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과 건강 생각한 옛집의 지혜… 건축은 사람이 먼저”

맹경환 2026. 9. 4.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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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김원(83)은 60년 가까운 세월 동안 400여개의 건축물을 설계했고 그 가운데 200여개를 지었다.

'오늘날 건축가 김원을 있게 한 중요한 순간'을 꼽아 달라는 질문에 김원은 "그때"라고 했다.

"미국에 가면 장학금을 받을 수는 있었지만 아무리 부잣집 아이들이라고 해도 식당 접시 닦기 같은 아르바이트를 해서 생활할 수밖에 없었어요. 당시 외화 송금이 금지됐을 때잖아요. 난 그 짓은 못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겉으로는 돈 많고 땅 넓은 곳에서 건축을 배울 것은 없다고 말하곤 했죠. 한국에서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지 먼저 배우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때가 되면 돈을 대주면서 오라고 할 곳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때 미국 유학을 선택했다면 아마도 그렇고 그런 '미국 건축가'가 됐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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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가] 건축가 김원
지난달 27일 서울 종로구 건축환경연구소 광장의 사무실에서 만난 건축가 김원. 윤웅 기자

건축가 김원(83)은 60년 가까운 세월 동안 400여개의 건축물을 설계했고 그 가운데 200여개를 지었다. 국립국악당, 주한 러시아대사관, 한강성당, 통일교육원, 미당 서정주 문학관 등 굵직한 작품들이 그의 작품 목록에 포함돼 있다. 지금은 건축에는 손을 놓고 책 쓰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최근엔 산문집 ‘그래도 못다 한 이야기’를 펴냈다. 지난달 27일 서울 종로구 건축환경연구소 광장의 사무실에 들어서자 책상 위에는 두툼한 원고 뭉치가 놓여 있었다. 건축가로 활동하며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였다는 그는 여행기를 집필 중이라고 했다.

본격적인 인터뷰에 앞서 사진 촬영을 부탁하자 한쪽 벽에 자리 잡은 커다란 고지도를 배경으로 찍어 달라고 했다. 조선 태종 2년(1402)에 제작된 동아시아 최초의 세계 지도로 평가받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사본. 서쪽으로 아프리카부터 동쪽으로 일본까지 유라시아 대륙 거의 전부를 담고 있다.

“2년 전 어렵게 구했어요. 한국 사람은 바깥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어요. 그 옛날 이런 지도를 만들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그걸 알리기 위해 ‘지도의 날’을 제정하자고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제안하고 있는데 반응이 영 신통치 않네요.”

3시간이 넘는 인터뷰 내내 작은 체구에 팔순이 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지치지 않는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강인함의 원천은 어머니
지금 김원의 모습은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다. 6남매 중 다섯째였던 그는 어린 시절 병약하고 편식이 심하고 어머니 치맛자락만 붙잡고 지내는 아이였다. 집안의 걱정거리였다. 외무부 부산출장소 소장이었던 아버지가 6·25가 터진 직후 돌아가시자 집안을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는 이렇게 커서는 사람 구실 못하겠다고 생각했는지 김원만 데리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다.

“당시 최고 명문인 경기중학교 시험을 보라는 거예요. 합격은 했지만 홀로 하숙집에서 처음엔 해만 지면 울었어요. 나중에 들으니 어머니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기차 타고 13시간 동안 내려가는 내내 우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어머니가 독한 마음을 먹고 나를 떼놓는 바람에 강하게 컸던 것 같아요.”

경기중고등학교 시절 학교는 방과 후 특별 활동을 강조했다. 김원은 미술반과 산악반을 선택했다. 그는 “지금 와서 생각해도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게 내 인생을 바꿔 놨다”고 했다. 특활반 교사도 일류급이었다. 고교 시절에도 산악반과 함께 조각반 활동을 했는데 당시 조각반 교사는 한국 현대 조각의 개척자이자 대표적인 여성 조각가인 윤영자(1924~2016)였다. “윤 선생님은 첫 수업 시간에 누드모델을 데려오셨어요. ‘여자가 벗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야 한다. 아름다운 오브제일 뿐이다’라고 말씀하셨어요. 훌륭한 교육이었다고 생각해요.”

김원은 조각가를 꿈꿨다. 하지만 어머니는 미대 진학은 절대 안 된다고 했다. 고서화 애호가였던 아버지 덕분에 집안에는 유명 화가와 서예가들이 자주 드나들었고, 어머니는 미술가는 배고픈 직업이라는 생각이 굳어 있었다. 김원은 묘책을 생각해냈다. 바로 서울대 건축공학과였다. 꿈꿨던 예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어쨌거나 배고플 걱정이 없는 ‘공대’였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 내내 꾸준히 했던 산악반 활동도 건축 인생에 끊임없이 영향을 남겼다. 자연을 거슬러서는 안 된다는 건축관으로 이어졌고, 동강댐 반대 운동 등 환경 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던 근원이었다.

건축가 김원을 있게 한 중요한 순간
남산 하얏트호텔 건너편에 지어진 귀금속 판매·전시장 갤러리 빙(明寶廊)(1986)으로 거대한 호텔 앞에 보석더미와 같은 외관을 보인다. “사용자가 편리하고 건강하게 쓸 수 있는 건축이 좋은 건축”이라는 김원은 “기능보다 예술적인 측면을 강조한 것은 갤러리 빙이 거의 유일하다”고 말했다. 광장 제공
대학을 졸업하고 선택의 순간이 왔다. ‘오늘날 건축가 김원을 있게 한 중요한 순간’을 꼽아 달라는 질문에 김원은 “그때”라고 했다. 당시 졸업생은 거의 무조건 미국 유학을 선택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김원은 1965년 김수근 건축연구소에 들어갔다.

