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보혁 기자의 ‘예며들다’] 본향 향해 가는 이 땅의 나그네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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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고대 시대나 지금이나 인간은 역시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최근 흥행 중인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를 보며 떠오른 생각이다.
영화는 10년간 이어진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 오디세우스가 아내 페넬로페가 기다리는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기 위한 여정을 그린다.
오디세우스의 귀향은 성경이 말하는 본향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오디세우스는 어느 순간 자신이 이룬 전쟁의 승리가 환대의 법을 악용한 결과였음을 깨닫고 괴로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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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고대 시대나 지금이나 인간은 역시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최근 흥행 중인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를 보며 떠오른 생각이다.
영화는 10년간 이어진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 오디세우스가 아내 페넬로페가 기다리는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기 위한 여정을 그린다. 그러나 신들의 분노를 산 그의 귀환 앞에는 거대한 폭풍과 괴물들, 그리고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의 시련이 기다리고 있다.
장면 하나. 험난한 여정에 지친 오디세우스가 아테나 여신에게 묻는다. “왜 신들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말하지 않는가.” 이 질문은 신앙인이 하나님 앞에서 자주 던지는 질문과 닮았다. 성경의 욥도, 시편 기자도 그랬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에게도 하나님의 뜻이 이해되지 않는 순간이 있었다. 어쩌면 ‘하나님의 뜻을 모르겠다’는 인간의 탄식은 신앙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이 시작되는 질문일 수 있다. 신앙은 하나님의 뜻을 모두 이해한 사람의 확신이라기보다 이해할 수 없는 순간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에 가깝기 때문이다.
장면 둘. 거센 풍랑에 부하들을 모두 잃은 오디세우스는 바다의 여신 칼립소에게 미혹돼 또다시 목적지를 잃은 삶을 살아간다. 7년이 흐른 뒤 오디세우스를 놓아주기로 한 칼립소는 그에게 모든 것을 통제하려 하거나 신을 이기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살아가라고 말한다. 오디세우스는 결국 바다를 정복하려 하지 않고 뗏목에 몸을 맡긴 채 고향으로 향한다.
오디세우스의 여정은 결국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과정이었다. 그와 부하들은 신의 뜻을 거슬렀고, 그 과정에서 고난을 자초했다. 돌이켜보면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더 강한 힘이나 더 치밀한 전략이 아니었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통제해야 한다는 집착을 내려놓는 일이었다.
신앙도 어쩌면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끊임없이 삶을 통제하려 한다. 내가 계획하고, 내가 결정하고, 내가 책임져야 안심한다. 그러나 모든 것을 내 뜻대로 움직이려는 순간, 어느새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높은 자리에 올려놓게 된다. 믿음은 내가 모든 것을 쥐는 것이 아니라, 내가 쥐고 있던 것을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데서 시작된다.
장면 셋. 마침내 고향에 도착했지만 오디세우스는 정작 그곳을 알아보지 못한다. 오디세우스의 귀향은 성경이 말하는 본향을 떠올리게 한다. 돌아가야 할 본향이 어디인지, 왜 그곳으로 가야 하는지를 모른 채 살아간다면 귀향은 단순한 이동에 그칠 뿐 그 끝은 오히려 허무함으로 남을 수 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아브라함과 믿음의 사람들은 이 땅에 사는 자신들을 외국인과 나그네라고 고백한다. 그들이 사모한 것은 단순히 과거에 살던 집이 아니라 더 나은 본향, 곧 하늘에 있는 본향이었다. 그리스도인이 갈망해야 하는 본향 역시 잃어버린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장면 넷. 오디세우스는 사냥에 앞서 활을 튕기며 사냥감에게조차 도망칠 기회를 준다. 이는 영화를 관통하는 ‘제우스의 법’과도 연결된다. 제우스의 법은 나그네가 찾아오면 음식을 내놓고 머물 자리를 마련하며 그를 대접하는 환대의 원칙이다. 하지만 오디세우스는 어느 순간 자신이 이룬 전쟁의 승리가 환대의 법을 악용한 결과였음을 깨닫고 괴로워한다. 영화에서 환대는 단순한 친절이 아니다. 공동체를 지탱하는 질서다. 그래서 그 법을 어긴 일은 공동체와 문명의 붕괴, 학살로 이어졌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라는 환대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떠올려 본다. 여기에 복음의 중요한 역설이 있다. 기독교에서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자격을 증명해 받아들여진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여진 사람이다. 그렇기에 그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다른 이에게도 자리를 내어줄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우리는 모두 본향을 향해 나아가는 이 땅의 나그네다. 교회 역시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가 은혜로 받아들여진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라면 그곳은 마땅히 이 땅의 나그네들을 위한 환대의 장소여야 한다.
어쩌면 오디세이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어떻게 집에 돌아갈 것인가’가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나는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가, 그리고 그곳으로 돌아가는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가깝다.

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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