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서류탈락이네" 부산의 여대생, 150년 글로벌기업 첫 한국인 대표된 비결[파워K우먼]

최동현 2026. 9. 17.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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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경영학과 졸업을 앞둔 부산의 한 여대생이 종합상사들에 입사원서를 냈다.

헨켈이 1989년 한국에 법인을 설립한 이후 31년 만에 나온 첫 한국인이자 첫 여성 대표다.

-외국계 기업에서 한국인 여성으로 대표까지 오르는 동안 유리천장은 없었나.

나는 경영학 전공에 미국 공인회계사여서 재무총괄로서 대표이사가 된 경우인데, 외국계 기업에서 이 정도 규모 회사의 재무총괄을 한국인 여성에게 맡기는 경우 자체가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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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미 헨켈코리아 대표 인터뷰
부산 중견기업서 시작한 35년 커리어
"유리천장에 스스로 한계 긋지 마라"

1992년 경영학과 졸업을 앞둔 부산의 한 여대생이 종합상사들에 입사원서를 냈다. 결과는 전부 서류 탈락이었다. 당시 수출 역군을 자처하던 종합상사는 사실상 남성들의 무대였다. 실력을 보여줄 기회도 얻기 전에 유리천장에 가로막혔다. 그로부터 34년이 지난 지금, 그 여대생은 올해 창립 150주년을 맞은 독일의 글로벌 기업인 헨켈의 한국법인을 이끌고 있다. 김영미 헨켈코리아 대표 이야기다. 그런 그가 후배들에게 건네는 조언은 뜻밖에 간명하다. "유리천장 때문에 못 올라가지 않을까 스스로 한계를 긋지 마라. 일단 올라가라."

김 대표는 2020년 5월 코로나19 위기가 한창이던 때 헨켈코리아 대표에 취임했다. 헨켈이 1989년 한국에 법인을 설립한 이후 31년 만에 나온 첫 한국인이자 첫 여성 대표다. 그가 대표로 취임할 당시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여성이 이끄는 헨켈 법인은 한국과 필리핀뿐이었지만 이후 중국·태국·말레이시아까지 여성 대표가 잇달아 나왔다. 다음은 김 대표와의 일문일답.

김영미 헨켈코리아 대표가 서울 강남구 대치동 사무실에서 아시아경제와 인터뷰 하고 있다. 조용준 기자

-헨켈코리아는 어떤 회사인가.

▲가정용 살충제 ‘홈매트·홈키파’와 세제 ‘퍼실(Persil)’, 접착제 록타이트(Loctite) 등으로 유명한 헨켈의 한국법인이다. 안산·송도·음성·천안 등 4개의 생산공장과 서울 가산 및 부산의 테크니컬센터를 포함해 총 11개 사업장을 두고 있다. 직원은 650명 정도다. 반도체·자동차·기저귀 등에 쓰이는 접착제를 비롯해 실란트·표면처리제와 같은 산업 분야 필수품도 생산한다. 헤어 브랜드 시세이도 프로페셔널과 슈바츠코프 프로페셔널을 통해 미용인의 전문성을 키우는 사업도 하고 있다.

-첫 한국인 대표가 됐을 때 소감은.

▲코로나19 위기 속에서 첫 한국인이자 첫 여성 대표가 됐을 때 개인적으로 인정받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본사가 한국인 리더도 헨켈코리아를 잘 이끌 수 있다는 믿음을 보여준 것이라 생각해 모든 직원과 함께 자랑스러웠다.

-대표 취임 당시 세운 목표는 무엇이었고 얼마나 이뤘나.

▲회사의 혁신과 다양성·형평성·포용성(DEI)을 키우는 데 집중했다. 다양한 시각과 백그라운드를 가진 사람들이 개방적으로 얘기할 수 있는 회사에서 혁신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헨켈은 150년 역사 중에서 굉장히 진정성 있는 DEI 문화를 가진 기업이다. 결과적으로 2020년 이후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높지 않았던 시기에도 헨켈코리아는 고객·소비자와 함께 잘 성장해왔다.

