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 이후, 살아남은 그녀들의 '착지연습'

김상목 2026. 9. 9.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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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전반에 만연한 성폭력을 고발하는 '미투 운동'의 폭풍이 세계를 뒤흔들었다.

'연대' 영역으로 자연스레 받아들여지는 반성폭력 운동 진영 내에서도 부지불식간에 가해가 일어난다.

얼핏 미적지근해 보이지만, 그녀들이 고심해 선보인 생존자 일상회복 지원과 성인을 위한 성폭력 방지 교육은 차츰 결실을 얻는 것처럼 보인다.

'상-여자의 착지술' 모임은 점점 체계를 갖추며 안정화 단계에 접어들었다지만, 작품을 만든 이들은 단지 개별 모임 활성화에 그치지 않고 문화예술계 성폭력 고발 운동의 연장선에서 운동의 침체기에 하나의 대안이자 진지를 구축하려는 의도를 멈출 생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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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착지연습>

[김상목 기자]

사회 전반에 만연한 성폭력을 고발하는 '미투 운동'의 폭풍이 세계를 뒤흔들었다. 용기 낸 이들과 연대한 이들의 물결은 세상을 금방이라도 바꿀 것만 같았다. 그로부터 몇 년이 흐른 뒤 풍경은 기대와는 달랐다. 해일은 가라앉았고 피해자는 사라졌다. 반성폭력 운동은 동력을 잃고 내부 혼란으로 침체에 빠졌다. 2차 가해가 횡행하는 가운데 소위 '백래시'의 시절이 도래한다. 참으로 기운 빠지는 일이다. 하지만 피해자는 삶을 이어가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살아남긴 했지만,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이들, 그녀들과 연대하는 이들이 모임을 준비한다. '피해자다움'이란 연옥에 빠지지 않고자, 잃어버린 일상생활을 되찾고자 용기를 낸 이들과 그녀들을 조력하기 위해 다양한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고민하던 이들이다. 모임 명을 뭘로 할까 고심하던 사람들은 '상-남자'에 대한 대안적 풍자로서 '상-여자'를 창안한다. 피해 생존자의 사회 복귀, 즉 재활을 '착지'에 비유한 결과, '상-여자의 착지술'로 모임 명이 결정된다.

'상-여자의 착지술', 그 5년의 기록
 <착지연습> 포스터
ⓒ 쌍마픽처스
다큐멘터리 <착지연습>은 '상-여자의 착지술' 모임이 활동한 지난 5년의 연대기다. 2020년 결성 이후 2025년까지의 여정이 오밀조밀 담겼다. 피해 생존자, 피해자의 가족과 지인, 뜻을 같이하는 여러 분야의 문화예술인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은 통합예술 프로그램을 통해 생존자가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응원과 치료로 연대하려 도전한다. 영화는 그녀들의 분투와 시련을 연대기 형식으로 차근차근 화면에 펼쳐 보인다.

착지술을 수련하는 모임에는 다양한 이들이 포진해 힘을 합치지만, 카메라는 피해 생존자로서 정체성을 확연히 드러내는 '탁'과 '구구'에게 비중을 기꺼이 할애한다. 영화에 담긴 프로그램 출발점이 그녀들의 일상 회복에 있기 때문이다. 이중 탁의 경우는 미투 활동가로서 좋건 싫건 '나무위키'에 항목이 등재될 정도로 제법 알려진 이지만, 구구는 드러내지 않던 과거 상처를 짊어진 채 살아가는 인물이다. 이 둘의 이후 궤적 역시 차별화하며 작품의 줄기를 형성한다.

구성은 기록영화 성격에 충실하다. 2020년 모임이 구성되고 아직은 서로 어색한 가운데 활동이 개시된다. 소회를 나누고 프로그램을 개발해 정기 모임 때마다 실시한다. '안전'한 모임을 위해 안정된 공간을 확보하는 과정도 비중 있게 소개된다. 무엇보다 피해 생존자의 현실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이들과 만남을 통해 고립을 탈출하는 일상성이 중요하다. 모임 참여를 위해 웅크린 집 밖으로 나서고 함께 간식을 나누며 잃어버린 사회성을 회복할 가능성을 열어간다.

차례로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은 프로그램이 시연된다. 나와는 다른 존재로 잠깐 변신하는 '소시오 드라마' 참여를 처음엔 어려워하다가도 맛을 들이기 시작한다. '몸 지도 그리기'를 통해 잔뜩 굳어버린 육신을 움직이기도 한다. 갓난아이처럼 바닥에서 몸을 뒤척이며 감각을 회복하기도, 그림으로 자신의 심상을 표출하기도 한다. 다양한 예술 실천은 지칠 대로 지친 이들의 고립을 조금씩 녹이는 역할을 천천히 소화해 나간다.

