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한국산 안 사도 되는 게 위험”…K소부장 경고음 [中반도체 공습]
“불안하죠. 글로벌 선두기업들과 경쟁해야 하는데 링에서 맞붙기엔 체급 자체가 다르고, 중국까지 빠르게 따라붙고 있으니까요.” 익명을 원한 국내 메모리 반도체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업체 관계자의 하소연이다.
15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중국의 반도체 굴기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 같은 대기업 뿐 아니라, 국내 소부장 업계에까지 위협이 되고 있다. 국가 지원을 등에 업은 중국 업체들은 자국 시장에서 쌓은 양산 경험 앞세워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한국을 추격 중이다. 한국 정부도 반도체 분야 기업 간 공동 연구·실증과 인재 확보 등 기업이 체감할 만한 지원을 서둘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거세다.

중국 소부장 업체의 빠른 성장 배경은 자국 반도체 생산시설이 풍부한 시험 무대를 제공하고, 정부가 시행착오를 견딜 시간을 벌어준다는 점이다. 일례로 올해 말 양쯔메모리(YMTC) 우한 3공장이 가동 예정인데, 민관의 강력한 협력 덕에 공장이 늘어날수록 중웨이반도체(AMEC·식각) 등 현지 소부장 업체가 양산 실적을 쌓을 기회도 커지는 구조다.
박재근 한양대 석학교수는 “중국 소부장들의 성장은 기술력이 압도적이어서가 아니라 자국 공장들이 검증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이라며 “한국도 연구개발(R&D) 지원을 늘리고 테스트베드 구축을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
전략적 자금 지원도 눈에 띈다. 중국은 2024년 3440억 위안(약 69조원) 규모의 국가 반도체 투자기금 ‘빅펀드’ 3기를 조성했다. 초기 빅펀드가 반도체 제조시설에 집중됐다면, 3기는 해외 의존도가 높은 제조장비 등으로 투자 범위를 넓힌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반도체 키운 투자기금 그래픽 이미지. [자료제공=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9/16/joongang/20260916101844200gybd.jpg)
정형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중국은 범용 웨이퍼와 반도체 소재에서도 상당한 경쟁력을 갖췄다”며 “중국 안에서 소부장부터 반도체 생산까지 자급하는 구조로 바뀌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와 관련 국내 한 장비업체 관계자는 “지금까지는 중국에 ‘못 파는’ 게 위험이었다면 앞으로는 중국이 한국산을 ‘안 사도 되는’게 위험”이라며 “자칫 (한국 업체가) 돌아갈 시장이 없어질 수 있다”고 걱정했다.
현재 국내 소부장 기업들은 증착·식각 등 각 분야에서 기술을 개발하고 있지만, 이를 한데 모아 차세대 공정을 공동 연구할 기반은 부족하다. 무엇보다 기술 개발에서 양산까지 넘어야 할 문턱이 높다. 연구개발(R&D)비를 들여 기술과 제품을 개발해도 성능을 시험할 고가의 설비를 자체적으로 갖추기 어렵다. 검증이 늦어지면 자금 회수 시점도 밀릴 수 있다.
국내에서는 SK하이닉스가 정부·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을 받아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8600억원을 들여 ‘트리니티 팹’을 구축하고 있다. 반도체 소부장 기업들이 자사 제품의 양산 성능을 검증하는 용도로 사용될 ‘미니 팹’이다.
2027년부터 소부장 기업들이 약 3300㎡ 규모의 미니 팹에서 개발 제품을 시험할 수 있지만 구현 가능한 공정에는 한계가 있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웨이퍼가 없으면 연구개발을 할 수 없다”며 “정부가 연구개발용 웨이퍼를 지원하고 첨단공정과 첨단 패키징까지 저렴하게 시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기정 트리니티팹 대표는 “테스트베드가 있어도 시험·평가와 분석 비용은 소부장 중소기업에 상당한 부담”이라며 “정부가 바우처 제도 등을 마련해 실증 인프라의 진입 장벽을 낮추고, R&D 지원을 받지 못한 기업에도 이용 기회를 넓히면 테스트베드 활성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중국의 자국 장비 우선 구매로 범용 장비 시장에서 국내 기업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며 “결국 초격차 기술을 확보할 수 있도록 실증 기회를 넓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업계의 요구는 크게 ▶공동 연구 기반 마련 ▶독자 기술 보호·육성 강화 ▶전문 인력 지원 확대 등 세 가지다. 경쟁 기업과 반도체 제조사, 연구기관이 원천기술을 함께 개발·검증하는 이른바 ‘한국판 아이멕(IMEC)’을 정부가 주도해 구축해야 한다는 요구가 나온다.
아이멕은 1984년 벨기에 정부 주도로 기업·대학·연구기관이 공동으로 차세대 공정과 나노전자 기술을 검증하는 산학연 협력 모델이다.
벨기에는 아이멕을 통해 경쟁사들이 제품 경쟁은 그대로 이어가면서도 위험 부담이 큰 원천기술 등은 함께 검증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처음엔 협업을 꺼리던 경쟁사들도 정부가 판을 깔아주자 결국 한자리에 모였고, 이는 오늘날 두 지역 반도체 기술력의 토대가 됐다. 한국 소부장에도 이런 정부 주도의 공동 연구 인프라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정 연구위원은 “핵심기술 연구개발부터 실증·인증, 최초 구매, 양산, 규모 확대, 글로벌 고객 확보까지 하나의 정책 사슬로 연결해야 지원 성과가 가시화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해외 고객 확보 역시 정부가 뒷받침할 영역이다. 해외 생산시설에서 성능을 검증할 기회를 넓히고 현지 인증과 기술 협력을 지원하면 국내 업체의 고객 다변화에 도움이 된다. 지원 성과도 연구개발 과제 숫자만을 기준으로 하는 게 아니라 양산 채택과 해외 매출로 이어졌는지 살펴야 한다는 지적이다.
박 교수는 “국내 소부장이 약해지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해외 업체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져 공급망 위험과 조달 비용이 커질 수 있다”며 “새로운 기술과 제품을 개발해 글로벌 수준의 경쟁력을 갖추는 생태계를 만들지 못하면 경쟁에서 더 밀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소부장 지원은 개별 협력사를 돕는 차원을 넘어 한국 반도체의 제조 경쟁력을 지키는 정책으로 다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인경 기자 kim.ink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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