김영미 헨켈코리아 대표가 서울 강남구 대치동 사무실에서 아시아경제와 인터뷰 하고 있다. 조용준 기자

-외국계 기업에서 한국인 여성으로 대표까지 오르는 동안 유리천장은 없었나.

▲사회에 나올 때부터 천장은 있었지만 막상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서는 좋은 상사들을 많이 만났다. 다국적 기업에서는 성별이 아니라 성과와 회사에 대한 기여로 사람을 평가하는 문화가 자리 잡혀 있었고 그 안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나는 경영학 전공에 미국 공인회계사여서 재무총괄로서 대표이사가 된 경우인데, 외국계 기업에서 이 정도 규모 회사의 재무총괄을 한국인 여성에게 맡기는 경우 자체가 드물었다. 제조·화학은 보수적인 산업이라 여성 대표가 정말 없다. 없으니까 눈에 띄고 그걸 오히려 기회로 활용했다. 눈에 띄는 사람이 필요한 것을 정상적인 방식으로 얘기하면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오히려 높다. 그래서 후배들에게 있는 그대로 말해준다. “일단 올라가라, 올라가면 그다음부터는 조금 헐거운 경쟁일 수 있다.” 유리천장 때문에 스스로 한계를 짓는 우를 범하지 않으면 좋겠다.

-과거 한 인터뷰에서 여성 관리자 비율을 50%까지 올리겠다고 했다. 지금은 어디까지 왔나.

▲아직 30% 정도에 머물러 있다. 쉽지는 않았다. 회사를 위해 필요한 인재를 승진시키는 것이지 젠더라는 사내 정치적 사유로 승진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성 직원이 42%이니 최소한 42%는 돼야 한다고 보고 계속 노력 중이다. 부서별 편차도 있다. 회계·재무는 여성 매니저 비율이 높고 소비재 사업도 여성 관리자가 40%를 넘는다. 반면 접착 솔루션은 공대·화학 전공자가 많다 보니 남성 비율이 높다.

-여성이 일하기 좋은 기업으로 손꼽히고 있는데 그 비결은.

▲일하기 좋은 기업은 리더들에게서 나온다. 우리나라 대기업을 비롯해 헨켈도 출산휴가·유연근무제·육아휴직 등 제도는 충분히 갖고 있다. 중요한 건 그걸 자기 팀에 실제로 적용할 때 리더가 주는 암묵적인 시선과 문화다. 개인적으로 일하기 좋은 직장의 첫째 조건은 그 회사가 좋은 제품을 만드는 것이다. 좋은 제품은 고객에게 혁신적이면서 지속 가능해야 한다. 같은 회사에서 어떻게 30년 넘게 일하느냐는 질문에 나는 “좋은 제품을 만드는 회사라서”라고 답한다. 둘째는 모든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것과 자기 정체성을 편하게 말할 수 있는 조직이다. 발달장애 자녀를 둔 직원도, 공황장애 클리닉에 다니는 직원도, 배우자가 외국인인 직원도 있다. 그런 사정을 터놓고 얘기하면 회사가 상황에 맞게 배려해주는 조직이 직원 입장에서 일하기 좋은 회사다.

-헨켈의 ‘스마트 워크’가 무엇인지 소개한다면.

▲우리에게 스마트 워크는 단순한 모바일 근무 그 이상을 의미한다. 이는 개인과 회사의 요구를 모두 반영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미래를 주도적으로 만들어가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며, 문화 혁신 여정의 핵심 요소이기도 하다.

-일과 가정의 경계를 위한 ‘디스커넥트 포인트’를 실천한다고 들었다.

