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지금 역적의 집에 오셨습니다"

이국언 2026. 9. 9.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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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는 670미터 일림산 줄기가 병풍처럼 마을을 감싸고 있고, 앞으로는 남쪽 득량만 푸른 바다가 호수처럼 펼쳐져 있었다.

"여순사건 때 이 집 남자들은 서대문 구치소나 산속에 있거나 보성경찰서에 갇혀 있었습니다. 여자들만 있는데 군경이 이 집은 못된 집이다 해서 불을 다 질러 버려요.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 정해두를 비롯해 정종일, 정해평 등. 그날 하루 이 마을 정씨 집 다섯 집이 불에 탔어요."

"'네 이놈들! 죄를 지었으면 사람이 지었지 이 집을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 집을 불태우려 하느냐. 너희들은 조상도 없느냐?'고 호통을 치자 그때서야 멈췄죠. 할머니가 이 집을 살린 거죠. 이 감나무에 지금도 흔적이 남아 있어요."

정길상 선생에 의하면 터를 잡은 지는 400여 년, 지금의 집은 130여 년 전 초가집을 헐고 새로 지은 뒤 중건한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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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행] 봉강 정해룡 생가에서 되살아나는 격동의 현대사

[이국언 기자]

 보성 회천면 봉강리 일림산 자락에 자리한 봉강 정해룡 고택.
ⓒ 도서출판 길
뒤로는 670미터 일림산 줄기가 병풍처럼 마을을 감싸고 있고, 앞으로는 남쪽 득량만 푸른 바다가 호수처럼 펼쳐져 있었다.

김민환 소설 <큰 새는 바람을 거슬러 난다>에는 이곳을 두고 "옛적 도선국사가 그 터를 일러 신령스러운 거북이가 바다로 내려가는 영구하해의 길지라고 했다는 소문이 세세로 이어졌다"고 표현돼 있다. 풍수에 문외한인 사람들도 이 풍경 앞에서는 한 번쯤 고개를 끄덕일 만하다.

격동의 현대사를 거치며 비운의 삶을 살다 간 한 인물이 입에서 입으로 뒤늦게 재조명되고 있다. 주인공은 봉강 정해룡(1913~1969)이다. 절판됐던 김민환의 소설 <큰 새는 바람을 거슬러 난다>가 올해 개정판으로 다시 출간되면서 저자를 찾는 자리가 늘어나는가 하면, 전남 보성 회천면 봉강리 생가를 찾는 발길도 이어지고 있다.
 '시대의 품격, 봉강 정해룡의 길을 가다' 역사기행에 참가한 방문단이 정길상 선생으로부터 예전 수력발전 시설이 있던 곳의 설명을 듣고 있다. 일림산 계곡에서 흘러 내려온 맑은 물이 눈에 띈다.
ⓒ 이국언
"여러분은 지금 역적의 집에 오셨습니다"

지난 5일 '시대의 품격, 봉강 정해룡의 길을 걷다'라는 이름으로 마련된 역사기행에는 어린아이부터 70대 어르신까지 40여 명이 참여했다. 이른 아침부터 광주와 목포, 화순에서 길을 나선 사람들이다.

일행을 맞은 이는 정해룡의 막내아들 정길상(80) 선생이었다.

"여러분은 지금 역적의 집에 오셨습니다."

정길상 선생은 자신이 7년형을 받고 옥살이를 한 뒤 1988년 만기 출소했을 때를 떠올렸다. 집은 비가 새고 천장이 뚫려 하늘이 훤히 내다보일 정도였다고 한다. 집안에 수천 점의 서첩이 있었지만 '간첩 집안'이라는 소문 때문에 도둑조차 무서워 얼씬거리지 않았다고. 역설적으로 그것이 대대로 내려온 귀중한 문서들이 온전히 남는 데 도움이 됐다.

한때 끼니마다 밥을 먹는 노속(奴屬)이나 일꾼이 100명가량 됐다고 해서 '백구가(百口家)'로 불렸다는 집이었다. 대지주였던 집안은 일제강점기 양정원 설립을 후원하며 민족교육에 힘을 보탰고, 해방 이후에는 노속들에게 토지를 나눠주었다고 한다. 집안의 재산은 그렇게 하나둘 줄어들었고, 봉강의 말년에는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형편이 기울었다.

