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로 배를 찌르고 의사마저 거부한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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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서구에서 자살을 죄악과 처벌 대상으로 규정했다면, 고대사회는 상당히 다른 태도가 나타났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화가 장 폴 로렌스(1838~1921)의 <카토의 죽음>은 분위기만으로 그 다른 태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카토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카이사르는 비탄에 젖어 마음이 착잡하기 짝이 없었다. "오, 카토여! 그대가 자살한 것은 원통하오. 그대는 내 용서를 받고 살아남기를 원통하게 생각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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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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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 폴 로렌스 <카토의 죽음> 1863년 |
| ⓒ 퍼블릭 도메인 |
영웅적 저항으로서의 자살
주인공은 기원전 1세기의 로마 정치인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다. 스토아 철학을 신봉하며 항상 검소하게 살았다. 호민관이자 원로원 의원으로서 집정관 키케로와 함께 공화정을 수호하는 데에 앞장섰다. 공화정을 무너뜨리려 하는 카이사르의 군사적 도발로 내전이 벌어졌을 때 이에 대립하는 폼페이우스 진영에 합류했다.
폼페이우스가 패배하고 이집트로 도주한 후에도 카토는 일부 부대를 이끌고 북아프리카의 우티카를 거점으로 저항을 이어갔다. 전세가 비관적으로 흐르고, 병사들도 저항을 거부하자 관저에서 자살했다. 로마 철학자 플루타르코스의 <플루타르크 영웅전>에 관련 이야기가 몇 군데 나온다. 카이사르를 다루는 대목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카이사르는 카토를 생포하고자 하는 명예심에서 우티카로 진격했다. 그러나 카토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카이사르는 비탄에 젖어 마음이 착잡하기 짝이 없었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 카토여! 그대가 자살한 것은 원통하오. 그대는 내 용서를 받고 살아남기를 원통하게 생각했으니까."
카이사르가 "그대는 내 용서를 받고 살아남기를 원통하게 생각"했다고 언급한 이유가 있다. 카이사르의 사면을 전제로 한 투항 요구를 거부하고 자살을 택했다. 함께 저항하던 사람들에게는 투항하라고 권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관용을 입으면 나보다 카이사르가 우위에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게 된다"라며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카이사르에 정면으로 저항해왔고 마지막까지 싸웠던 자신이 항복하여 사면을 받음으로써 로마 시민들 사이에 카이사르의 관대함을 칭송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독재를 정당화하는 정치적 선전 도구로 전락하는 상황을 거부한 것이다. 자살 전에 지인들과 만찬을 하며, 소크라테스가 그러했듯이 자신에게 정직한 사람은 죽어서도 자유롭다는 주장을 펼쳤다.
방에 혼자 있을 때 칼로 자기 배를 찔렀다. 그림을 보면 망설이는 기색이 없다. 주저하지 않고 결행했으리라는 느낌을 준다. 죽음을 앞둔 사람의 표정으로 보이지 않는다. 단단히 각오를 다졌어도 죽음 앞에서는 흔들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두려움보다는 담담함이 묻어난다. 궁지에 몰린 사람의 초조함보다는 위기 상황에서도 당당한 영웅의 풍모를 풍긴다.
방안의 광경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총독 신분과 달리 화려한 가구나 장식 없이 소박하다. 검소함으로 자족하는 삶을 추구하던 스토아 철학자의 풍모를 나타낸다. 이는 카토가 강조한 자유와도 맞물려 있다. 스토아 철학은 물질적 욕망을 줄이며 절제하는 삶을 살 때, 가난이나 결핍에 두려워하지 않고 외부 환경에 휘둘리지 않는 자유를 체현할 수 있다고 여겼다. 화가는 카토의 자살을 이러한 자유정신의 하나로 다룬 듯하다.
칼로 배를 찌른 이후의 상황도 영웅적 행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음을 들은 가족들이 뛰어 들어와 다급하게 의사를 불렀다.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의사가 빠져나온 창자를 제자리에 넣고 상처를 꿰매려 했다. 하지만 카토는 의사를 밀쳐낸 후 자기 손으로 창자를 끄집어내어 죽음에 이르렀다. 극적인 효과를 중시한 바로크 화가들은 이 처절한 장면을 주로 묘사했다.