▲주로 출퇴근 시간을 활용한다. 자택에서 직장으로 출근하는 동안엔 집안일을 잊는다. 반대로 퇴근할 땐 회사일을 잊으려 한다. 차 안에서 운전하는 동안 음악을 듣거나 뉴스를 들으며 시간을 보낸다. 전용기사도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해 두지 않고 공식 행사 등이 있을 때만 도움을 받고 있다.

김영미 헨켈코리아 대표가 서울 강남구 대치동 사무실에서 아시아경제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조용준 기자

-올해가 헨켈 창립 150주년이다. 이를 기념해 어떤 활동을 해오고 있는지.

▲올해부터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기업문화 프로그램을 만들어 운영하는 ‘직원 리소스 그룹’(ERG)을 발족했다. 세계 여성의 날 강연과 세대·젠더 간 리버스 멘토링, 다른 부서 업무를 경험하는 잡 섀도잉 등을 이어가고 있다.

서울시와의 협약으로 2024년 뚝섬 '헨켈 포레스트', 2025년 보라매공원 '피크닉 그라운드 by HENKEL', 올해 서울숲 '헨켈 더 라운드'까지 3년 연속 기업정원을 조성했다. 시각장애인 걷기 행사의 가이드 워커 봉사에도 헨켈의 많은 직원들이 4년째 참여하고 있다.

-훗날 어떤 리더로 기억되고 싶은가.

▲모든 리더십은 그 자체로 계속 진화하는 것이고, 누군가 내 후임이 되면 그 리더십을 중심으로 헨켈코리아가 계속 발전하길 바란다. 자리에서 내려오면 잊힌 사람이 되는 게 맞다. 커리어는 인생의 일부일 뿐이고 떠나면 그냥 떠나는 거다. 나를 어떻게 기억할지는 내 문제가 아니다. 다만 헨켈코리아에 있는 동안은 목적성 있는 성장과 다음 세대를 위한 지속적인 혁신을 이뤄내고자 한다. 또 직원들이 헨켈코리아를 좋은 회사로 기억할 수 있도록 조직을 계속 유지·발전시키고 싶다.

-리더를 꿈꾸는 여성 후배들에게 조언한다면.

▲소크라테스부터 얘기한다. 너 자신을 알라. 자기 자신에게 제일 예민해야 한다. 내가 뭘 원하는지 먼저 알아야 한다. 그리고 건강이 받쳐줘야 한다. 건강을 헤쳐가면서까지 해야 할 소중한 일은 세상에 없다. 커리어는 인생의 일부다.

-예비 여성 리더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은.

▲다독하는 편이라 인생 책보다는 가장 최근에 읽은 책을 권하고 싶다. 아키모토 유지의 '왜 성공한 리더들은 아무리 바빠도 미술관에 가는가'다. 저자는 일본 나오시마섬의 황무지를 세계적인 예술의 섬으로 바꾼 인물이다. 인공지능(AI)이 기업 환경을 빠르게 변화시키는 시대에 시류에 적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니어 리더는 스스로의 고유한 관점을 가져야 한다. 창의적인 예술가들의 작품에서 그 영감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로봇·AI·자율주행은 모두가 알지만 리더는 '그래서 그게 내 조직에 어떤 의미인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리더들이 새로운 영감을 얻기 위해 애써볼 때가 됐다는 차원에서 일독을 권한다.

▶김영미 헨켈코리아 대표는부산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미국 공인회계사로 1992년 동성화학 해외사업부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IMF 외환위기 때 회사 매각과 함께 영국 ICI 그룹 산하 내셔널스타치로 옮겨 다국적 기업 경력을 쌓았다. 2008년 헨켈이 내셔널스타치를 인수하며 헨켈에 합류했다. 헨켈코리아 재무 총괄 및 대표를 2020년부터 겸임하고 있으며 재무총괄 겸 헨켈 아시아·태평양 준법감시를 역임한 바 있다. 주한독일상공회의소 이사이자 ‘SKY Executive MBA CEO 포럼’의 초대 명예회장으로도 활동 중이다.

최동현 기획팀장 nell@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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