특히 봉강이 죽은 지 12년 뒤인 1981년 이른바 '보성 가족간첩단' 사건이 터지면서 부와 명예를 자랑하던 집안은 풍비박산 났다. 여러 친인척이 줄줄이 연행됐고, 봉강의 아들 정춘상은 1985 사형이 집행됐다.
 봉강 정해룡. 굴곡진 한국 현대사에서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모진 시련 속에 비운의 삶을 살았다.
ⓒ 도서출판 길 제공
'역사의 죄인이 되지 마라'는 가훈

정길상 선생의 이야기는 400년을 거슬러 올라가 역사와 맞닿아 있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충무공 이순신과 반곡 정경달, 명량대첩과 명나라 진린 제독, 장흥 출신 마하수 5부자까지.

영광 정씨 사평공파는 전란 때마다 나라의 운명과 함께했다. 반곡 정경달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종사관으로 활동했고,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됐다.

혹자는 3000석 지기라면 당연히 가난한 소작인들의 허리를 쥐어짜거나 기근을 이용해 재산을 불린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갖기 마련이다.

"이 집 재산 형성 과정에 이만치도 티끌은 없습니다."

예전의 부와 명성은 온데간데없고 멸문지화까지 당했지만, 나라의 운명과 함께해왔다는 가문의 자부심은 아직 짱짱하다. '역사의 죄인이 되지 마라'는 가훈이 말해주듯 애족애민 정신은 대대로 이 집안의 유전자가 되었다.
 여순사건과 한국전쟁 시기 좌우 대립의 현장을 지켜 본 감나무. 군경이 '빨갱이' 집이라며 불을 질렀을때 이 감나무도 화를 입었다.
ⓒ 이국언
미군정-한국전쟁 격변기 거치며 모진 시련

하지만 대대로 내려오던 전통과 세계관은 해방 후 격변의 시기를 거치면서 크게 충돌했다.

"여순사건 때 이 집 남자들은 서대문 구치소나 산속에 있거나 보성경찰서에 갇혀 있었습니다. 여자들만 있는데 군경이 이 집은 못된 집이다 해서 불을 다 질러 버려요.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 정해두를 비롯해 정종일, 정해평 등. 그날 하루 이 마을 정씨 집 다섯 집이 불에 탔어요."

봉강의 조부 정각수가 과거를 포기하고 후학들을 가르치기 위해 지은 삼의당도 이때 잿더미가 됐다. 사랑채와 행랑채가 타들어 가고, 심은 지 100년 된 마당 감나무에도 불이 옮겨 붙었다. 아랫마을에 피신해 있던 봉강의 어머니 윤초평 여사가 불길에 휩싸인 집을 보고 달려왔다. 불길은 사당으로 옮겨 붙을 기세였다.

"'네 이놈들! 죄를 지었으면 사람이 지었지 이 집을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 집을 불태우려 하느냐. 너희들은 조상도 없느냐?'고 호통을 치자 그때서야 멈췄죠. 할머니가 이 집을 살린 거죠. 이 감나무에 지금도 흔적이 남아 있어요."

마당 한쪽에는 산줄기에서 흘러 내려온 물이 샘을 이룬 뒤 사랑채 연못으로 흘러가고, 또 다른 물줄기는 행랑채로 흘러가도록 돼 있었다.

"이 물로 생활용수를 씁니다. 사철 마른 적이 없습니다. 670m 일림산 계곡에서 내려온 물이어서 우리도 지금 이 물을 먹습니다. 이 물로 빨래도 하고 밥도 짓고."
 4대 선영을 모신 제각 앞에 수령 몇 백년이 되어 보이는 고사된 동백나무가 서 있다. 그 옆에 새로운 후계목이 심어져 있다.
ⓒ 이국언
안채 옆 사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수호신처럼 버티고 있는 동백나무 한 그루. 족히 몇백 년은 되어 보인다.