가부장제와 도덕률 수호로서의 여성 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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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에르 미냐르 <포샤의 죽음> 17세기 / 귀도 레니 <루크레티아> 1627년 |
| ⓒ 퍼블릭 도메인 |
브루투스를 비롯한 공화파 의원들은 기원전 44년 카이사르 암살에 성공했다. 이후 옥타비아누스를 중심으로 한 카이사르 추종 세력과 브루투스가 포함된 공화정 지지 세력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다. 내전에 패배하며 남편이 죽을 위기에 처하자, 그의 안위를 극도로 걱정하다가 헌신의 증명으로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로렌스 그림의 카토처럼, <포샤의 죽음>에서 그녀의 눈은 마지막 순간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다. 위로 향하는 눈길은 종교화에서 신을 향한 믿음을 담은 순교자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칼이나 올가미처럼 자살을 떠올리게 하는 도구가 보이지 않아 의아스럽다.
집게를 이용해 든 붉은 무언가가 끔찍한 마지막을 전해준다. 플루타르코스는 "그녀는 불에서 타오르는 숯을 집어삼키고 입을 꽉 다문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라는 기록을 전한다. 그는 이 죽음의 방식에 의문을 품었지만, 대다수 역사가가 서술한 바를 소개한다.
키케로가 브루투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슬픔을 위로하며 포샤를 "세상에 전례 없는 여인"이라고 한 점을 고려할 때, 적어도 남편을 걱정하며 자살로 생을 마쳤고 로마인들이 칭송의 태도를 지녔음은 분명해 보인다. 영국 극작가 셰익스피어도 <줄리어스 시저>에서 이글거리는 숯불을 삼켜 목숨을 끊는 방식으로 포샤의 비극적인 최후를 묘사했다.
이탈리아 화가 귀도 레니(1575~1642)의 <루크레티아>는 정절을 침해당한 여자가 명예를 지키기 위해 선택한 자살을 다룬다. 칼을 들어 자기 가슴을 찌르려는 순간이다. 포샤와 마찬가지로 순교자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한쪽 옷이 열려 가슴이 드러나 있고 뒤로는 흐트러진 침대가 보여서 그녀가 겪은 치욕스러운 경험을 알려준다.
루크레티아는 기원전 510년에 폭정을 일삼던 로마 타르퀴니우스 왕정의 왕자 섹스투스에게 굴욕을 겪은 뒤 목숨을 끊었다.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 소설가 조반니 보카치오의 <유명한 여자들>에 비교적 자세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섹스투스가 남편의 친척이기도 해서 그녀는 정중하고 친절하게 맞았다. 흑심을 품고 몸을 범하려 들자 거부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하지만 왕자는 남자 하인과 간통해서 두 사람을 죽였다는 소문을 내겠다고 위협하며 강제로 욕망을 채웠다. 악몽 같은 밤이 지나고 난 후 그녀는 아버지·남편·친척을 전부 불러 모았다.
옷 속에 숨겨 놓았던 칼을 빼 들고 말했다. "비록 내 죄가 사면되었다 할지라도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나의 본보기 때문에 어떤 여성도 치욕스럽게 살지 않을 것입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칼을 가슴에 꽂았다. 보카치오는 이 행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그녀의 순결함은 그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의 불명예에 대해 그처럼 가혹하게 속죄했다는 것은 아무리 칭찬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녀의 행동은 방탕한 젊은이들이 추잡한 범죄로 파괴했던 명성을 회복했을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로마를 자유로 이끌었다."
자살 방식으로 순결한 마음을 입증하고 명예를 지키려 한 행위를 "아무리 칭찬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며 옹호한다. 나아가 자살을 통해 로마를 자유로 이끌었다고 한다. 개인적인 명예의 회복만이 아니라 나라를 구하는 데 큰 영향을 준 행위로 규정한다.