연대자가 제공하는 프로그램에 제한되지 않으려는 도전도 착실히 감행된다. 탁은 과거 생업이자 적성에 맞는 프로그램을 직접 개발한다. 그녀가 오랜 시간 겪었던 풍파 이후 잃어버린 삶을 회복하려는 노력이다. "대기실로서의 서점" 아이디어는 출판 에디터였던 그녀의 잠들어 있던 재능을 다시금 개화한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이들은 각자의 '디아스포라 문학'을 만들어간다. 마침내 자기 이름으로 책을 출판하고 라운드 테이블 "폭력 너머의 시선"에 참여한다.

생존자의 회복은 단일한 속도일 수 없다
 <착지연습> 스틸
ⓒ 쌍마픽처스
하지만 성폭력 피해 생존자의 치유는 난해하고 복잡한 과정을 거치게 마련. 기승전결 척척 맞게 진행되길 기대하는 건 환상에 불과하다. 탁 역시 중간에 여러 번 위기를 겪는다. 증세가 악화해 폐쇄 병동에 수용되기도 하고 화면에서 수시로 불안정한 상태를 노출하곤 한다. 예술 프로그램은 고통에 노출된 그녀의 영혼을 어루만지고 모임의 동료들은 일상을 어떻게 지켜줄까 고심하지만, 오랜 기간 평범한 삶에서 이탈한 당사자의 회복력은 쉽게 복원되지 않는다.

피해 생존자의 증상은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몇 년의 시간이 흘렀더라도 육체와 정신 양쪽을 파괴한 성폭력은 상흔을 남기게 마련. 어떻게든 잊고 살려 해도 마치 자석에 끌려가 달라붙듯 당사자는 사건 당시로 돌아가곤 한다. 감정이 거기 갇혀 있다면 육신의 감각 역시 그에 따른다. 깨어 있건 지쳐 잠들건 두려움은 가시지 않는다. 사건은 이미 끝났다고 아무리 주변에서 상기시켜도 쉽게 체감하지 못한다. 어떻게든 이제 안전하다는 감각을 회복해야만 한다.

감각은 논리와 이성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무의식과 육체에 새겨야만 한다. '상-여자의 착지술' 모임 프로그램은 바로 그런 감각을 숙지하는 데 맞춰진다. 물론 전인미답의 길이라 애로가 꽃핀다. 참고 사례를 찾고자 해외 탐방도 시도하지만, 한국과 사례가 달라 온전히 따라만 갈 순 없다. 안전을 회복하고 과거의 후유증을 극복하기 위해 모임이 주력하는 치유 기법이 곧 영화의 영문명인 '그라운딩', 즉 '땅 잘 딛기'다. <착지연습> 제목도 여기에서 기원한 것.

프로그램은 차근차근 검증을 거치며 실험된다. 문화예술계 성폭력 대응이 활발하던 부산과 전주 등에서도 서울을 넘어 프로그램을 가동한다. 연대의 장이 자연스럽게 확장하며 더 많은 이들이 참여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활동 규모가 커지며 문제도 덩달아 발생한다. 사업을 펼치려면 예산 확보와 뒤이은 정산 같은 실무가 필수다. 예술인들에겐 머리 싸맬 일이다. 이 때문에 역할을 떠맡은 이들과 아닌 이들 사이의 괴리도 생긴다. 우애에 기반한 모임에 금이 간다.

연대자들의 고심과 균열은 생존자들에게도 부담을 안긴다. 탁은 그런 문제로 누군가 골치를 싸안고 있으리라 상상하지 못했다며 미안함을 전한다. 구구는 자신이 모임에서 제대로 몫을 나눠 도울 수 없다며 자책한다. 다들 상처를 안고 타인을 도우려다 보니 오히려 새로운 속병이 날 참이다. 눈물 어린 고백이 쏟아지고 위로와 고민은 계속된다. 그러면서도 해가 지날수록 공동의 경험은 축적되며 처음 시작할 때는 상상할 수 없던 실천이 거듭된다.

내 몸의 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여정
 <착지연습> 스틸
ⓒ 쌍마픽처스
영화는 성폭력 피해자의 사연을 강조하지 않는다. 외려 과거를 소환하는 유혹과 결별하고자 노력한다. 상처를 들추기보단, 이미 발생한 피해의 생존자를 어떻게 일상으로 돌려보낼 것인가가 관심사다. 피해자가 겪고 있는 복합적인 상황을 돌파하기 위함이다. 우선 그녀들이 겪은 끔찍한 사건의 트라우마가 첫 번째다. 가해자와 동조자에 의한 2차 가해가 두 번째가 된다. 1차 가해가 짧고 굵다면, 2차 가해는 넓고 지속적이다. 방조와 무관심이 여기에 가세한다.

