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년 자랑 접고 나잇값 해라…‘인턴’ 최민식이 보여준 진짜 어른 [송원섭의 와칭]

송원섭 2026. 9. 16.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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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인턴'은 젊은 CEO 선우(한소희)와 은퇴자 기호(최민식) 사이의 우정과 교감을 다루고 있다. 사진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옛날이야기 하나. 불교 경전인 ‘잡보장경(雜寶藏經)’에는 노동력을 잃은 노인들을 멀리 내다 버리는 기로국이라는 나라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하지만 한 농부는 차마 어머니를 버리지 못하고 몰래 집안에 감춰 두고 있었죠. 어느 날 이웃 강대국 사신이 어려운 문제를 내고 이 나라를 위협합니다. ‘재로 새끼를 꼬는 법’을 내놓으라는 것이죠.

말이 안 되는 난제에 온 조정이 고민하고 있을 때, 농부의 어머니가 “새끼줄을 소금물에 적신 뒤 잘 말려서, 평평한 바닥에 두고 천천히 불에 태우면 재로 새끼를 꼰 모습이 흐트러지지 않고 남는다”는 해결책을 내놓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라는 평화를 되찾고, 왕은 노인들의 가치를 몰랐던 자신의 태도를 크게 후회한다는 내용입니다. 우리나라 고려장 설화의 원조가 바로 이 기로국 설화죠.

로버트 드니로, 앤 해서웨이 주연의 영화 ‘인턴’이 벌써 11년 전 작품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이 놀랍니다. 사실 지금 다시 봐도 그리 시대에 뒤떨어진 느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화 속 설정의 상당수가 지금과 큰 차이가 없고, 무엇보다 ‘너무 건강한 상태로 은퇴한 사람들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 것인가’라는 주제는 그 시절보다 더 긴요한 이야기가 되었죠.

로버트 드 니로, 앤 해서웨이 원작의 2015년작 영화 '인턴'. 사진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2026년, 최민식·한소희 주연의 한국 영화 ‘인턴’은 한국 사회에서도 이 질문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59년생 기호(최민식)는 새롭게 떠오르는 온라인 기반의 패션 기업에 시니어 인턴으로 취업합니다. 한때 출판사 대표를 지냈던 기호는 3개월간 이 회사의 대표 선우(한소희)를 보좌하면서 서로 큰 영향을 주고받게 됩니다.

영화 앞부분은 정해진 노선대로 빠르게 흘러갑니다. 기호는 완전히 생소한 패션 회사의 생리에 적응하느라 꽤 노력하지만, 당연히 순탄치 않아 마찰음이 일어납니다. 다행히 기호나 회사 사람들, 인턴 동기들 모두 기본적으로 선의를 장착한 인물들이기에 서로 빠르게 적응해 가고, 곧 힘을 합쳐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원작 ‘인턴’의 세계에는 ‘회사란 일만 하는 곳은 아니다’, 그리고 ‘리더십이란 업무 지휘만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전제가 존재합니다. 이 두 전제는 결국 ‘경륜(‘짬밥’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라는 교훈으로 이어지죠. 이를테면 재로 새끼를 꼬는 것 같은 난제를 해결하는 능력 같은 것 말입니다.

하지만 한국판 ‘인턴’은 누가 봐도 ‘노병들을 박대하지 말고 잘 써먹으라’는 교훈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는 아닙니다. 특히 요즘의 한국은 너무 많은 ‘어른들’이 조용히 뒷선에서 조언자로서 경륜을 발휘하기보다는, 하루라도 더 자신들의 자리를 유지하려는 ‘노욕’을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 문제가 되고 있죠.

제가 보기에 이 영화에서 김도영 감독이 가장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새로운 시대의 롤모델로서 기호가 보여주는 태도입니다. 김 감독은 영화 속 기호를 통해, 현재 우리 사회에서 빈발하는 세대 간 갈등의 일차적 원인이 ‘어른이 나잇값을 못 한다’는 데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듯합니다.

영화 속 기호는 절대 나서서 아는 척하지 않고, ‘왕년에 내가’로 시작하는 장광설을 늘어놓지도 않습니다. 일단 뭐든 겸손하게 배우려 하고, 남들이 하지 않는 일에 앞장서며, 혹시나 내가 하는 말이 ‘젊은 윗사람’에게 거슬리지는 않을까 조심합니다. 남들을 칭찬해 기세를 북돋는 요령을 알려줄 뿐, 절대 ‘너희 서장 남천동 살지?’ 같은 꼰대식 으름장은 놓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두 배우의 좋은 호흡입니다. 한소희는 회사의 성장과 남편과의 관계 속에서 고민하는 새로운 시대의 엘리트 여성을 연기하는데, 지금까지 드라마에서 보여주지 않았던 탁월한 캐릭터 소화력을 선보입니다.

영화 '인턴'의 한 장면. 사진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그런 한소희의 연기를 끌어내는 데 최민식이 ‘판을 깔아 주는’ 솜씨가 빛을 발한다는 점도 빠뜨릴 수 없습니다. 두 사람의 케미스트리가 폭발하는 대목은 도쿄에서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장면인데, 원작과 비교했을 때 한국판 ‘인턴’을 대표하는 명장면으로 꼽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감동적입니다.

반면 두 주인공이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모습이 대등하게 그려졌다면 더 좋았겠다는 점은 살짝 아쉽습니다. 기호의 존재가 선우와 회사의 변화에 꽤 큰 영향을 미치지만, 영화가 시작하고 끝날 때까지 기호에게선 거의 변화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최소한 이들이 다니는 곳이 패션 회사인 만큼, 3개월간 회사를 다닌 기호의 패션만이라도 뭔가 변화가 그려졌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최근 2000년생인 가수 한로로가 자신을 ‘늙크크’라고 불러 논란을 빚었습니다. 20대 중반인 한로로 역시 2005~2009년생인 아이돌 그룹 코르티스(CORTIS) 멤버들과 비교하면 자신도 ‘늙크크’에 해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죠. 이 사건은 결국 늙음과 젊음이란 스스로 정한 마음속 기준에 달린 것일 뿐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니 영화 ‘인턴’은 사실 모든 세대를 겨냥한 작품인 것이죠. 거의 모든 성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른’의 위치에 이미 와 있기 마련이니까요. 특히 평소 접할 기회가 드문 여러 세대가 한자리에 모이는 추석 연휴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영화로 추천합니다.

송원섭 song.weonseo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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