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사라져도 AI 남아”...‘이기적 유전자’ 저자 충격 경고
튜링테스트 넘은 AI...“의식 있을 수도”
“인류 사라져도 AI가 문명 횃불 이을 것”
‘이기적 유전자’ 출간 50주년을 맞아 방한한 세계적 석학 리처드 도킨스 옥스퍼드대 명예교수가 인공지능(AI) 혁명과 과학의 본질에 대해 깊이 있는 통찰을 내놨다.
매경미디어 주최 세계지식포럼에서 도킨스 교수는 유전자 중심의 진화론부터 AI의 의식 문제, 과학 커뮤니케이션의 올바른 태도, 그리고 생명의 기원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주제를 넘나들며 청중을 사로잡았다.
도킨스 교수는 대표작 ‘이기적 유전자’의 한국어판 판매량이 전 세계 40여개 번역본 가운데 가장 많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매우 기쁘고 영광스럽다고 말문을 열었다. 왜 한국에서 유독 많은 사랑을 받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한국 독자들의 뜨거운 지적 열정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출간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자신의 핵심 테마는 확고하다고 그는 강조했다. 자연선택의 기본 단위는 생물 개체나 종이 아닌 유전자라는 사실은 흔들리지 않는 진리라는 것이다. 그는 “생명체는 정교하게 프로그램된 생존 기계일 뿐이며, 결국 모든 생명 현상은 유전자의 생존이라는 단 하나의 원리로 압축된다”고 설명했다.
도킨스 교수는 향후 50년 뒤 ‘이기적 유전자’가 100주년을 맞이하더라도 이런 근본적인 메시지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50년간 배아 발생이나 유전자 조절에 관한 세부적 메커니즘은 비약적으로 밝혀졌지만 다윈주의적(살아남은 생물이 자기 유전자를 더 많이 남긴다는 자연 선택 법칙) 본질은 그대로라는 평가다.
이번 대담의 핵심 화두는 단연 AI였다. 도킨스 교수는 AI 발전이 진화생물학의 연구 방식을 완전히 뒤흔들고 있다고 진단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구글 딥마인드의 ‘알파폴드’를 꼽았다. 단백질은 생명의 실행 단위이자 효소 작용을 통해 유전자의 생존을 결정짓는데, 과거 수십 년 동안 엑스선 결정학으로 막대한 노력을 들여야 했던 3차원 입체 구조 규명을 AI는 아미노산 1차원 서열만으로 순식간에 정확히 예측해냈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그는 이를 의학, 농업 등 모든 영역을 혁명적으로 바꿀 놀라운 도약이라고 격찬했다.

인간의 문화적 창조물을 집어삼키는 AI의 발전 속도를 두고 그는 생명 역사의 중대한 분기점을 떠올렸다. 원시 생명의 탄생, 진핵세포의 출현, 다세포 생물화, 신경계와 언어의 탄생, 인쇄술과 인터넷 발명에 이어 오늘날의 AI는 지능의 진화 경로를 완전히 바꿀 거대한 혁신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영국 왕립 천문학자 마틴 리스의 견해를 빌려 훗날 인류가 외계 문명을 조우한다면 그것은 유기체 생명체가 아니라 그들이 남긴 AI 창조물일 가능성이 높으며, 인류 문명이 사라진 뒤에도 우리가 남긴 AI가 인간 문화의 횃불을 이어받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도킨스 교수는 자신이 현재 집필 중인 공상과학(SF) 소설 초고를 AI에 입력했을 때를 예로 들었다. 불과 5초 만에 글을 읽어낸 AI는 등장인물의 복합적인 심리와 상호작용의 뉘앙스를 정확히 짚어내며 일류 문학교수 수준의 날카롭고 섬세한 비평을 내놨다고 밝혔다.

