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면인식장애 아들이 부모의 죽음을 파헤치는 이야기

김은미 2026. 9. 9.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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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희성이라는 작가를 처음 만난 것은 <빛이 이끄는 곳으로>를 통해서였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감각으로 읽어내는 카미의 세계다.

백희성 작가는 건축가 특유의 뛰어난 관찰력과 공간을 바라보는 섬세한 감각으로 사람과 사물에 남겨진 흔적을 촘촘하게 그려낸다.

<기억의 무늬>는 백희성 작가의 섬세한 관찰력과 감각적인 스토리텔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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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희성 작가 <기억의 무늬>를 읽고

[김은미 기자]

백희성이라는 작가를 처음 만난 것은 <빛이 이끄는 곳으로>를 통해서였다. 프랑스 폴 메이몽 젊은 건축가상을 수상하고, 세계적인 건축가 장 누벨의 사무소에서 디렉터를 역임했다는 독특한 이력이 먼저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의 첫 소설 <빛이 이끄는 곳으로>가 남긴 강렬한 인상이 컸기에, 작가의 두 번째 책 <기억의 무늬>(2026년 8월 출간)를 고르는 데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 책표지 기억의 무늬
ⓒ 북로망스

<기억의 무늬>는 프랑스 파리의 패션학교에 다니는 스물두 살의 카미로부터 시작된다. 카미는 안면인식장애를 가지고 있어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다. 대신 옷의 질감과 냄새, 걸음걸이, 목소리 같은 자신만의 감각으로 사람을 기억하고 구별한다.

카미가 패션학교에 입학한 이유는 단순히 옷을 좋아해서가 아니다. 어린 시절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부모의 죽음에 의문을 품고, 그날 자신이 느꼈던 옷감의 감촉을 단서로 사건의 진실을 찾아가기 위해서다.

모두가 우발적인 사고에 이은 자살이라고 결론 내렸지만, 카미는 부모의 죽음 뒤에 분명 다른 진실이 있다고 믿는다.

어쩌면 옷이라는 것은 말이다. 지능이 높아진 인간이 추위에서 벗어나기 위해 만든 것을 너머, 어쩌면 삶에 난 상처를 꿰매고자 했던 본능에서 태어난 산물인지도 몰라. (45쪽)

카미에게 옷은 단순히 몸을 보호하는 물건이 아니다. 한 사람의 흔적과 시간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기억의 매개체다. 카미는 옷을 만들고 싶어서가 아니라 옷감의 질감에 대해 알기 위해, 그리고 기억 속의 범인을 찾아내기 위해 패션 학교에 입학한다.
얼굴은 보지 못해도 옷으로 기억되는 몇몇 사람들도 있었다. 매일 스치는 옷깃, 반복되는 우연, 그들의 옷은 땀과 체취에 절어 서서히 산화된다. 섬유 조직 사이사이에 주인의 각질이 박히고, 습관처럼 걷어 올린 소매엔 그만의 주름이 문신처럼 새겨진다. 옷은 어쩌면, 우리의 육체를 가장 정직하게 기억하는 유일한 목격자일지도 모른다. (118쪽)

부모의 죽음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카미는 사건 현장에 있었던 오래된 아기침대에 주목한다. 침대에 새겨진 문양과 오랜 시간 사람의 손길이 닿아 생긴 흔적, 가구 틈에서 발견된 옷감은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리고 그 단서들을 하나씩 더듬어가며 카미는 자신이 기억하지 못했던 한 사람의 존재를 추적하게 된다. 과거의 비밀과 부모의 죽음에 얽힌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카미가 오랫동안 붙잡고 있던 기억의 조각들이 비로소 하나의 무늬로 완성된다.

하지만 이 소설이 단순한 미스터리나 추리소설로만 읽히지 않는 것은 카미의 곁을 지켜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오랜 친구 뤼미에르, 경찰인 프레데릭 아저씨, 파스타를 퍼다주며 어떻게든 먹이려고 하는 마리 아줌마, 카미를 믿어줬던 알랑 교수님과 같은 인물들은 부모를 잃고 혼자 진실을 찾아 헤매는 카미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민다. 그들의 존재는 카미가 과거의 상처를 마주하고, 마침내 그 상처로부터 조금씩 벗어날 수 있게 하는 힘이 된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감각으로 읽어내는 카미의 세계다. 얼굴을 볼 수 없기에 오히려 다른 감각에 집중하고, 옷의 질감과 냄새, 주름과 흔적을 통해 사람의 시간을 읽어내는 카미의 시선은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세계를 보여준다.

백희성 작가는 건축가 특유의 뛰어난 관찰력과 공간을 바라보는 섬세한 감각으로 사람과 사물에 남겨진 흔적을 촘촘하게 그려낸다. 특히 옷이라는 평범한 사물에 사람의 기억과 시간, 사랑과 상처를 담아낸 발상이 인상적이다.

<기억의 무늬>를 읽고 나니 '기억'이라는 것은 어쩌면 사랑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사랑했던 사람을 얼굴이나 이름만으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했던 공간과 목소리, 냄새와 온기 그리고 사소한 흔적들을 통해 기억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 나서 평소에는 무심하게 지나쳤던 것들에 좀 더 애정을 가지고 들여다 보고 관찰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손으로 더듬어가며 기억하고, 느끼고, 읽어내는 카미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독자 역시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들의 흔적을 떠올리게 된다. 진실을 찾아가는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상처 입은 한 사람이 사랑과 연대를 통해 다시 살아가는 이야기.

<기억의 무늬>는 백희성 작가의 섬세한 관찰력과 감각적인 스토리텔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한번 책을 펼친 독자라면 카미가 찾아가는 기억의 끝이 어디인지 확인하기 위해 마지막 페이지까지 손에서 놓기 어려울 것이다.

<기억의 무늬>라는 두 번째 작품으로 작가만의 입지를 단단하게 굳힌 백희성 작가의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또 어떤 셈세하고 밀도있는 이야기로 독자들을 매료시킬지, 그게 펼쳐 보일 다음 세계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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