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부천 자본을 잠식한 소사금융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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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대한제국의 금융과 재정을 비롯해 자본을 장악하기 위해 1905년 1월 서울에서 한국화폐를 정리하고 일본화폐로 대체시켰다.
중소 자작농의 몰락 그 배후에 소사금융조합이 있었으며 결과적으로 조선 농촌경제를 파탄시키는 주역이었다.
소사금융조합의 중요성은 조선총독부가 1929년에 만든 <부천군 군세일반(郡勢一班)>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부천군민의 고혈을 빼먹은 소사금융조합의 존재를 많은 시민들이 기억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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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선 기자]
일제는 대한제국의 금융과 재정을 비롯해 자본을 장악하기 위해 1905년 1월 서울에서 한국화폐를 정리하고 일본화폐로 대체시켰다. 1909년 10월에는 중앙은행에 해당되는 한국은행을 만들었으며, 강제병합 후인 그 이듬해 <조선은행법>을 공포하여 한국은행을 조선은행으로 바꾸었다.
이와 더불어 지방 자본을 장악하기 위해 지방금융조합을 만들었다. 1907년에 <금융조합규칙>을 제정함으로써 각 지방에 금융조합이 만들어질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였으며, 명분상 지역 농민들을 위한 기관이라고 했지만 재산이 적고 소작농을 하는 농민들에게는 높은 이율을 받았으며, 이와 반대로 일본인들과 일부 조선 유지들에게는 저리로 대출하여 지주들이 출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중소 자작농의 몰락 그 배후에 소사금융조합이 있었으며 결과적으로 조선 농촌경제를 파탄시키는 주역이었다.
그렇다면 이 당시 부천에는 어떠한 금융조합이 만들어졌을까? 금융조합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소사지방금융조합의 설립허가
조선총독부관보제702호(1914년 12월 4일)에 의하면 소사지방금융조합의 설립허가가 1912년 7월 17일로 명시된다. 하지만 3주후인 12월 24일 조선총독부 관보 제719호에 의해 6월 29일로 변경되었다. 소사지방금융조합은 계남면 심곡리에 위치하였으며, 현재로 보면 부천역 남부 자유시장 안에 있었다.
조합원의 농사상 필요 자금 대부, 예금, 종자, 종묘, 비료, 농구 기타 농사상 필요한 재료 구입 분배, 조합원 위탁 의한 생산물 판매, 조합원 위한 생산물 창고 보관 창하등권 발행, 조합원 공동 이익 위한 농사상 시설, 지방금융 조절 관한 조선총독 명령 업무 경영, 농공은행 업무 대리 등을 목적으로 하였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농협에 해당되는 금융기관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업무구역은 부천군을 비롯해 시흥군의 수암면과 군자면까지 포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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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년도의 부천군 군세일반(郡勢一班) 조선총독부는 1929년 부천군에 대한 위치, 행정구역, 인구, 경제, 교육, 종교, 재정 등에 대해 자세히 파악하여 군세일반을 만들었다. 특히 부천군 계남면 지도를 통해 소사역을 중심으로 면사무소, 경찰관주재소, 우편소, 수리조합, 소학교, 소사신사 등 일제가 설치한 기관들을 알 수 있다. 역으로 소사역 부근은 일제가 식민지를 통해 수탈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만든 곳임을 알 수 있다. |
| ⓒ 종로도서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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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사금융조합의 연도별 출자구수와 불입출자총액 조선총독부관보에 기재된 소사금융조합의 출자구수와 불입출자총액을 도표로 나타낸 것이다. 이를 통해 소사금융조합은 꾸준히 수익을 낸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역으로 조선식민지 농민들의 자본이 소사금융조합으로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
| ⓒ 국사편찬위원회(한국근대사료DB) |
1940년 4월 13일 오전 11시 정기총회를 진행하였는데 이익금이 무려 2만 원이였고, 예금이 80만원을 넘어 전 조선의 제1모범 조합이라고 칭송을 받았다. 1923년 2천원의 이익금이 17년 후에는 2만원까지 증가했다고하니 우리 선조들의 삶을 미루어짐작할 수 있다.
