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멸망론은 사기”…AI에 ‘정치의 언어’ 덧씌운 트럼프, 워싱턴 갈랐다

유지혜 2026. 9. 15.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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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인공지능(AI)의 위험성에 대한 논의가 단순히 첨단 기술 규제 차원을 떠나 미국 정치 지형을 흔드는 핵심 의제로 진화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AI 개발 감속론을 “음모”라고 몰아붙이자 민주당은 AI 규제 방임에 대한 책임을 부각하며 공세에 나섰고, 공화당은 과도한 규제가 미·중 간 경쟁 국면에서 국가 안보를 해칠 수 있다고 맞서는 ‘공수 구도’가 형성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로이터=연합뉴스

트럼프는 14일(현지시간) 자신의 소셜미디어(SNS) 트루스소셜에 잇따라 올린 여러 건의 글에서 “AI와 데이터센터를 겨냥한 역겨운 음모(SICK conspiracy)가 벌어지고 있으며, 이를 반기는 것은 중국 뿐”이라며 안전장치를 마련할 때까지 AI 개발 속도를 늦춰야 한다고 촉구한 다리오 아모데이 앤트로픽 최고경영자(CEO)를 저격했다. 아모데이가 “천사인 척한다”고 비꼰 뒤 “음모론자와 반역 선동자, 배신자, 정보 유출자들은 각오하라”고도 했다.

또 “AI가 세계를 장악하고 인류를 파괴한다는 주장과 그 밖의 모든 나쁜 이야기는 사기(HOAX)”라며 “자신들을 파산에 이르게 할 규제를 요구하는 업계 지도자들을 본 적이 있는가”라고 지적했다. “AI와 데이터센터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경제발전의 엔진이 될 것”이라는 주장도 내놨다. 또 “급진 좌파 민주당 인사들이 벌이고 있는 AI 사기는 기후변화 사기를 연상시킨다”고 했고, AI의 위험성을 제기하는 이들을 “사악한 대의를 좇는 혁명분자들”이라고 비난했다.

전날만 해도 “여러 부정적인 세력이 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을 일들까지 거론하고 있다”며 업계의 요구를 기우로 일축한 정도였다면, 하루 만에 이를 중국을 이롭게 하는 반역 행위로까지 몰면서 공세의 수위를 한층 높인 것이다. 특히 ‘음모’나 ‘사기’ 등은 트럼프가 과거 러시아의 대선 개입 의혹으로 수사를 받을 때나 탄핵 국면에서 비판 세력에 대해 수식어처럼 늘 붙여 쓰던 단어다. 트럼프가 통제불능 AI의 위험성에 대한 논의에 ‘정치의 언어’를 덧씌우기 시작한 셈이다.

이와 관련, 샘 올트먼 오픈AI CEO가 공화당 전당대회가 진행 중이던 지난 10일 트럼프를 행사장 뒤에서 만났다고 MS 나우가 보도했다. 이는 올트먼의 요청에 따른 것으로, 갈수록 커지는 AI의 위력이 대화 주제였다는 설명이다. 이로부터 이틀 뒤 나온 아모데이의 감속 촉구를 트럼프가 정면 비판한 것이다.

이처럼 중국에 밀릴 수 없다는 절박감과 AI가 경제 성장의 동력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트럼프의 언어를 거칠게 바꿔놓자 워싱턴은 둘로 갈려 즉각 반응하고 있다.

차준홍 기자


트럼프 행정부와 공화당 지도부는 감속론을 경계하며 방어에 나섰다. JD 밴스 부통령은 이날 기자들과 만나 “수많은 프론티어 AI 테크 기업들이 정부로 달려와 자신들을 규제해 달라고 애원하는 현 상황이 다소 의아하다. 내게는 이것이 일종의 ‘트로이의 목마’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트럼프의 음모론을 사실상 지원사격했다.

