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원으로 1년 살기' 시도한 사람이 깨달은 것

김상목 2026. 9. 8.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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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부동산에 목매는 한국 사회에 익숙한 정미로썬 수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과격한 주장이지만, 통념을 깨부수는 순간이 도래한다.

처음엔 당장 자신의 호구지책 해결에 급급하던 정미는 조금씩 자신이 정말로 추구하던 한국 사회 시스템 너머의 삶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어느새 안정감을 형성한 '0원으로 사는 삶'을 과감히 떨치고 정미는 먹을 것과 잘 곳이 가득한 런던을 벗어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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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담요를 입은 사람>

[김상목 기자]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정미'는 한국을 떠나 영국 런던의 한국계 회사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팍팍한 일상에 지쳐 외국으로의 탈출을 꿈꾸는 수많은 청춘에게 꿈과 같은 성공담으로 비칠 테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한국과 다를 바 없는 회사 환경에 질리고 만다. 끝내 해고를 당한 그녀는 곧바로 벼랑 끝에 선다. '회사 인간'이 회사를 벗어나는 순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문제는 물가 비싸기로 악명 높은 런던에서 고정 수입이 끊어지면 당장 생존에 위협이 닥친다는 것. 남은 돈으론 두 달 방세 내기도 빠듯하다. 하지만 '돈의 노예'로 예전과 똑같은 삶을 살고 싶진 않다. 정말 돈 없이 살 순 없을까? 이참에 삶을 건 도전을 감행하기로 한다. 정미는 1년간 '0원으로 사는 삶'을 시도한다. 하지만 당장 무슨 방법으로 어떻게?
 <담요를 입은 사람> 스틸
ⓒ (주)시네마 달
자본주의 시스템 바깥에서 의식주 해결하기

사람은 먹어야 산다. 실업자가 된 정미 역시 이 법칙을 거스를 순 없다. 런던 한복판에서 자급자족할 텃밭을 가진 것도 아니다. 하지만 끼니는 매번 돌아온다. 0원으로 버티기로 했으니 실천해야 하는데 대체 무슨 수로?

다행히 와이파이는 쓸 수 있다. 이것저것 필사적으로 검색해 본다. 생소한 "스킵 다이빙"이 눈에 들어온다. 거대 도시의 식품 유통 구조에서 빚어진 틈새, 쉽게 말해 '폐기' 수집이다. 관련 활동가의 도움으로 정시에 쓰레기 포장을 뒤진다.

세상의 절반은 굶주리는데 식량의 절반은 버려지는 풍경은 정미에게 '체험 삶의 현장'으로 다가온다. 도저히 혼자선 못할 것 같아 동료와 함께 도시판 채집 생활을 개시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아 금방 익숙해진다. 그녀는 곳곳에서 배고픈 이에게 편의와 재량을 발휘하는 '변장한 천사'들을 사귀고 먹을거리의 소중함을 절감한다. 시스템 경계에서 형성된 자율을 유지하며 공생 하기 위한 나름의 규칙도 습득한다. 당장 먹을 빵을 걱정 했건만, 재료가 넘쳐날 지경이다.
 <담요를 입은 사람> 스틸
ⓒ (주)시네마 달
입고 자는 건? 인스타그램 감성에 쫓기지 않는다면, 다양한 방법으로 수급 하는 게 가능했다. 재활용 가게에선 넘치는 헌 옷을 더는 받지 못할 지경이란다. 집을 '소유'하는 데 집착하지 않으면 겹겹이 형성된 주거 네트워크를 활용해 잠자리도 마련할 수 있다. "스퀏팅"이라는 용어로 알려진 급진적 도시 주거권 운동의 실체가 흥미롭게 소개된다. 부동산에 목매는 한국 사회에 익숙한 정미로썬 수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과격한 주장이지만, 통념을 깨부수는 순간이 도래한다.

처음엔 당장 자신의 호구지책 해결에 급급하던 정미는 조금씩 자신이 정말로 추구하던 한국 사회 시스템 너머의 삶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너무나 충실하게 'K-라이프'를 살던 그녀로선 먹고 자는 것 해결하는 게 좋긴 한데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혼란의 연속이다. 남의 소유인 집을 점거하고 사는 게 허용될 수 있는지, 스퀏팅이 공인된다면 시스템이 유지될 수 있는지 고민이 거듭된다. 그저 도움을 얻고 누리는 것에 그치지 않는 대안적인 삶의 탐구를 개시할 때다.