"사당을 지키는 문지기입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이 나무는 죽고 말았다. 고택을 지키고 있는 정길상 선생은 나무를 살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운 듯했다.
 정해룡 고택 뒤뜰에서 본 지붕 구조. 겹집인데 양쪽 날개가 마당 쪽이 아니라 뒤로 배치돼 있다.
ⓒ 김용재
"겹집인데, 이 집은 날개를 뒤로 배치했어요"

큰 집이었다. 정길상 선생에 의하면 터를 잡은 지는 400여 년, 지금의 집은 130여 년 전 초가집을 헐고 새로 지은 뒤 중건한 집이다. 안채는 7칸. 집을 받치고 있는 기둥 가운데 일부는 사각기둥 대신 둥근 두리기둥이었다.

경사진 언덕 사면을 따라 안채 뒤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크고 작은 장독대가 놓인 뒤꼍은 꽤 넓었다. 또 하나의 독립적인 살림 공간이었다.

눈 밝은 사람들은 그때서야 이 집 구조가 뭔가 특이하다는 걸 느낀다. 'ㄷ'자 형태의 겹집이었다. 앞에서 보면 '一'자 집으로 보여 쉽게 알아채기 어렵다.

"겹집 있는 집은 보통 지붕 날개를 앞으로 빼는데, 이 집은 뒤로 배치했어요. 과시하거나 위용을 자랑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겸양이었던 것이죠."

고개를 들어보니 지붕 너머 햇빛에 반사되는 득량만 율포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지척이었다.
 삼의당에서 설명을 듣고 있는 역사기행 참가자들. 정해룡의 조부 정각수가 후학을 양성하기 위한 지은 곳. 월북한 정해진이 1965년 이곳으로 찾아왔다.
ⓒ 김용재
삼의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과거를 보러 간다는 봉강의 조부 정각수는 발길을 돌려 보름 만에 돌아왔다.

"가는 도중에 매관매직이 성하고 관료사회가 부패하다는 소리를 들었던가 봐요. 혼탁한 세상에 급제한다 한들 그 속에 있게 될 텐데 그러면 선조에게 뵐 면목이 없다며 돌아와 버려요."

삼의당은 마을 서당이자 청년들의 사랑방이었다. 하지만 남북이 갈라져 체제 대결을 벌이던 시대에 이곳은 정씨 집안을 파국의 길로 내몬 장소이기도 했다.

봉강의 동생 정해진은 두 아들을 고향 보성에 둔 채 월북했다. 이후 북한에서 대남사업에 관여했던 그는 1965년과 1967년 보성을 찾아왔다. 사람들 눈길을 피해 비밀리에 정해룡을 만난 장소가 바로 삼의당이었다. 마루에 앉았다. 이곳에서도 남쪽 바다의 잔잔한 물결이 한눈에 들어왔다.
 거북정 안에 연못. 한반도 형태가 담겨 있다. 정길상 선생이 손으로 짚어가며 각각의 위치를 설명하고 있다.
ⓒ 이국언
한반도 형상 연못에 백두산 부터 독도까지

정해룡이 주로 기거했던 사랑채로 옮기자 또 하나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이게 우리나라 지도입니다. 저 위 백두산 천지에서 물이 흐릅니다. 여기가 금강산, 이 돌이 지리산, 저기가 독도고, 여기가 제주도인데, 백두산에서 흐른 물이 제주도로 흘러 내려가고 있습니다."

정길상 선생은 손가락으로 하나씩 가리키며 설명했다. 한반도 지형의 연못은 동쪽은 높고 서해가 있는 서쪽은 완만하게 낮게 설계돼 있었다. 정해룡이 조성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여러분이 서 있는 곳이 거북이 등입니다. 거북이 발이 연못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정(龜亭), 거북정이라고 합니다."
 거북정 정원에 우뚝 서 있는 소나무가 예사롭지 않다. 바위를 두 조각으로 쪼개 뚫고 나온 뒤 용이 승천하듯 하늘로 비상하고 있는 형상의 소나무.
ⓒ 이경훈
갖가지 잘 가꿔진 정원수 중에서도 유독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흡사 용이 허리를 비틀어 하늘로 솟구치는 것 같은 소나무 한 그루. 더 신기한 것은 단단한 바위 한가운데를 뚫고 우뚝 솟아 있다는 점이었다.