하지만 흔히 예상하지 못하는 고충도 또 다른 가해로 등장한다. '연대' 영역으로 자연스레 받아들여지는 반성폭력 운동 진영 내에서도 부지불식간에 가해가 일어난다. 생존자의 구호보단 자신이 꽂힌 의제 위주로 이용하려는 태도, 혹은 흥미와 가십에 매몰되는 변질, 심지어 가스라이팅을 닮아가는 집착과 음해까지 어두운 이면이 언급된다. 차라리 그냥 놔뒀으면 좋겠다고 하소연하는 생존자는 왜 가해자를 향해 맞서기보다 내부 총질을 해대냐며 원망한다.

공회전에 치우치는 운동은 세상을 바꾸지도, 피해자를 구조하지도 못한다. 앙상한 구호와 분열만 남고, 원래 의도와 딴판으로 변질해 피해자를 더 큰 고립으로 내몬다. 정작 지금 당장 절실하게 필요한 건 무엇일까 발상을 전환한 '상-여자의 착지술' 모임은 이런 난국에 도전한다. 얼핏 미적지근해 보이지만, 그녀들이 고심해 선보인 생존자 일상회복 지원과 성인을 위한 성폭력 방지 교육은 차츰 결실을 얻는 것처럼 보인다.

천천히 몸의 감각을 회복하고 방향을 잃은 삶을 정상 궤도로 되돌리는 여정은 그렇게 천천히 이어진다. 춤과 음악, 미술, 영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던 그녀들의 연대는 느슨해도 착실히 축적된다. 요즘 유행하는 '예술 치료'의 순기능이 응결되는 듯하다. "예술은 삶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질문에 무언의 답, 요즘 남발되는 '치유'의 진정한 면모가 제시되는 순간이 관객 앞에 실체를 드러낸다. 차근차근 합의를 이루며 진통을 감내한 결실이다.

역풍에 맞선 기나긴 항해의 감각으로 탄생한 영화
 <착지연습> 스틸
ⓒ 쌍마픽처스
아직 갈 길이 멀고도 험난하지만, 영화는 모임의 지난 5년을 돌아보며 그녀들이 얻은 성과와 현재형 한계를 차분히 반추한다. '상-여자의 착지술' 모임은 점점 체계를 갖추며 안정화 단계에 접어들었다지만, 작품을 만든 이들은 단지 개별 모임 활성화에 그치지 않고 문화예술계 성폭력 고발 운동의 연장선에서 운동의 침체기에 하나의 대안이자 진지를 구축하려는 의도를 멈출 생각이 없다. 거대한 전선에서 후방지원 기지이자 대안 전략 마련의 요새인 셈이다.

모임의 성과는 수량적인 실적으로만 측량할 수 없는 성격이다. 탁은 저서를 출판하고 대외 활동에 자신감을 얻으며 외형상 성공적인 일상과 건강한 노동으로 복귀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하지만 그녀의 삶을 건 싸움은 이제 고작 본 궤도에 안착했을 뿐이다. 앞으로 또다시 어떤 난국이 닥칠지, 안정된 것처럼 보이던 상태가 악화할지는 알 수 없는 법. 하지만 적어도 구석에 침잠하지 않고 운명에 맞서리란 건 확신할 수 있다.

구구의 작중 행보는 세밀하게 들여다볼 만하다. 우리는 너무 쉽게 타인이 들이대는 잣대에 휩쓸리곤 한다. 하지만 피해 생존자의 회복은 절대로 동시에 완성될 수 없다. 굴곡진 궤적에도 불구하고 탁과 구구는 저주에 맞서 늪에서 몸을 일으키고자 각자의 싸움을 계속 이어간다. 그녀들은 이제 혼자가 아니다. 함께 동네를 산책하거나 달리기 벗이 되어줄 친구들이 생겼다. 일상에 살포시 착륙한 그녀들은 내일의 삶을 위한 투쟁을 이어갈 것이다. '상-여자'를 꿈꾸며.
 <착지연습> 스틸
ⓒ 쌍마픽처스
<작품정보>

착지연습
Grounding
2025 한국 다큐멘터리
2026.09.10. 개봉 107분 12세 관람가
감독 마민지
PD 마민지, 오희정
촬영 배꽃나래(배남우), 이지민
편집 이연정
음향 표용수
음악 이민휘
출연 탁, 구구, 늘보, 자청, 라무, 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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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2회 부산다큐필름페스티발 단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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