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 관요 터에서 빚어낸 도자의 내일, 현대미술로 다시 태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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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한가운데 놓인 달항아리가 은은한 조명을 받아 모습을 드러냈다.
광주는 조선 왕실에서 사용하던 백자를 굽는 관요(官窯)가 약 500년간 운영된 한국 도자의 중심지다.
달항아리 둥근 몸에 직선고정관념을 깨다전시의 중심은 올해 7회를 맞은 '아름다운 우리도자 공모전' 수상작들이다.
박소연 경기도자박물관 큐레이터는 "작가는 달항아리의 둥근 형태에 시선이 머무는 '틈'을 만들고자 했다"며 "직선을 넣었지만 오히려 항아리의 곡선이 더욱 선명하게 살아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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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개막…‘땅이 만든다’ 주제로 11월1일까지 개최
조선 왕실 백자 생산지 광주서 전통과 현대 잇는 도자 향연
달항아리부터 흙·석탄·나무 재까지…재료의 경계 허문 실험
세계 77개국 1300여명 참여…본전시 작품 130여점 선봬
6대째 옹기 빚는 장인 가족…“보이지 않는 곳에서 전통 지켜”
전시장 한가운데 놓인 달항아리가 은은한 조명을 받아 모습을 드러냈다. 둥근 몸체 위에는 곧은 선 하나가 시원하게 그어져 있었다. 분명 직선이지만 항아리의 곡면을 따라 흐르면서 어느새 부드러운 곡선으로 바뀌었다. 초승달이 차올라 만월이 되고 다시 이지러지는 밤하늘의 시간이 작은 항아리 안에 담긴 듯했다.

'2026 경기도자비엔날레' 개막을 이틀 앞둔 16일, 경기 광주시 곤지암읍 경기도자박물관과 이천 경기도자미술관을 찾았다. 전시장에서는 조선백자의 단아한 조형미와 현대 도예가들의 거침없는 실험정신이 시공간을 뛰어넘어 맞부딪치고 있었다.
광주는 조선 왕실에서 사용하던 백자를 굽는 관요(官窯)가 약 500년간 운영된 한국 도자의 중심지다. 경기도자박물관은 이러한 역사성을 바탕으로 2001년 '조선관요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이후 조사·연구와 전시 영역을 조선백자에서 한국 도자 전반으로 확대하면서 현재의 이름으로 바꿨다.
박물관 관계자는 "경기도는 한국 도자 역사의 중요한 출발점이자 중심지"라며 "전통 도자를 조사·연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시의 중심은 올해 7회를 맞은 '아름다운 우리도자 공모전' 수상작들이다. 옛 도자의 형태와 기법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흙과 불이라는 전통적인 재료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한 작품들이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시 초입부터 익숙한 도자의 문법이 깨졌다. 매끄럽게 다듬은 정제토 대신 땅에서 막 캐낸 듯한 거친 흙으로 삼국시대 토기의 질감을 되살린 작품이 눈길을 끌었다. 분청과 상감 기법도 옛 틀에 머물지 않았다. 문양 사이의 간격을 넓히고 형태를 일부러 일그러뜨려 새로운 리듬을 만들어냈다.
관람객의 시선이 가장 오래 머문 곳은 단연 오은주 작가의 대상작 '왜곡'이었다. 달항아리의 전(입구)과 굽을 툭 떼어내듯 변형하고 둥근 곡면에 차가운 직선을 과감하게 그어 넣은 작품이다.
박소연 경기도자박물관 큐레이터는 "작가는 달항아리의 둥근 형태에 시선이 머무는 '틈'을 만들고자 했다"며 "직선을 넣었지만 오히려 항아리의 곡선이 더욱 선명하게 살아난다"고 말했다.
바닷가 마을에서 자라며 보름달빛이 하늘과 바다를 훤히 비추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흙으로 옮겼다는 작가. 이전 공모전 동상에 이어 당당히 대상을 거머쥔 그의 작품 앞에는 '자신의 시도가 맞는지 끊임없이 검증하려 했던' 한 예술가의 치열한 성장의 궤적이 묵직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은영 작가의 '몰리'도 발길을 붙잡았다. 물레로 빚은 물방울 모양의 작은 도자 조각을 기단처럼 쌓아 올린 작품이다. 상단의 무광 흰색 유약과 하단의 맑고 투명한 유약이 대비를 이루며 얼음이 녹아 물로 변하는 찰나를 표현했다.
액체 상태의 유약이 가마 안에서 녹았다가 다시 고체로 굳는 변화에 주목한 작품이다. 백자의 흰빛은 간직했지만 형태와 표현 방식은 전통 백자와 전혀 달랐다.