타르퀴니우스는 이전 왕을 살해하고 권력을 차지했다. 반대파를 처형하고 원로원을 무력화했으며, 백성을 가혹한 강제 노역에 동원하는 등 시민들의 권리를 무참히 짓밟았다. 섹스투스 왕자도 폭군인 아버지 못지않게 난폭하게 권력을 휘둘렀다. 평민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지만, 독재자의 무자비한 폭력에 눌려 신음만 할 뿐이었다.
왕자의 루크레티아 능욕 사건이 벌어지고, 자살로 명예를 지켰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로마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녀의 행위가 용기를 불러일으켰고, 민중의 불만이 분노로 급변하여 봉기가 일어났다. 보카치오는 그녀의 비극적인 죽음이 왕정을 무너뜨리고 기원전 509년 로마 공화정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여겼기에 로마를 자유로 이끌었다고 한 것이다.
이처럼 로마에서 모든 자살이 죄악으로 치부되지는 않았다. 때에 따라 국가를 수호하고 명예를 지키는 숭고한 행위로 인정됐다. 역사가들은 애국이나 명예를 명분으로 한 자살을 고결함을 나타내는 징표로, 본받아야 할 교훈으로 삼았다. 하지만 노예의 자살은 노동력 약화로 사회에 해악을 주는 행위로, 군인·범죄자의 자살은 책임을 저버리는 짓으로 비난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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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타가와 구니카즈 <할복> 19세기 |
| ⓒ 퍼블릭 도메인 |
건장한 체격의 무사가 상체를 벗어 젖힌 상태에서 배에 칼을 대고 찌르는 중이다. 단숨에 생명을 끊기 위해, 복부의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가르는 자세를 취한다. 흰 천을 두른 칼날 중간을 잡은 것도 이를 수월하게 하려는 의도다. 단호한 결의를 보이려는 듯 입을 굳게 다문 모습이다. 앞에는 할복의 사유 혹은 유언을 적은 것으로 보이는 종이가 놓여 있다.
자살하는 당사자나 일본인의 사고방식에 숭고한 결단으로 자리 잡았기에 엄격한 의식 절차가 생겼다. 보통은 증인과 보조자가 참석한 가운데 '의식'을 치른다. 정성을 다하는 마음을 위해 목욕으로 몸을 청결하게 한다. 사무라이 복장을 정식으로 갖추고 단정한 머리 모양을 해야 한다. 칼날을 흰 종이나 천으로 감싸 쥐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배를 가른다. 마지막으로 고통이 오래가지 않도록 대기하던 보조자가 신속하게 목을 잘라준다.
할복은 여러 측면에서 무사의 자부심이었다. 먼저 주군에게 자신의 결백이나 충성심을 증명하는 수단이었다. 일본인들이 영혼과 진심이 담겨 있다고 믿는 배를 가름으로써 진정성을 증명하는 의미가 있었다. 다음으로 주군의 죽음이나 전쟁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는 숭고한 속죄 수단이었다. 나아가서는 적에게 포로로 잡혀 치욕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기보다는 할복하는 게 무사도의 윤리였다.
역사적으로 1873년에 공식적으로 할복이 금지되었으나 이후에도 정신적인 유산으로 이어지면서 종종 유사한 사례가 생겨났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일본이 미군 함대에 대한 타격을 목적으로 조직한 가미카제 특공대도 그 일환이다. 전세가 불리해지고 제공권을 상실하자, 전투기를 조종하여 미군 함정에 직접 충돌하는 자살 폭탄 방식으로 맞섰다. 가미카제가 '신이 일으키는 바람'이라는 뜻이라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영웅적인 행위로 인식되었다.
가미카제 특공대를 만든 해군 군령부 차장은 패전 후 할복한 뒤 고통 끝에 15시간 만에 사망했다. 연합군에 항복할 때 일본 육군 대신은 "패전의 책임을 죽음으로 사죄한다"라며 할복했다. 1970년에는 극우 사상에 경도된 일본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가 자위대원들에게 쿠데타를 일으키도록 촉구하며 자위대 총감실에서 할복한 사건이 충격을 주었다. 일본의 보수 우익 세력에게는 이 모든 자살 행위가 여전히 애국적·영웅적 행위로 통하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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