"어렸을 적에 줄기가 팔뚝만 했는데, 철모르는 우리가 소나무를 잡고 흔들면 아버지가 부리나케 쫓아왔어요. 그런데 그 작은 소나무가 크면서 바위를 둘로 쪼개 버렸어요. 봉강은 우리 민족도 외세의 간섭을 뚫고 언젠가는 활짝 꽃필 날 있을 것이라며 이 소나무를 애지중지하셨습니다."

노선은 달랐지만 목표는 같아
 ‘역사의 죄인이 되지 마라’(勿爲歷史罪人)는 가훈이 걸린 사랑채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 모습
ⓒ 강세웅
사랑채 액자에는 낙관이 없는 오래된 가훈이 걸려 있었다. 일림산 자락에서 자란 야생차 한 잔씩을 나눠 마시며 못다 한 얘기가 이어졌다.

"여러분이 앉아 있는 이 자리가 일제시기 항일운동 때 좌와 중도 우가 함께 모여 논의하고 역적질한 곳입니다. 그때는 내면적으로는 이념이 틀리더라도 조선의 독립이 첫째이기 때문에 좌우, 중도가 수시로 모였습니다."

정길상 선생은 인촌 김성수, 여운형 세력, 장건상, 정해진 등 여러 인사가 거북정을 드나들었다고 설명했다.

"해방정국에서 남로당이다, 김일성계다, 여운형계다, 이승만이다, 송진우다 등 각자가 나라를 세워보고자 한 욕망이 있었을 것 아니에요? 정해룡은 근로인민당에서 재정부장으로 활동했고, 동생 정해진은 북한에서 대남사업부 부부장으로 활동했어요. 그러면 이들이 서로 다퉜느냐?

아니에요. 항일이요, 항미요, 가는 목표는 같아요. 통일된 정부를 만드는 것이었어요. 목표가 같으니까 서로 협조하고 정보를 나눴던 거죠."
 1969년 정해룡 선생 장례식에 모인 조문객들 모습. 회천서초등학교에서 7일장으로 거행됐다.
ⓒ 정길상 제공
1969년 채 뜻을 펼쳐 보지도 못한 채 봉강이 숨졌다. 장례식은 그의 혼이 배인 회천서초등학교 운동장에서 7일장으로 치러졌다.

1970년 광주전남과 전국의 혁신계 관계자, 회천면민들이 추모비 건립위원회를 발족했다. 십시일반 돈을 모아 추모비를 만들었지만,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는 세울 수 없었다고 한다. 이후 전두환 정권에서도 건립은 좌절됐다.

정길상 선생에 따르면 전두환 정권은 비석을 찾아 폭파하라는 지시까지 내렸고, 사람들은 추모비를 몰래 빼돌려 땅에 묻었다.
 정해룡 선생 추모비 앞에서 설립 경위를 듣고 있는 모습. 추모비 제작비는 물론 추모비가 세워진 부지까지 뜻있는 지역 주민들이 십시일반해 마련됐다.
ⓒ 이국언
정보과 형사가 추모비 건립 자처

그렇게 잊혀가던 추모비 건립에 전혀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1995년이었다.

"김영삼 정부 때였어요. 15년 동안 봉강을 사찰하던 '임직'이라는 정보과 형사가 지금 비를 세우자고 재촉했어요. 본인 정년이 이제 4개월 남았는데 관의 압력은 내가 막을 테니 지금 비를 세우자고 나선 거예요. '보성 천지가 다 알지 않느냐? 내가 이 사람을 사찰했던 사람인데, 세상에 이만한 사람이 없다'고 하면서…."

비석 공장 처마 밑에 묻어뒀던 봉강의 추모비가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다. 추모비 건립위원회가 구성된 지 25년 만이었다. 정길상 선생이 거듭 강조했다.

"이 비는 보성 우익과 지역 주민들이 먼저 나서 건립한 것입니다."

사람의 처신이란 것이 무엇일까? 부와 명성을 다 가졌으면서도 아랫사람에게도 먼저 허리를 낮췄던 저 '겸양'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명분과 소신을 좇아 스스로 가난해지는 것을 자처했던 그의 발자취는 오늘 우리에게 무엇일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버스는 어느새 봇재를 넘고 있었다.
 정해룡 생가 뒤뜰에서 내려다 본 득량만. 물결이 잔잔한 바다가 지척이다.
ⓒ 김용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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