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를 콧수염에 앉힌 이 화가, 곤충 매니아랍니다 [ 단칼에 끝내는 곤충기]

이상헌 2026. 9. 11.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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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욱시스(Zeuxis)의 포도 그림은 진짜와 같았다. 새들이 포도를 쪼아먹기 위해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제욱시스는 파르하시우스(Parrhasius)를 찾아가 벽에 걸린 커튼을 치우고 작품을 보여달라고 청했다. 순간, 커튼 자체가 그림이었음을 알아챈 제욱시스는 '내가 비록 새를 속였지만 파르하시우스는 화가인 나를 속였다'며 탄복했다."

뒤를 이어 나비가 30여 점, 파리가 10여 점이다.

회중시계와 짝을 이루며 녹아내리는 시계에는 트롱프뢰유 파리가 앉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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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롱프뢰유 기법과 살바도르 달리

[이상헌 기자]

착시를 일으키는 트롱프뢰유(trompe-l'œil)는 인간의 역사와 함께해온 눈속임 그림이다. 기원전 그리스의 화가들은 트롱프뢰유로 자신의 기량을 한껏 뽐냈다. 다음은 플리니우스(Gaius Plinius Secundus)가 쓴 <자연사(Naturalis Historia)>에 나오는 얘기다.

"제욱시스(Zeuxis)의 포도 그림은 진짜와 같았다. 새들이 포도를 쪼아먹기 위해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제욱시스는 파르하시우스(Parrhasius)를 찾아가 벽에 걸린 커튼을 치우고 작품을 보여달라고 청했다. 순간, 커튼 자체가 그림이었음을 알아챈 제욱시스는 '내가 비록 새를 속였지만 파르하시우스는 화가인 나를 속였다'며 탄복했다."
▲ 카르투시오회 회원의 초상(Portrait of a Carthusian). 트롱프뢰유 기법으로 그린 파리가 액자에 앉은듯 보인다.
ⓒ 퍼블릭도메인(The MET 공개)
16세기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의 <미술가 열전>에도 트롱프뢰유가 등장한다. 조토 디 본디네(Giotto di Bondone)는 스승 치마부에(Cimabue)가 잠시 화실을 비운 사이에 장난을 쳤다. 스승이 그리던 인물의 코 위에 극도로 정교한 파리 한 마리를 그려 넣었다. 돌아온 치마부에는 파리를 쫓으려고 손을 내저었다가 조토의 천재성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렇게 조토와 치마부에는 르네상스 회화의 문을 열었다.

주검에 꼬이지만 파리와 개미는 전혀 달라

20세기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는 트롱프뢰유 기법을 자기 입맛에 맞춰 적극 활용했다. 그의 작품 중 다수가 곤충의 은유로 채워져 있다. 달리에게 곤충은 공포의 대상이자 거부할 수 없는 매혹적인 존재였다.

2013년 미국곤충학회가 발행하는 학술지에 달리의 그림을 다룬 논문(Surreal Entomology)이 실렸다. 예술가(Smith)와 미술사학자(Mader), 곤충학자(Kritsky)가 협업하여 1176점의 달리 작품을 조사했다. 그 결과 111점의 그림에서 여러 곤충들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가장 많이 나온 대상은 개미로서 50여 작품에 담겼다. 뒤를 이어 나비가 30여 점, 파리가 10여 점이다.

초기 대표작인 <기억의 지속(The Persistence of Memory)>에는 착시와 환영이 정교하게 어울려있다. 좌하단의 회중시계 위에 방사형으로 몰려있는 개미는 시침과 분침처럼 보인다. 조금 떨어져서 보면 살갗이 썩어 들어가면서 구멍이 슬슬 뚫리고 있는 듯 느껴진다.

달리에게 개미는 죽음과 부패를 뜻한다. 아울러 시간을 갉아먹는 개미는 존재의 유한성을 상징한다. 다섯 살 무렵, 곤충을 모으던 달리는 총에 맞은 박쥐를 선물로 받고서 정신없이 키스를 퍼부었다. 이튿날 박쥐의 주검에서 우글대던 개미를 보자마자 매혹은 맹렬한 거부감으로 탈바꿈했다. 달리는 아내 갈라와의 첫 만남에서도 죽음과 덧없음을 보았다. 그미의 살갗에 수천 마리의 개미가 뒤덮이는 환상을 봤다고 자서전에 적었으니 말이다.
▲ 짝짓기하는 쉬파리. 달리에게 파리는 영감의 요정이었다.
ⓒ 이상헌
회중시계와 짝을 이루며 녹아내리는 시계에는 트롱프뢰유 파리가 앉아있다. 달리에게 파리는 영감의 요정이었다. 그는 긴 콧수염에 젤을 발라 뻣뻣하게 만들어 꿀을 묻혀서 파리를 앉혔다(<달리의 콧수염> 사진첩에 실린 사진 중 하나). 달리가 파리를 좋아한 이유는 스페인 지로나에서 열리는 '성 나르시소' 축제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그 옛날 프랑스군이 지로나를 침략했을 때, 나르시소의 무덤에서 파리떼가 쏟아져 나와 적을 죽게 만들었다는 전설이다. 해마다 10월 29일이면 달리의 고향 지로나 거리는 파리 조형물로 뒤덮인다.

편집증적인 파리의 군주

달리에게 변태(탈바꿈)는 르네상스(부활)의 또 다른 말이었다. 탈바꿈은 '원래의 피부를 다시 만드는' 마법이었고 흉내냄(의태)은 달리의 붓질에서 핵심적인 요소였다. 달리는 "자연의 가장 미스터리하고 마법 같은 비밀"이 의태라고 생각했다.

달리는 자기식의 트롱프뢰유를 통해 한 화면에 다중 현실을 심었다. 후기의 대표작 <환각적인 투우사(The Hallucinogenic Toreador)>는 꿈의 세계와 현실을 블렌딩하여 또 하나의 관능적인 형상을 만들어낸다. 가까이서 보면 비너스가 나란히 그려져 있으나 떨어져서 보면 투우사의 얼굴이 크게 보여진다.

왼쪽 모서리에는 피를 흥건히 흘리며 죽어가는 황소가 보인다. 칼 꽂힌 어깨 위로는 알록달록한 스팟과 파리떼가 어울려 투우사의 화려한 복장을 연상케한다. 마법처럼 핏물에서 날개돋이 한 파리들은 굴렁쇠를 든 어린 투우사에게 머리를 조아린다. 세일러복을 입은 소년 투우사는 편집증적으로 곤충을 화폭에 담은 달리 자신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달 후 운영중인 홈(www.daankal.com)에도 실립니다. 해당 기사의 사진은 <풀벌레 이야기 도감>의 일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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