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사진 거장이 60년간 담은 한국, 스크린에 담기다

나원정 2026. 9. 3.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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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의 발전상은 어떤 사진으로 찍어 남겨야 할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입니다.”

구순의 일본 보도사진가 구와바라 시세이(桑原史成·사진)는 60여년간 100번 넘게 찾아와 10만여 컷 사진에 담은 대한민국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의 작가 인생을 돌아본 다큐멘터리 ‘사진의 얼굴’(감독 고희영)이 2일 개봉했다. 개봉에 맞춰 방한한 그를 최근 서울 을지로 영화홍보사 사무실에서 만났다. 1969년 한국에 취재 온 그와 일본어 통역으로 만나 이듬해 결혼한 한국인 아내 최화자(82)씨도 함께였다.

한·일 수교 한 해 전인 1964년 서울대생들의 한일 회담 반대 시위 현장에서 처음 한국 취재를 시작한 그는 2024년 대통령 탄핵 찬·반 시위 등 최근까지 한국의 역사 현장을 담아왔다.

한반도와 인접한 일본의 시네마현 출신이라, 중학생 때 발발한 한국전쟁부터 관심이 컸다고 한다. 1956년 도쿄농업대에 진학해 만난 한국인 친구에게 ‘아리랑’ ‘도라지’ 등 민요가락을 배웠다. “이렇게 젓가락 장단을 맞춰 불렀죠. 잘은 못 불러도 첫 소절만은 아직도 기억해요.”

정겨운 추억에 지긋이 감은 한쪽 눈은 의안이다. 어릴 적 사고로 한쪽 눈을 잃었다. 다큐에서 그는 오히려 그 덕에 누구보다 렌즈 초점을 잘 맞춰 사진가가 됐다며 빙그레 웃었다. 그 외눈으로 1962년 일본 매체조차 주목하지 않은 미나마타병 참상을 첫 사진전으로 세상에 내보였다.

일본사진비평가협회 신인상 수상에 힘입어 “언젠가 사진가가 되면 꼭 취재하리라” 다짐한 한국으로 향했다. 휴전 11년째인 1964년 여름, 김포에서 흙먼지 날리는 비포장도로를 달려 서울을 마주했다. 피폐하지만 생명력이 넘쳤다. 20대 청년 구와바라에게 “공권력의 억압에도 꺾이지 않는 열망이 폭발한 나라”이자 “사진 찍을 주제가 무궁무진한 보물창고”였다.

잊지 못할 사진을 묻자, 그는 망설임 없이 아이패드에 간직해온 1965년의 흑백사진 ‘어머니와 면회 중인 파월 병사’를 꺼내 보였다. 여의도 비행장에서 마지막일지 모를 작별을 나누던 모자에게서 “한국말을 몰라도 절절함이 전해왔다”고 그는 말했다. 한국군 철수가 한창이던 1973년엔 자비를 들여 베트남전 현지를 찾기도 했다.

1965년 군부정권이 고려대 교정 안까지 무장군인을 투입해 시위대를 마구잡이로 군용차에 잡아넣던 장면을 망원렌즈로 찍다 헌병에 붙잡힐 뻔한 아찔한 상황도 있었다. 다큐 속에서 그는 “한국인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말은 ‘개새끼’ ‘일본 쪽바리’였다”고 회고했다. 그럼에도 “동서냉전의 틈바구니 속에서 지금도 긴장이 계속되는 분단국가의 분투”가 그의 카메라를 번번이 붙들었다.

소속이 없는 프리랜서였기에 평생 가난과 싸웠지만, 자유로웠다. 북한도 일곱 차례 찾았다. 적나라한 현실을 담았다가 입국이 영영 금지됐다. 그가 일생 마지막으로 찍고 싶은 사진은 “통일이 된 한반도”다. 다큐를 연출한 고희영 감독은 전작 ‘불숨’(2019)에서 천한봉 도예명장을 조명하던 중 구와바라 시세이의 사진을 처음 봤다. 고 감독이 사진 사용을 허락받으러 찾아간 구와바라의 도쿄집엔 그가 평생 찍은 사진 100만여 장이 천장까지 가득 차 있었다.

고 감독은 고령인 구와바라의 사진 데이터베이스 작업이 시급하다고 했다. “한국을 담은 10만여 장은 우리 근현대사의 공백을 메워주는 기록”이라며 “이번 다큐가 그의 공훈을 더 널리 알릴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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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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