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 테니스 선수가 캐리어 끌고 집 나온 사연

김성호 2026. 9. 2.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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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말한다.

테니스 선수였던 영선은 집안 사정이 넉넉하진 못한 듯한데, 줄이 다 늘어진 라켓을 쓰고 행색도 번쩍번쩍한 다른 아이들에 비해 남루해 보이는 게 그렇다. 그래서인지 테니스 엘리트 선수층도 다른 종목에 비해 부유한 집 출신인 경우가 많다.

성우를 비롯해 등장하는 테니스 선수들의 집을 평범한 가정이 아닌 초호화 대저택으로 표현하는 등 빈부의 격차에 천착하려 한 모습이 엿보이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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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씨네만세 1421] <캐리어를 끄는 소녀>

[김성호 평론가]

사람들은 말한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고. 맞는 말이다. 송충이에게 쌀, 예를 들면 한국 농촌진흥청이 육종한 품종 중에서도 맛있기로 유명하다는 영호진미를 갓 도정하여 차려 준다면 어떤 일이 빚어질까. 영양실조로 비실비실하다 죽거나 소화불량으로 말라 죽을 것이다. 섬유질을 잘라 먹는 데 특화된 송충이의 소화기관이 곡류의 녹말성분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송충이는 제게 맞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 남의 밥상을 탐내선 안 될 일이다.

그러나 저 한스 크리스찬 안데르센은 말한다. 세상에는 제가 오리 새끼인 줄 아는 백조 또한 있다고. 주변의 평범한 이들이 너는 안 된다고 폄훼할지라도 마침내 오리 따위가 감당할 수 없는 우아함을 뽐낼 이가 무리 가운데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리처드 바크 또한 말한다. 모든 갈매기가 우리의 역량은 여기까지라고 선을 그을 때, 그 너머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어떤 갈매기 한 마리가 태어날 수 있다고. 똑같은 갈매기로 태어났을지라도 어떤 영성만 갖춘다면 이제껏 어떤 갈매기도 이르지 못한 곳에 닿을 수가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들 앞에서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건 어리석음이며 운명을 거부하는 나태함과 같은 못남일 테다.

<캐리어를 끄는 소녀>는 송충이에게 솔잎을 강제하는 사회에 대한 우화가 될 수 있었다. 백조에게 오리라 하고 송충이가 아닌 이에게까지 송충이란 딱지를 붙이는 세상에 대한 경고 또한 될 수 있었다. 갈매기에게 고개 숙여 이제껏 해온 길로만 내달리라 강제하는 풍토를 내보이는 작품이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 모두는 그대로 우리 사회에 실제로 작동하는 어떤 힘에 대한 이야기가 될 수 있었음을 뜻한다.
▲ 캐리어를 끄는 소녀 스틸컷
ⓒ 싸이더스
왜 캐리어 끄는 소녀여야 했을까

지난 몇 년, 한국 영화에서 캐리어를 끄는 일은 하나의 상징처럼 기능해왔다. 이를테면 박석영 감독의 꽃 3부작 가운데 집을 나와 오갈 데 없는 소녀가 낯선 도시에서 끄는 캐리어와 같은 것이 대표적인 모습이다. 가진 모든 것이 캐리어 하나에 담겨 있는 미성년자의 모습은 최소한의 기댈 곳조차 상실한 보호받지 못하는 존재란 걸 시각적으로 드러냈다. 제 모든 것, 저의 운명 전부가 오롯이 제 손에 쥐어져 끌려오는 어린 아이라는 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통상 캐리어가 안전한 일상 너머에서 유희적 일탈행위인 여행을 즐기는 중산층의 대표적 산물이란 것을 떠올리면 그 상징성이 더욱 부각되지 않는가.

<캐리어를 끄는 소녀>가 의도한 것도 그와 같아 보인다. 주인공은 이제 겨우 15살인 소녀 영선(최명빈 분)이다. 테니스 선수였던 영선은 집안 사정이 넉넉하진 못한 듯한데, 줄이 다 늘어진 라켓을 쓰고 행색도 번쩍번쩍한 다른 아이들에 비해 남루해 보이는 게 그렇다. 골프나 테니스, 승마는 특히 한국에선 귀족적 스포츠라 불리는 대표적 종목이다. 다른 스포츠보다 돈이 많이 들어서겠다. 대중적인 종목보다도 기술장벽이 높아서 꾸준히 레슨을 받아야 하는데 그 비용이 만만찮다. 장비며 코트비용까지 더해지면 평범한 가정에선 감당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인지 테니스 엘리트 선수층도 다른 종목에 비해 부유한 집 출신인 경우가 많다.

물론 예외는 있다. 어려운 사정에도 자식을 위해 꾹 참고 지탱하는 부모가 있다거나, 특출한 기량으로 스폰서 지원을 받는 경우다. 영선은 전자다. 영선의 부모가 그동안 훈련을 지원해 준 까닭에 어린 나이부터 테니스를 배울 수 있었다. 보육원 출신인 영선은 입양아다. 그러니까 그를 지원한 부모는 양부모다. 그런데도 일찍부터 영선에게 테니스를 배울 수 있도록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영선은 재능과 성실로써 그에 보답했다. 그러나 세상 많은 일들이 그러하듯 그 안온한 관계에도 위기가 닥친다. 부모의 사업이 실패한 것이다.
▲ 캐리어를 끄는 소녀 스틸컷
ⓒ 싸이더스
어느 날 갑자기 부모가 사라졌다

<캐리어를 끄는 소녀>는 모든 것이 망가진 그 지점으로부터 시작된다. 어느 날 갑자기 부모가 사라지고 집 안엔 압류 딱지가 나붙는다. 홀로 남겨진 영선은 갈피를 잡지 못한다. 일순 가족이 사라졌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원래 있던 보육원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그곳은 부모가 없는 애들이나 가는 곳이 아닌가. 자기에겐 부모가 있으니까, 부모를 찾는 게 우선이다. 좋아하는 테니스도 포기하고 싶지가 않다. 벌써 몇 달 째 밀린 레슨비 때문에 배울 수가 없지만 길을 찾아 나서는 건 그래서다.