“미국에 가면 장학금을 받을 수는 있었지만 아무리 부잣집 아이들이라고 해도 식당 접시 닦기 같은 아르바이트를 해서 생활할 수밖에 없었어요. 당시 외화 송금이 금지됐을 때잖아요. 난 그 짓은 못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겉으로는 돈 많고 땅 넓은 곳에서 건축을 배울 것은 없다고 말하곤 했죠. 한국에서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지 먼저 배우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때가 되면 돈을 대주면서 오라고 할 곳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때 미국 유학을 선택했다면 아마도 그렇고 그런 ‘미국 건축가’가 됐을 거예요.”

김수근 건축연구소에선 하루하루가 철야였다.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는 그가 처음 주도했던 여의도종합개발이었다. 여의도에 국회의사당이 들어선 것도 그의 아이디어였다. 뭔가 중요한 정부 기관을 옮겨와 여의도의 중심을 잡아 줬으면 하는 생각을 했고, 김수근은 좋은 생각이라고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에게 기회가 왔다. 네덜란드 여왕의 장학금을 받고 네덜란드 유학길에 오른 것이다. 미국은 강대국이지만 네덜란드는 강소국이었다. 좁고 척박한 땅이어서 집을 크게 짓지 않고 최대한 땅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곳이었다. “사용자가 편리하고 건강하게 쓸 수 있는 건축이 좋은 건축”이라는 그만의 건축 철학을 확립하고, 한국 전통 건축의 우수성도 확인할 수 있었다. 김원은 네덜란드 유학 시절 일화를 들려줬다.

“내가 존경했던 교수가 있었어요. 첫 시간 출석을 부르는데 내 이름을 부르더니 한국에서 왔냐고 하면서 일으켜 세웠어요. 한국의 온돌 얘기를 하면서 어느 시대 어느 민족도 생각하지 못한 한국인들의 아주 독특한 발상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우쭐했죠. 수업 후 친구들한테 온돌 시스템에 대해 설명했던 기억이 납니다. 온돌은 건강에 이상적인 ‘두한족온’(頭寒足溫·머리는 차갑게, 발은 따뜻하게)을 가능하게 합니다. 우리 민족은 건물의 외관이 아니라 사람의 건강을 우선하는 건축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있었어요.”

귀국 후 김원은 자신만의 건축설계 사무소를 만들면서 같은 ‘광장’이라는 이름의 출판사도 함께 차렸다. 한국 건축의 아름다움을 전하겠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사진집 ‘한국의 고건축’ 시리즈를 50권까지 내겠다고 계획했지만 재정난 때문에 7권 만에 접었던 것이 그에겐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았다.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건축
사진=윤웅 기자
김원은 집을 짓기 전에 사람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세종정부종합청사를 예로 들었다.

“건물엔 창이 필요합니다. 창의 목적은 채광과 환기예요. 창의 위치와 크기, 모양은 환기와 채광에 최적화돼야 합니다. 세종 청사 건물들을 보면 거의 전부가 외관을 보여주는 입면도에 그림을 그리듯, 전체 창문이 어떻게 하면 예쁘게 보이나만 생각하고 채광이나 환기 같은 목적을 잊고 있어요. 그림을 그리기 위한 모티브로 창을 오해하고 있다고 할까요. 우리 전통 건축의 지혜를 배워야 해요.”

김원은 한국 건축의 정신도 강조했다. 전통 건축물을 보면 굴뚝이 낮다. 아무리 부잣집이라도 굴뚝을 거의 안 보이게 설계했다. 대류 현상을 생각하면 굴뚝을 높게 지어야 마땅하다. 그는 “우리 조상들은 낮은 굴뚝이 비효율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주변에 밥 짓는 연기가 잘 보이지 않기 위해 굴뚝을 높이지 않은 것”이라며 “이웃을 먼저 살피는 정신이 숨어 있다”고 설명했다.

김원의 오랜 목표는 올바른 건축 교육을 위한 건축학교를 세우는 것이다. 말은 아꼈지만 한 대학과 구체적인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고 전했다.

김원은 인터뷰 중간중간 여담이라며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 가운데 꼭 써 달라고 부탁한 것이 있었다. 그의 이름과 관련한 것이다. ‘원(洹)’은 흔치 않은 글자다. 학교 다니면서 출석 부를 때 선생님들도 ‘항’이나 ‘환’으로 잘못 부르기도 했다. 사실 황허의 지류로 중국 허난성 안양현을 가르는 강 이름이다. 안양은 갑골문자가 출토된 곳으로 은나라의 수도였다. 김원의 아버지는 은나라가 한족이 아닌 우리 조상 동이족이 세운 나라라고 믿고 있었다. 아버지가 ‘원’이라고 이름 지은 이유는 그 사실을 널리 알리라는 뜻이었다. 김원은 자신의 이름을 뜻하는 그 강을 직접 찾아 살피기도 했다. 김원의 큰 누나 이름은 아일랜드의 한자어인 ‘애란(愛蘭)’이다. 아일랜드가 1921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아버지가 조선의 독립이라는 염원을 담아 지은 것이라고 한다.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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