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즙 배달하며 만난 사람들, 배우 이정은의 얼굴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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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의 매력은 단순한 외모나 화제성만으로 설명되기 어렵습니다.
9일 방송된 tvN 예능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럭>(아래 <유퀴즈>) 359회에 출연한 이정은은 배우가 되기까지 자신이 거쳐온 자리들을 이야기했다.
'연기파 배우'라는 흔한 수식어 대신 소품팀과 총무팀, 조연출로 일했던 이정은의 시간을 알고 나면 그의 연기도 조금 다르게 보인다.
대중은 50대가 된 이정은을 비로소 알아봤지만, 그가 배우가 되어온 시간은 무대 뒤에서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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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의 매력은 단순한 외모나 화제성만으로 설명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어떤 장면에서 어떤 태도가 드러나는지, 그 순간들이 인물에 대한 호감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능, 영화, 드라마, 유튜브 등 다양한 콘텐츠 속 인물을 하나씩 살펴보며 그 사람이 왜 지금 호감을 얻고 있는지, 그리고 그 매력이 어떤 순간에 드러나는지를 관찰해 봅니다. <편집자말>
[황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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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한 배우 이정은. |
| ⓒ tvN |
흔히 긴 무명 시절을 이야기할 때면 '그래도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결론으로 향한다. 그러나 이정은의 시간은 무대에 설 날만 기다리며 버틴 세월이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 일로 채워져 있다. 배우와 스태프를 오갔고, 극단을 만들고 공연을 연출하고 다른 배우를 가르쳤다. 연극만으로 생계를 꾸리기 어려웠고 빚도 갚아야 했기에 마트 판매와 녹즙 배달을 비롯한 여러 아르바이트도 했다.
그렇게 해본 일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대학교 3학년 때 학전에서 공연한 연극 <한여름 밤의 꿈>으로 데뷔한 이정은은 이후 연기 훈련을 위해 직접 극단 '눈위에나'를 꾸렸다. 첫 작품은 연극 <진동거울>이었다. 공연을 준비하던 중 연출자가 갑자기 사라졌다. 이정은은 배우로 출연하는 동시에 연출까지 떠맡아야 했다.
공연은 무사히 무대에 올랐지만 관객 동원에는 실패했다. 이정은에게는 5천만 원의 빚이 남았다. 신하균과 지진희를 비롯한 동료 배우들에게 돈을 빌렸고, 그 빚을 모두 갚는 데 13년이 걸렸다. 빚을 갚기 위해 녹즙을 배달하고 호텔에서 서빙했다. 마트에서는 간장과 채소도 팔았다. 판매왕이 될 만큼 물건을 잘 팔았다. 물건을 파는 일은 배우가 되기 위해 계획한 훈련이 아니었다. 당장 생활을 이어가고 빚을 갚기 위해 해야 했던 일이었다.
판매왕이 된 비결을 묻자 매뉴얼을 숙지하고 건강에 좋은 성분을 강조하며 판매에 활용했다고 대답했다. 물건을 팔기 위해서는 소비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말에 마음을 여는지, 지금 말을 걸어도 되는 상황인지 알아차려야 한다. 호텔에서 서빙을 하며, 마트에서 판매를 하며, 녹즙을 배달하며 만났던 사람들의 말투와 표정도 남았을 것이다.
다채로운 이정은의 얼굴
그래서일까. 배우 이정은의 얼굴에는 우리가 어디선가 본 듯한 사람들의 표정이 있다. 영화 <기생충>의 가정부 문광을 연기할 때는 녹즙을 팔던 시절이 묻어나왔다고 한다. 시장에서 일하는 사람, 남의 집을 돌보는 사람, 버렸던 자식을 걱정하는 사람, 억척스럽게 살아왔지만 뜻밖의 순간에 마음 한구석을 들키는 사람. 그의 연기가 구체적인 것은 연기를 위한 연기보다 생활과 연기를 오가며 자연스레 습득한 것들이 연기로 녹아나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무대 뒤에서 일한 경험은 이정은의 연기 방식에도 남아 있다. 조연출은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자리가 아니다. 배우의 동선을 확인하고 소품을 챙기며, 연습과 공연이 무사히 이어지도록 곳곳에서 생기는 문제를 처리해야 한다. 소품팀과 총무팀의 일도 관객의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하지만 그중 하나라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공연은 완성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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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기생충> 관련 이미지. |
| ⓒ CJ ENM |
'연기파 배우'라는 흔한 수식어 대신 소품팀과 총무팀, 조연출로 일했던 이정은의 시간을 알고 나면 그의 연기도 조금 다르게 보인다. 이정은은 카메라가 자신을 비추는 순간만 연기하지 않는다. 인물이 살아가는 공간과 상대 배우의 반응, 장면 전체가 흘러가야 할 방향까지 함께 보고 있는 듯하다.
이정은은 다른 배우의 연기를 가르치기도 했다. 연기 지도를 하며 생계를 이어가던 시절에는 이효리와 지진희의 연기 코치를 맡았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옥자>에서는 돼지 옥자의 목소리를 연기하기도 했다. 촬영까지 6개월이 남았다는 말을 들은 그는 돼지 소리를 연구하기 위해 실제 친환경 돼지 농장까지 찾아갔다. 관객은 스크린에서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그는 얼굴이 나오는 역할과 다르지 않게 준비했다.
무대 뒤에서부터 시작된 이정은의 시간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함안댁과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의 며느리를 거쳐 영화 <기생충>의 가사도우미 문광으로 얼굴을 알렸다. 대중은 50대가 된 이정은을 비로소 알아봤지만, 그가 배우가 되어온 시간은 무대 뒤에서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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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한 배우 이정은. |
| ⓒ tvN |
부모님을 설득하려고 시작한 연출 공부는 공연을 맡아 무대에 올리는 힘이 됐다. 연기를 하려고 만든 극단은 빚을 남겼지만, 그 빚을 갚으며 겪은 일들은 훗날 카메라 앞에서 생활인의 몸짓으로 돌아왔다. 무대 뒤에서 일한 경험은 작품 전체를 바라보는 눈이 되었고, 다른 배우를 가르친 시간은 연기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 되었다.
KBS2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 이어 영화 <경주기행>에서도 이정은의 딸을 연기한 공효진은 그를 '모범생 배우'라고 부른다. 자신이 맡은 역할을 정확히 이해하고, 준비한 것을 현장에서 남김없이 쏟아내는 배우라는 뜻이 아닐까. 이정은은 연기뿐 아니라 자신이 거쳐온 어떤 경험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았다.
하나의 경험이 끝난 자리에서 전혀 다른 경험이 시작됐다. 그것들은 돌고 돌아 다시 연기로 이어졌다. 어떤 경험이 어디에 쓰일지는 그것을 하는 순간에는 알 수 없다. 다만 직접 해본 것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배우 이정은의 삶을 보고 있으면 그 평범한 사실을 새삼 믿게 된다. 그의 인생에는 연기가 아니었던 시간도 많았다. 다만 그 시간마저 돌고 돌아 모두 연기가 되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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