영화는 기댈 곳 없는 소녀 영선이 부모를, 또 테니스를 배울 길을 찾아 나서는 모습을 비추며 시작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선이 부모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케 한 영화는 이내 테니스를 향한 가느다란 끈을 내려줌으로써 이야기를 이어간다. 코치 소개로 성우(김태훈 분)의 집에 들어가 동갑내기 수아(문승아 분)의 연습파트너가 되어주는 일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로부터 이 가족의 내밀한 사정과 어떻게든 이 집에 머물고픈 영선의 비틀린 욕망이 <캐리어를 끄는 소녀> 가운데 펼쳐진다.

어떤 것은 마땅한 욕구이고, 어떤 건 무리한 바램이다. 삶이란 이룰 수 있는 것과 닿을 수 없는 것을 분별하는 과정이기도 한데, 열다섯 소녀 영선 앞에 놓인 문제가 꼭 그러한 것이다. 성우는 한때 잘 나가던 테니스 선수였으나 부상으로 목표에 닿지 못하고 추락한 이다. 대단한 부자처럼 보이는 삶을 살면서도 여전히 과거의 추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딸인 수아를 구하려다 어깨를 다친 것이 추락의 결정적 이유가 되었는데, 그는 수아를 혹독하게 가르치며 제가 이루지 못한 꿈을 딸을 통해 대신 풀려고 든다. 좀처럼 아버지에게 따르지 못하는 재능에도 수아 또한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려 한다. 서로의 결핍이 서로의 재능과 맞물려 채워지면 얼마나 좋을까만, 이들의 비틀린 욕구가 서로를 해하는 건 삶이란 꼭 마음과 같지는 않아서겠다.
▲ 캐리어를 끄는 소녀 스틸컷
ⓒ 싸이더스
결코 놓아서는 안 되는 가능성

<캐리어를 끄는 소녀>는 그간 한국영화가 다뤄온 주제며 설정으로부터 얼마 떨어져 있지 않다. 부모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소녀의 상황과 제게 걸맞은 삶 이상의 것을 바라는 욕망, 그리고 결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스스로를 갉아먹는 인물들의 비틀린 내면 등이 모두 그렇다. 그중 어느 하나를 택하지 않는 영화는 제가 가질 수 없는 것을 움켜쥐려 하는 어리석은 군상들의 초상을 그린 드라마에 머무르고 만다. 마치 영화 스스로가 그러하듯이.

이 영화가 그릴 수 있었으나 그리지 않은 것들을 떠올린다. 우선 영화엔 학교가 지워져 있다. 열다섯 소녀에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장소일 학교가 영선과 수아 모두에게서 삭제돼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엘리트 선수의 테니스 코트 또한 없다. 영선과 수아 모두에게 성우가 코치이거나 부모로서 버티고 선 코트만이 있을 뿐이다. 이들이 전력을 기울여 목표를 향해 가는 결전장으로의 코트는 영화 내내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 두 가지 세계가 사라진 자리에서 남겨진 것은 오로지 수아의 비틀린 가정뿐인데, 이를 두고 맞붙는 두 소녀의 드라마를 다룰 것이라면 차라리 공포나 미스터리의 장르성을 본격화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 캐리어를 끄는 소녀 포스터
ⓒ 싸이더스
더 나아질 수 있었음을 아쉬워하며

성우를 비롯해 등장하는 테니스 선수들의 집을 평범한 가정이 아닌 초호화 대저택으로 표현하는 등 빈부의 격차에 천착하려 한 모습이 엿보이긴 한다. 하고 많은 종목 중 테니스를 고른 것도 부유하지 않은 가정에서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특성을 활용하기 위한 선택이었던 듯 보인다. 그렇다면 그로부터 좌절되는 꿈과 재능의 이야기를 끝까지 살려뒀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솔잎만 먹기를 강요받는 존재와 좀처럼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재능의 이야기로 펼쳐질 수 있었던 가능성이 너무나 아까워서 하는 말이다.

영화의 결말은 이 영화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을 더욱 짙게 한다. 가질 수 없는 것을 탐하는 이와 같은 류의 이야기가 흔히 다다르는 예고된 파행을 이 영화는 지나친다. 그리하여 영선은 수아의 집을 나와 기댈 곳 없는 삶을 다시금 살아가게 된다. 그때 영선의 눈에 띈 전단 하나가 있다. 무료 개방하는 테니스 코트다. 낙후된 그 코트에서 테니스를 치던 아이 중 하나가 영선에게 손을 내민다. 무료 코트와 영선에게 내밀어진 손, 그건 꿈이며 관계의 회복일 수 있을까. 세상사와 테니스를 아는 모두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영화적 절망이라 할 수 있을까. 그 또한 아니다. 해법도 절망도 아닌, 이도 저도 아닌 결말에 영화가 닿아 있다고 적는 이유다. 이 같은 결말은 그저 공허함만을 더할 뿐이다. 영선이 마주한 진짜 결말은 영화가 그리는 것 바깥에 있다. 그건 아마도 영화가 외면한 것들, 이를테면 지속될 학교생활, 더는 자리가 주어지지 않는 엘리트 대회, 그리고 사라지고 없는 부모의 자리 같은 것일 테다. 나는 이 영화가 진짜 전장에 보다 가까이 다가서야 했다고 여긴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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