대안적 삶을 위한 공동체 순례자
 <담요를 입은 사람> 스틸
ⓒ (주)시네마 달
어느새 안정감을 형성한 '0원으로 사는 삶'을 과감히 떨치고 정미는 먹을 것과 잘 곳이 가득한 런던을 벗어나기로 한다. 영국 각지에 형성된 소규모 대안 공동체를 탐방하기로 한 것. 당장 먹고 잘 것만 해결된다면 뭐라도 도전할 수 있을 것 같다. 자본주의 바깥 공동체라지만, 그 형태와 방식은 제각각이다. 노동으로 임금 대신 숙식을 해결하며 곳곳을 전전하는 시간이 이어진다.
이방인의 시선으로 체험한 공동체는 밖에서 막연히 상상하는 목가적 풍경과는 꽤 다른 풍경이다. 숨 가쁜 도시의 삶을 벗어나면 여유로운 느림의 미학만 가득할 것 같지만, 완벽히 구축된 물류 네트워크와 구매력 수단만 있다면 이보다 더 편리할 수 없는 배송 체계가 사라진 작은 세계는 불편함과 인내심으로 대신 채워진다. 자급자족 공동체의 삶에 매료 되다가도 곧잘 온수 샤워가 그립다. 소를 키워야만 우유를 얻고, 벌집의 공포를 견뎌야 단맛을 누릴 수 있다.
 <담요를 입은 사람> 스틸
ⓒ (주)시네마 달
굳이 꼭 이리 살아야 할까? 도시의 편리함과 절충할 순 없을까? '현대 한국인' 때를 벗기엔 이미 너무 익숙해진 주인공의 꼬리를 물고 피어나는 고민이 정미의 몸에 부착한 액션캠 카메라로 실시간 기록된다. 1인칭 시점의 독백과 밀착형 영상이 어우러지며 당사자의 혼란이 자연스럽게 관객의 의문 속에 스며든다. 이 접근 방식 덕분에 정미의 물음표가 평소 관객 각자가 품던 한국의 일상 너머 삶을 향한 질문에 통합된다. 상상에 따라붙는 현실 무게가 묵직하다.

몇 곳의 공동체를 전전하던 정미는 웨일즈에 자리한 '올드 채플 팜' 공동체에서 작은 해답을 얻는다. 단순히 의식주를 자급자족으로 해결하는 명분을 넘어 인류의 역사와 문화를 탐구하며 최적의 지속 가능한 삶을 학구적으로 탐구하는 이곳에서 그녀는 이런 고단한 삶의 의의와 가치를 체화할 수 있게 된다. 그저 단기간의 낯선 모험에 그치지 않고 장기적인 인생관 변혁으로 향하는 체질 변화의 순간이 도래한 것. 이젠 노련해진 영국에서의 삶을 벗어나기로 한다.

나의 집은 어디인가? 영혼의 안식처를 찾아서
 <담요를 입은 사람> 스틸
ⓒ (주)시네마 달
주인공은 영국에서 도버 해협을 건너기로 한다. 바다를 건너는 것도 히치하이킹으로 해결한다. 유럽 대륙을 횡단하는 여정 내내 무임승차는 계속된다. 물론 위험천만한 일이다. 낯선 타인은 뜻하지 않은 친절과 생명의 위협을 동시에 불러오는 존재다. 물론 꾀죄죄한 히치하이커 역시 운전자에겐 두려움을 느끼게 만든다. 그 단순한 진실을 실전을 치러야 비로소 깨닫게 된 것. 대륙에서 더욱 다채로운 대안적 삶을 추구하는 이와 운동을 만나며 사유는 깊어진다.

뜻을 같이 하는 이들의 연례 축제는 그들만의 작은 우주와 다를 바 없다. 휴대전화 사용이나 카메라 촬영이 금지되고, 대안적 공동체의 원칙이 외부의 복잡한 법과 제도 대신 통용된다. 정미는 분위기에 동화 되다가도 필사적으로 거부하며 의심을 거듭한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두 세계가 대결하는 셈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나'의 안식은 어디인지 찾는 것. 다른 활동가와 달리 인류의 미래나 세계 평화 같은 대의명분이 아닌 지극히 개인에서 출발하는 고민이다.