마이크 존슨 하원의장은 CNN 방송에 “의회가 서둘러 긴급 회기라도 열어 AI 규제에 나선다면 미국은 중국과의 경쟁에서 패할 것이며, 이는 모든 미국인에 대한 위협”이라고 말했다. AI 규제를 안전이 아닌 안보의 문제로 전환한 것이다.

다리오 아모데이 앤트로픽 CEO. 로이터=연합뉴스

민주당은 이를 중간선거를 넘어 대선에서도 쟁점화할 채비에 나섰다. 지난 10일 민주당 행사에서 2028년 대선주자들이 AI를 “핵심 의제”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아모데이의 감속 제안 등을 “고무적인 움직임”으로 평가하고 있다고 뉴욕타임스(NYT)는 소식통을 인용해 전했다. 또 오바마가 아모데이와 AI 안전 문제를 논의해 왔다고 보도했다.

유력 차기 주자들도 이슈 선점에 나서는 분위기다. 피트 부티지지 전 교통부 장관은 전날 NBC 인터뷰에서 “통제를 벗어난 AI에는 비상정지 장치가 필요하다”고 촉구했고, 조시 샤피로 펜실베이니아 주지사는 X(옛 트위터)에 “연방정부가 나서 국내는 물론 국제무대에서도 안전장치를 마련했어야 할 때가 한참 지났다”고 썼다.

원내에서도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하킴 제프리스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는 전날 ABC 뉴스에 출연해 의회가 AI 개발 속도를 늦추기 위한 “결단력 있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논의하기 위한 의원총회(15일)도 예고했다.

CNN은 AI의 위험성에 대한 대중의 불안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특히 AI 산업 자체를 이끄는 거물들로부터 이러한 경고가 나오고 있다는 점은 정치적 분수령(political watershed moment)처럼 느껴진다”고 지적했다. 또 “이례적인 연속 경고에 대해 극명하게 엇갈린 반응은 단순히 워싱턴의 정치적 양극화뿐 아니라 AI가 실제로 인류에게 위협이 되는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 자체가 파편화돼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주요 기업 지도자들이 감속을 외치는 것을 두고 진정성을 의심하는 시각도 적지 않다. 워싱턴포스트(WP)는 “올트먼과 아모데이는 과거에도 기술이 초래할 막대한 위험이나 개발 억제의 필요성에 대해 극단적인 경고를 내놨지만, 다른 국가나 경쟁사에 안전한 AI 구축 방식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자사가 AI를 더 빠르게 개발해야 한다고 말해왔다”고 지적했다. 이런 전력 때문에 순수성에 의구심이 제기되고 있다는 것이다.

업계 내 의견 차이도 상존한다. WP에 따르면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이날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올인 서밋’ 무대에서 트럼프의 전화를 받았고, 이를 스피커폰으로 연결했다. 청중이 듣는 가운데 트럼프는 AI와 로봇이 세계를 지배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사기”라는 주장을 다시 했고, 황은 “맞습니다. 우리는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방치하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다만 방향은 달라도 정치권과 업계에서는 포괄적인 논의의 장을 마련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존슨 의장은 트럼프와 의회 지도부, 주요 AI 연구소 수장들이 참여하는 백악관 회동이 “이번 주 후반이나 다음 주 초 열릴 수 있다”고 밝혔다. 테크 전문매체 디인포메이션은 전날 앤트로픽과 오픈AI, 구글의 실무진이 지난 7월부터 AI 안전기준을 마련할 업계 자율규제기구 설립 가능성을 논의해 왔다고도 보도했다.

AI 규제를 두고 당파적 전선이 형성됐지만, 찬반이 꼭 기존의 좌우 구도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진보 진영을 대표하는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과 트럼프 지지층 마가(MAGA,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진영의 핵심으로 꼽히는 스티브 배넌 전 백악관 수석전략가는 15일 워싱턴에서 열리는 ‘친인간 회의’에 나란히 참석해 AI 규제 강화를 촉구할 예정이다. AI 문제가 양당을 가르는 동시에 기존의 정치적 경계까지 뒤흔들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워싱턴=유지혜 특파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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