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위 주세요” 10여분 만에 담낭 절제…수술실에 뜬 ‘로봇 막내’

“가위 주세요.”
오남기 삼성서울병원 이식외과 교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의 왼쪽에서 팔이 뻗어 나와 수술용 가위를 건넸다. 오 교수가 사용한 가위를 돌려주자 다시 받아 제자리에 놓았다. 오른쪽에선 또 다른 두 팔이 움직였다. 한 손은 복강경 내시경으로 수술 부위를 비추고, 다른 손은 집게로 조직을 잡아당겼다.
여느 대학병원 수술실에서 볼 법한 풍경. 그런데 오 교수와 척척 합을 맞춘 건 전공의도, 간호사도 아니다. 푸른 수술복을 입은 휴머노이드 로봇 두 대였다. 16일 오후, 서울 강남구 삼성생명빌딩 내 강의실에서 이뤄진 인간·로봇 연합팀의 ‘협주’는 10여분 만에 성공적으로 끝났다. 염소 간에 있는 담낭을 떼면서다.
인간이 단순히 수술용 로봇의 손길을 빌리는 걸 넘어, 인간과 로봇이 한 팀이 돼 수술대 앞에 서는 날이 현실로 다가왔다. 17일 삼성서울병원은 “휴머노이드형 피지컬 인공지능(AI) 기반 수술보조 로봇 두 대가 인간 의사와 역할을 나눠 수술하는 장면을 세계 최초로 구현했다”고 밝혔다. 이런 ‘K로봇 외과의’가 상용화되면 필수의료 인력 부족을 메워줄 거란 기대가 나온다.
이번 로봇 개발은 정부의 보건의료 연구개발(R&D) 사업인 ‘한국형 ARPA-H 프로젝트’의 하나다. 삼성서울병원이 개발 과제를 주관한다. 5년간(2025~2029년) 정부 연구개발비 138억3500만원이 투입될 예정이다. AI 수술로봇 개발을 둔 세계적 경쟁이 치열한 가운데, 한국도 크게 뒤지지 않는다는 걸 입증한 셈이다.
16일 진행된 시연은 2년 차 중간 성과를 공개하는 자리였다. 사람의 간과 구조가 유사한 염소 간을 대상으로 담낭절제술이 진행됐다. 오남기 교수가 단독 집도의로 나섰고, 휴머노이드 로봇이 양옆에서 수술을 도왔다. 로봇의 등에는 ‘수술 보조’, ‘수술 간호사’처럼 역할을 적은 이름표가 붙었다.

“따라가.” 오 교수가 지시하자 로봇이 든 내시경 카메라가 수술 도구를 따라 움직였다. “많이 뒤로”라는 말에는 카메라가 한층 더 물러나 시야를 넓혔다. 음성 지시 2초 안에 곧바로 움직임이 따라왔다. 로봇이 수술 시야를 확보하고 조직을 잡아당기는 사이, 오 교수는 담낭 절제를 이어갔다.
병원에 따르면 로봇은 수술 도구 5종에 대한 시험에서 집기 성공률 100%, 전달 성공률 98.7%를 보였다. 인간 의사에 크게 뒤지지 않는 성적표를 받아들었다는 의미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에 따르면 글로벌 수술로봇 시장 규모는 지난해 124억9000만 달러(약 18조3393억원)에서 2034년 459억3000만 달러(약 67조4406억원)로 빠르게 성장할 전망이다. 이 거대한 시장에서 미국·중국이 앞서 나가고 있다는 평가가 많다.
미·중과 달리 한국은 '수술 협주' 주목
미국 존스홉킨스대 연구팀은 지난해 7월 AI 수술로봇이 사람의 개입 없이 돼지 사체의 담낭절제술을 8차례 수행하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올해 1월 중국에서도 돼지의 담관을 결찰·절단하는 등 담도 수술의 핵심 과정을 스스로 수행한 사례가 공개됐다.
하지만 한국 연구팀이 주목하는 건 로봇의 단독 수술보다 인간과의 협업이다. 집도의는 판단과 정교한 술기에 집중하고, 휴머노이드 로봇이 각자 맡은 보조 역할을 수행해 의사 한 명만으로 수술하는 ‘솔로 서저리(Solo-surgery)’를 구현한다는 구상이다. 세계 최초로 구현한 ‘수술 협주’도 그 연장선에 있다.
연구 책임자인 정용기 삼성서울병원 이비인후과 교수는 “한국에는 정교한 수술 역량을 갖춘 의료진과 로봇 개발 기업, AI 연구진이 모두 있어 관련 연구를 발전시키기에 유리한 여건을 가지고 있다”면서 “전 세계적인 수술로봇 개발 경쟁에서 앞서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산업계에서도 긍정적인 평가가 나온다. 로봇공학자인 여준구 'K-문샷 AI 휴머노이드' PD는 “혼자 움직이는 완전 자율 로봇은 사고 발생 시 책임 소재, 통제 문제 등 상용화까지 넘어야 할 법적·제도적 과제가 많다”며 “미국 등 로봇 강국에서 자율 의료로봇 개발에 뛰어든 가운데, 한국이 의료진과 휴머노이드 로봇의 협업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보여줬다는 점은 의미 있는 성과”라고 말했다.
'인력난' 필수의료 공백 메울까
외국과 다른 길을 가는 한국의 연구 아래엔 ‘의료진 공백’ 문제도 짙게 깔려있다. 외과 수술 등을 챙길 전공의의 근무 시간이 줄어든 데다, 집도의 외에도 수술을 보조할 여러 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규환 삼성서울병원 지능형의료로봇연구센터장은 “수술 인력이 없다는 현장의 의견을 반영해 이를 보충하려는 고민에서 시작된 연구”라고 털어놨다. 기존 수술실 구조나 수술 도구를 크게 바꾸지 않고 활용할 수 있다는 점도 ‘K로봇’의 장점으로 꼽힌다.
궁극적인 목표는 인력난에 직면한 필수의료 현장의 공백을 메우는 것이다. 정용기 교수는 “인력이 부족한 지방 병원이나 야간·응급 상황에서 표준화된 수술 보조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어 지역 간 의료 격차를 해소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남은 관건은 실제 임상에 적용할 수 있을 만큼 기술적 완성도를 끌어올리는 것이다. 생명을 다루는 수술실에 들어가는 만큼, 염소가 아니라 사람을 대상으로도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 한다는 의미다. 2029년 첫 임상시험을 목표로 내시경 위치 조정 같은 쉬운 보조 업무부터 적용 범위를 점차 넓혀갈 계획이다. 연구팀은 “담낭절제술·뇌하수체종양절제술 등 주요 수술을 대상으로 3개 병원에서 임상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채혜선·이영근 기자 chae.hyes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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