다시 길을 떠나 유럽을 빙 둘러 횡단하던 정미는 현대판 히피들의 카라반에 합류한다. 대형 트럭을 개조한 캠핑카에서 처음 보는 이들이 한데 어울리며 여정은 이어진다. 물론 바람 잘 날 없는 시간이다. 세계 각지에서 모인 히피들은 국경을 넘을 때마다 당국과 충돌을 빚는 건 물론, 구성원 사이에도 노선과 태도에 따른 갈등이 툭하면 벌어진다. 작은 사회 속 대립은 곧 히피와 펑크, 무정부주의와 사회주의 지향 사이의 현대 사회운동 논쟁으로 자연히 연결된다.

일련의 상황을 겪으며 정미는 수시로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난민을 돕는 사회 운동에 참여할 것인가, 아직 해소하지 못한 개인의 고뇌를 풀기 위한 구도의 길을 계속 이어갈 것인가. 여기에 수십 가지 고민이 접속되며 상황은 계속된다. 일단 계속 길을 가기로 한다. 중부 유럽에서 동유럽, 남유럽으로 여정은 멈추지 않는다. 과연 가능한 일인지 스스로 의심하던 1년이란 시간도 어느덧 끝나간다. 조용한 그리스의 섬에서 정미는 최초 목표를 완수한다.

담요를 입은 사람의 전설 속으로

하지만 모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여행가라면 충분히 책 한 권 내고 남을 여정을 치렀음에도 말이다. 아무래도 1년이란 시간이 주인공을 예전과는 다른 존재로 변형 시킨 듯하다. 정미는 다시 동쪽으로 향한다.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를 넘어 동쪽으로 향하는 누더기 차림의 주인공은 이제 신비로운 걸식 수행자의 형상을 닮아간다.

'데르비쉬', 즉 '담요를 입은 사람'이란 뜻을 듣게 된 그녀는 자신이 고대의 수행자와 비견 된다는 걸 깨닫는다. 튀르키예에서 이란으로 향한 발걸음, 지금 전화에 휩싸인 땅에서 그녀가 접한 호의와 친절은 2026년 한국 관객에게 영화 외부적인 단상을 던질 만하다. 물론 오리엔탈리즘이 영화의 귀결은 아니다.

이제 런던에서 품었던 최초의 목표는 중요하지 않다. 1년이 아니라 인생을 건 구도의 길이다. 물론 신비주의 수행이 곧 득도의 길로 직통 하진 않는다. 담요 하나에 의지한 채 미지의 땅에 도사린 수많은 위험과 대면하는 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어쩌면 세상의 이치를 터득했다는 오만함을 경계하라고 절대자가 던지는 시련처럼 탄탄대로 같던 여행에 위기가 닥치곤 한다. 그때마다 실존의 무게를 견디며 사유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여정의 결론은 뻔하지 않다.
 <담요릉 입은 사람> 포스터
ⓒ (주)시네마 달
파란만장 여정은 2022년 <0원으로 사는 삶> 에세이 도서, 2년 후 어떤 생존 서바이벌 다큐멘터리에 못지않을 <담요를 입은 사람> 다큐멘터리 영화로 세상에 공개된다. 영화적 형식보다는 주인공의 삶의 변화가 고스란히 연대기로 구성된 형태에 가깝다. 문법과 이미지 탐구의 미학 대신 대안적 삶을 자신의 목숨과 인생을 담보로 도전하는 실험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따라서 영화와 대면하기 위해선 주인공이 품은 고민을 공유하고 개별의 입장을 제출해야 한다.

주인공의 모든 걸 공감하거나 동의할 필요는 없다. 사회적 연대나 대안 공동체 형성 노력보다는 우선순위로 개인의 구원, 혹은 영성 추구를 놓는 선택이 자칫 신비주의로 매몰될 우려를 낳을 구석도 종종 엿보인다. 하지만 동시대 현대 한국인 절대 다수가 감히 의심조차 품기 힘든 시스템 외곽의 삶을 체험하고, 소유의 강박에서 벗어난 삶이 가능함을 실증한 도전은 일상의 헛헛함에 시달리는 관객에게 영감을 주고 용기를 북돋기엔 충분해 보인다.

<작품정보>

담요를 입은 사람
Blanket Wearer
2024 한국 다큐멘터리
2026.09.09. 개봉 117분 12세 관람가
감독 박정미
출연 박정미 외
제작 박정미
배급 ㈜시네마 달

25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배급지원상
16회 부산평화영화제 도란도란관객상, 장편우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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