시각적으로 증명해 낸다.
▲ 보이그랜더 베사 R 촬영 - 체화정 여름과 가을 사이, 한 사람이 연밭을 응시하고 있다. 나는 그 풍경을 다시 뷰파인더로 바라보았다.
ⓒ 이재필
연밭 앞을 서성이는 사람을 35mm 프레임 안에 작게 담아보았다. 그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누군가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고, 나는 뷰파인더로 그를 바라보며, 훗날 누군가는 이 사진을 통해 그 시선들을 다시 겹쳐볼 것이다. 사진이란 결국 어느 지점에서 멈출 것인가에 대한 '시간 지점의 기록'이다.

영원하지 않기에 붙잡고 싶은 찰나

체화정을 나와 한적한 카페 실내에서 마주친 낡은 시계를 마지막 컷으로 남겼다. 카메라는 시간을 멈추는 기계라지만, 사실 사진은 '시간이 결코 멈추지 않는다'는 슬픈 진실을 확인시켜 주는 도구에 가깝다. 셔터가 닫힌 뒤에도 연잎은 마르고 밤은 길어지며 시계의 초침은 멈추지 않는다. 한낮의 공기는 한여름처럼 뜨거웠지만, 해가 진 뒤의 서늘한 바람은 이미 가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 보이그랜더 베사 R 촬영 -멈추지 않는 시계 사진은 시간의 찰나를 붙잡지만, 시간을 멈출 수는 없다.
ⓒ 이재필
무언가 끝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잠시나마 붙잡아두기 위해 우리는 셔터를 누른다. 그날 베사 R의 작은 창 안에는 연꽃과 구름, 그리고 여름과 가을이 교차하는 아주 짧은 시간이 담겨 있었다. 세상의 소란을 잠시 덮어두고, 오직 하나의 사각형에만 몰두했던 그 서늘하고도 뜨거웠던 계절의 틈새처럼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https://brunch.co.kr/brunchbook/mycamera4th)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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