AI와 기술 발전이 가져올 위험성도 경고했다. 인간을 불필요한 존재로 밀어내거나 사회를 통제할 가능성에 대해 많은 이들이 우려하는 것은 타당하며, 인류가 급격한 변혁의 문턱에 선 만큼 공존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짚었다. 아울러 국가 간 기술 패권 경쟁이 격화되면서 과학계의 핵심 동력인 국제적 협력이 훼손되는 흐름을 경계했다. 경쟁이 연구의 기폭제가 되기도 하지만 왓슨과 크릭의 DNA 구조 발견처럼 현대 과학의 위대한 도약은 국경을 초월한 팀워크와 데이터 공유에서 비롯됐다며, 경쟁보다는 협력의 가치를 지켜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최초의 생명은 어떻게 태동했을까. 도킨스 교수는 이에 대한 가장 유력하고 합리적인 모델로 ‘RNA 세계(RNA World) 가설’을 제시했다. 현대 생물학은 근본적인 딜레마에 직면해 있다. DNA는 유전 정보를 복제하는 능력이 탁월하지만, 스스로 복제하지 못하고 반드시 단백질 효소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 반면 단백질은 뛰어난 화학적 촉매 역할을 수행하지만 스스로 복제할 수 있는 정보 저장 능력이 없다.
쉽게 말해 이런 거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진퇴양난의 딜레마 말이다. 생명의 시작도 딱 그 꼴이었다. 설계도(DNA)가 있으려면 일꾼(단백질)이 필요하고, 일꾼이 만들어지려면 설계도가 있어야 하니 시작조차 못 하는 막다른 골목, 즉 도킨스 교수의 표현대로 전형적인 ‘캐치-22(Catch-22)’ 상황에 갇혀버렸다.

도킨스 교수는 생명의 기원을 설명하며 현대 생물학의 최대 난제를 이렇게 짚었다.
“DNA는 복제를 기막히게 잘하지만 이를 수행하려면 단백질 효소가 반드시 필요하다. 반면 단백질은 화학 반응을 돕는 효소 역할은 기가 막히게 하지만 스스로를 복제하지는 못한다. 그런데 RNA는 복제자이자 효소라는 두 가지 역할을 혼자서 다 해낼 수 있다. 최고 수준의 복제자나 최고 수준의 효소는 아닐지 몰라도, 두 기능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이 핵심이다.”
보통 DNA는 설계도 역할만 하고 단백질은 현장 일만 한다. 그런데 RNA는 참 묘한 물질이다. 설계도처럼 유전 정보를 담아 복제도 하면서, 일꾼처럼 화학 반응까지 일으키는 재주를 혼자 다 갖췄다. 비유하자면 일류 전문가는 아닐지언정, 혼자서 도면도 그리고 망치질도 다 해내는 ‘만능 멀티플레이어’였던 셈이다.
도킨스 교수는 태초의 지구에 이 다재다능한 RNA가 먼저 나타나 생명의 문을 열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원시 지구에서 처음 등장한 복제자는 DNA가 아니라 RNA였을 가능성이 높다. RNA가 복제와 촉매 역할을 둘 다 도맡아 하다가, 이후 진화 과정에서 DNA가 복제 역할을 넘겨받고 단백질이 촉매 역할을 넘겨받으며 주도권을 쥐게 됐다.”
시간이 흐르면서 “설계도는 더 안정적인 DNA 네가 전담하고, 궂은일은 효율 좋은 단백질 네가 맡아라” 하는 식의 분업화가 이뤄졌고, 그 결과 지금의 정교한 생명 시스템이 안착했다는 얘기다.
물론 수십억 년 전 일이라 당시의 직접적인 물증을 찾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도킨스 교수 역시 “너무 오래전 일이라 직접적인 증거를 얻기는 어렵겠지만, 컴퓨터와 AI를 통해 ‘당시엔 분명 이랬을 것’이라는 타당한 화학 모델을 구축해나갈 수는 있다”고 짚었다.
멸종된 인류 종인 호모 에렉투스를 현대로 부활시키려는 젊은 여성 과학자의 고투를 다룬 이야기라고 소개한 그는 “소설 속 주인공이 자신의 연애 고민을 미래형 AI 상담사에게 털어놓는 장면 등을 통해 AI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문학적으로 풀어내고 있다”고 전했다. 한국 독자들의 뜨거운 사랑에 보답하듯 이런 소설 역시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한국어로 번역되길 기대한다고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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