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울 무늬로 전세계 뒤덮은 97세 현역 화가…구사마 야요이, 별세

권근영 2026. 8. 27.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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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 생생한 인생 이어가라” 본지 인터뷰 당시 밝혀
2013년 도쿄 신주쿠의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다 말고 인터뷰에 응한 구사마 야요이. 도쿄=권근영 기자

현대미술의 여왕이 된 광기의 예술가, 구사마 야요이(草間彌生)가 지난 14일 세상을 떠났다. 97세.

27일 교도통신은 “다발성 장기 부전으로 도쿄의 한 병원에서 별세했다”는 부음을 타전했다. 도쿄의 구사마 야요이 미술관과 구사마 야요이 재단도 이날 작가의 별세 소식을 알리며 “마지막 순간까지 붓을 놓지 않고 그림을 그렸으며, 사랑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평생의 신념을 굳건히 지켰다”고 전했다. 장례는 가까운 가족들만 참석한 가운데 이미 치러졌다.

신주쿠 작업실의 개수대에 놓인 붓들. 도쿄=권근영 기자


구사마는 1929년 일본 나가노현 마쓰모토에서 종묘회사 대표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꽃이 온 시야를 덮는 듯한 환각을 느꼈다. 일본화를 전공한 구사마는 1955년 미국의 여성 화가 조지아 오키프에게 편지를 보내 “화가로서의 고된 삶”을 헤쳐나갈 방법을 물었고, 오키프의 조언에 따라 미국으로 이주했다. 클래스 올덴버그, 에바 헤세 등과 함께 전위 미술을 선보였지만, 우울증에 빠져 자살을 시도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1966년 베니스 비엔날레에는 초대받지 않았음에도 1500개의 거울공을 잔디밭에 깐 ‘나르시스 가든’을 설치, 개당 2달러에 거울공을 팔다가 쫓겨나기도 했다.

2024년 프리즈 서울 데이비드 즈워너 갤러리 부스에 출품된 구사마 야요이의 ‘호박’ 시리즈. 연합뉴스

1973년 일본으로 돌아왔고, 1977년부터 도쿄의 정신병원에 자발적으로 입원해 그림을 그렸다. 1989년 뉴욕 국제현대미술센터 회고전으로 재기,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 일본관 대표 작가로 전시하는 등 재평가를 받았다. 어쩌면 개인의 불행으로 끝났을 공황장애는 그의 손에서 ‘무한’과 ‘자기소멸’의 이미지로 재생산돼 현대미술의 성취가 됐다. 물방울 무늬의 호박 조각과 회화, 무한히 이어지는 거울의 방 등이 그의 대표작이다.

1939년의 구사마 야요이, 10살. 사진 구사마 야요이 미술관

2013년 도쿄 신주쿠의 작업실에서 만난 구사마는 “예술을 하며 크나큰 우주를 경험하다 보면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존재로구나’ 싶다”며 “죽을 때까지 예술을 계속할 것이며, 사후 수백 년이 지나도 유효할 메시지를 남기기 위해 혼신을 다하고 싶다”고 말했다. 어떤 예술가로 남고 싶으냐고 묻자 당시 여든넷이었던 작가는 “수 백 년이 지나도 유효할 메시지를 남기고 싶다”며 이렇게 말했다. “미래의 수많은 사람들, 전 세계 여러 사람들이 전쟁이나 테러 공포 없이 자신들의 사랑, 생생한 인생을 이어가길 바란다. 나의 예술이 여러분께 드리는 답은 이것이다.”

그는 작품값이 가장 비싼 여성 미술가로도 꼽힌다. 2023년 한 해에만 전 세계 주요 경매에서 그의 작품 낙찰 총액이 1억9050만 달러에 달했다. 그러나 그에게 예술은 사치품도, 아름다움의 추구도 아니었다. 2013년 인터뷰에서도 “예술은 최고의 의사”라며, 종일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린 뒤 입원해 지내는 근처 병원으로 ‘퇴근’했다.

1966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무단 설치한 ‘나르시스 정원’에 누운 구사마 야요이. 사진 오타 파인 아츠

2016년 일본 문화훈장을 받았고,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과 휘트니미술관, 영국 테이트모던 등지에서 전시했다. 코로나19가 전세계를 휩쓴 2020년 4월, 당시 91세의 구사마는 전속 화랑인 데이비드 즈워너와 빅토리아 미로를 통해 “남겨진 이들을 위해, 또 각자의 이야기와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위해 그리고 우리 영혼을 위해 사랑의 송가를 찾아야 할 때. 코로나19야, 사라져라! 우리는 이 끔찍한 괴물과 싸울 것”이라는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스테델릭 시립 미술관은 다음 달 11일 개막 예정인 구사마 야요이의 회고전을 ‘사후 헌정전’으로 이름 붙였다. 라인 볼프스 관장은 “그의 예술은 전 세계인들에게 말을 걸고, 세대·문화·국경을 초월한다. 그의 작품 속에서 우리는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의 일부가 된다”고 밝혔다.

권근영 기자 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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