현대적인 변주 속에서도 전통의 뿌리는 여전히 단단하고 무거웠다. 완성된 높이만 79㎝에 달하는 대형 항아리 앞에 서자 절로 압도감이 들었다. 가마 안에서 흙이 불을 견디며 10% 이상 줄어드는 점을 감안하면, 성형 당시에는 90㎝를 훌쩍 넘었을 터다. 쏟아져 내리는 흙의 무게를 지탱하며 완벽한 균형을 잡아낸 장인의 손끝에는 세월의 무게가 얹혀 있었다.
여주에서 6대째 옹기의 맥을 잇고 있는 국가무형유산 옹기장 가족의 사연은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한 번에 수백 점의 기물이 들어가는 대형 가마에 불을 지피고, 불길이 식을 때까지 며칠 밤을 지새우는 고된 작업.
박물관 관계자는 "옹기를 만든다고 해서 큰 경제적 보상을 받는 것도 아니고 생활이 넉넉해지는 것도 아니다"며 "다른 일을 해서 번 돈으로 작업을 이어가면서도 옹기에서 손을 놓지 않는다는 말이 인상 깊었다"고 했다.
이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누군가는 전통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삶을 걸고 있다"며 "그런 시간이 쌓여 오늘날 한국 도자의 뿌리가 유지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전시 후반부로 갈수록 흙은 그릇의 재료를 넘어 땅의 기억을 기록하는 매개가 됐다.
한 작가는 경남 산청군 생초면의 흙을 직접 가져와 작품을 만들었다. 사람이 땅을 밟고 건물을 세울 때 남기는 흔적을 '상처'로 보고, 그 흔적을 도자 구조물로 옮겼다. 관람객은 작품 안으로 들어가 땅이 간직한 시간과 기억을 마주하게 된다.
호주 작가들은 토양과 석탄, 나무의 재를 이용해 지질학적 시간과 멸종의 역사를 풀어냈다. 호주 동부 해안의 여러 탄광에서 채취한 석탄은 생성 시기와 성분에 따라 서로 다른 색을 보였다. 나무를 태운 재로 만든 유약 역시 나무가 자란 토양의 화학적 성질에 따라 각기 다른 빛깔을 냈다.
호주 원주민 여성들이 자신들의 땅과 음식, 신앙, 공동체의 기억을 그린 도자 작품도 소개됐다. 사진을 보고 그대로 옮기는 방식이 아니라 오랫동안 몸에 밴 풍경과 기억을 작품에 담았다. 도자는 이들에게 생활 도구이면서 공동체의 역사를 전하는 기록물이었다.

올해 비엔날레의 주제는 '땅이 만든다(Earth Makes)'다. 흙과 물, 불이 서로의 성질을 바꾸며 새로운 물성을 만들어내는 도자의 제작 과정에 주목했다. 창작의 주체를 인간에게만 두지 않고 땅과 자연으로 확장한 것이다.
본전시는 '흙이 만든다' '땅이 만든다' '지구가 만든다' 등 세 장으로 구성됐다. 흙이라는 물질에서 출발해 땅이 품은 기억과 생명, 나아가 지구의 환경과 역사로 시선을 넓힌다. 14개국 28개 팀, 작가 67명이 도자 작품 130여점을 선보인다.
전시장을 모두 돌아 나오자 처음 마주했던 달항아리가 다시 떠올랐다. 조선 왕실의 백자를 구워내던 광주의 흙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새로운 이야기를 빚고 있었다. 형태와 기법은 달라졌지만, 흙을 고르고 손으로 빚은 뒤 불의 결과를 기다리는 과정은 변하지 않았다.
전통은 옛것을 그대로 반복하는 일이 아니었다. 장인은 지켰고, 젊은 작가는 비틀었으며, 해외 작가는 흙 속에 묻힌 지구의 시간을 끌어냈다. 오래된 흙 위에서 한국 도자의 미래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2001년 시작해 올해 13회를 맞은 경기도자비엔날레는 오는 18일부터 11월1일까지 45일간 열린다. 이천 경기도자미술관과 광주 경기도자박물관, 여주 경기생활도자미술관 등 경기도 곳곳에서 세계 77개국 작가와 관계자 등 1300여명이 참여한다.
광주=이종구 기자 9155in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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