임원(조합장, 이사, 감사)들의 이력
소사금융조합은 크게 조합장, 임원, 감사로 이루어졌다. 그 외도 조합원을 대표하는 평의원도 있었지만 이 조직에서 핵심은 조합장, 임원, 감사였으며, 이들은 모두 조선총독부관보를 통해 공시가 되었다. 초대 조합장은 부내면 상리에 살았던 이규룡이었으며, 감사는 계남면 소사리의 이계현, 다주면 간촌리이명규, 계양면 병방리의 박승조였다. 이 당시 부천군이 현재의 부천시를 비롯해 인천 계양구, 부평구, 남동구 등을 포괄하므로 이들이 소사역 부근에 있었던 소사금융조합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들 중 뭐니뭐니해도 소사금융조합과 관련이 깊은 사람은 이계현(李啓賢)이다. 초대 감사였던 이계현은 1917년 4월 22일 진행된 정기총회에서 조합장으로 취임하였다. 하지만 임기 3년인 조합장을 무려 4년이나 연임하며 1930년 3월 17일 사망( 조선총독부 관보 제1031호, 1930년 06월 12일)할때까지 했다. 1929년 연임되었는데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사망하였으며 그 후임으로 소래면장 출신인 이도영이 되었다
이계현의 행적을 추적하다보면 일제강점기 부천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이계현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생도 출신으로 육군보병참위(陸軍步兵參尉)를 지냈다. 이 당시 동기 중에 신팔균 지사가 있었는데, 육군무관학교 출신들은 우리 근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사람들이 많았다.
그 이후 부천 소사리로 내려와 1909년에는 소사리에 서상대(徐相大), 윤백헌(尹百憲)과 함께 계남학교를 만들어 근대교육활동을 하였다. 특히 1919년에는 3.1운동 후 민심을 달래기 위해 임시로 사무촉탁원(臨時事務囑託員)을 선발하여 11일간 순회보행을 하게하였는데 경기도에서 31명을 선발한 사람 중 하나였다. 그리고 1919년과 1920년에는 부천군청에서 군참사를 2년간 근무하였다.
1923년에는 새로 설립된 부평수리조합의 부조합장이 되었다. 일제의 산미증식계획 일환으로 만들어진 부평수리조합에 참여하여 부조합장까지 되었으며 초대 조합장은 송산상차랑(松山常次郞)이었다. 1923년에는 민립대학 설립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1924년에는 계남면을 대표하여 부천군학교평의원(富川郡學校評議員)이 되었다.
이외에도 이계현은 음식 또는 개량 기술에 특출났다. 1922년에는 조선식량품평회에 참여하여 부천을 대표해 당면(唐麵)을 통해 수상하였으며, 1924년에는 부천 상원 품평(富川桑園品評)에 참여하여 1등을 하였다. 동년 11월에는 소사역 부근에 한익선, 민병수와 함께 자본금 10만 원, 불입근 2만5000원의 부천산미개량조합(富川產米改良組合)을 만들어 하루에 현미 200석을 생산하였다. 소사공립보통학교 설립하는데 기성회를 조직하였는데 330원을 기부하였다. 1927년은 이계현에게 일제에서 가장 높은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부천을 대표해 경기도평의회(京畿道評議會)이 된 것인데 치열한 선거를 통해 경기도평의원이 되었다.
감사를 지낸 인물 중에 오정면 고강리 출신 이제익이 있었다. 이제익은 대한제국 당시 부평군 소속 관리였으며 일제식민지가 되며 오정면장으로 승진하였다. 박성엽, 남길우와 함께 소사금융조합에서 감사를 오래했는데, 1918년부터 1931년까지 7번을 연임했다.
이외에도 소사면과 소사읍장을 했던 원영상은 1938년 조합장이 되었다. 면장과 조합장을 겸임함으로써 소사면에서 부와 권력을 모두 가진 사람이 되었다. 이당시 조선총독부가 얼마나 자세히 인적사항을 기재하는지 원영상이 원촌임(元村稔)으로 창씨개명한 것까지 공지하였다.
소사금융조합은 부천군 계남면(소사면, 소사읍으로 개칭)에서 핵심 역할을 담당한 금융기관이었다. 조선인을 상대로 막대한 이익을 거두었으며, 이들의 이익은 결국 한국으로 넘어온 일본인과 일제에 협력한 소수의 지역조력자들에게 돌아갔다. 이러한 자본을 바탕으로 1937년 이후 일제가 진행한 침략전쟁을 옹호하고 미화한 광고를 많이 했다. 1940년 1월 1일 조선신문에 광고한 <신 출동 장사 무운장구>와 1940년 1월 5일 매일신보에 광고한 <축 흥아신춘>이 대표적이다.
과거도 현재도 화폐는 경제의 흐름을 잇는 피와 같은 것이다. 하지만 소수가 화폐를 장악하고 돌지않으면 서민들은 힘든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다. 특히 일제강점기 화폐로 대표되는 자본을 일본인들이 35년간 장악하였으며 그 옆에서 적극 협력한 소수의 사람들이 이익을 보았다. 나머지 평범한 농민들은 힘든 생활을 했다. 일제강점기 부천군민의 고혈을 빼먹은 소사금융조합의 존재를 많은 시민들이 기억했으면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콩나물신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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