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인권'인데 왜 다른가... 북한 인권 운동 30년의 단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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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사회 언저리에서 활동해 온 지난 10여 년 동안, 나는 꽤 많은 연대의 자리들을 다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난 30년 북한인권의 운동사는 한국 시민사회와는 단절된 역사로 달리 걸어왔다.
비슷한 북한인권 단체들과의 연대망은 작게 구축되는 듯했으나 주요 시민사회 담론 안으로 포섭되지도, 들어가지도 않았다.
이렇듯 연대 없는 북한인권운동은 한국 시민사회에서 고립되고 더 깊이 해외 자원에 의존하게 되었으며, 그 의존은 다시 '정치적 의제'라는 분류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상황으로 고착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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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일 기자]

여러 단체가 연대한 연대 성명의 긴 명단에도, 공동 주최 단체의 목록에도 북한인권 단체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왜 없을까. 나는 궁금했다. 언제부터 없었을까. 애초에 있었던 적이 있기는 한가.
이 질문을 따라가 보면 하나의 역사적 시점에 닿는다. 지난 1편에서 나는 북한인권 의제가 소수 담론으로 고립된 네 층위의 구조적 문제를 짚었다. 이번 글은 이 구조적 문제를 시간의 축 위에 펼쳐놓고 들여다보고자 한다.
북한인권이 지난 30년 동안 한국의 다른 인권운동들과의 관계에서 실제로 어떤 경로를 걸어왔는지 보자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난 30년 북한인권의 운동사는 한국 시민사회와는 단절된 역사로 달리 걸어왔다. 즉 단절사(斷絶史)다. 이 단절사를 설명하기 위해 다소 앞선 역사적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고자 한다.
여기서 '한국 시민사회'의 범위와 의미는 노동, 젠더, 인권, 차별 금지, 성소수자, 페미니즘, 장애인, 복지, 사회개혁, 정치개혁 등 대개 진보적 어젠다 다루는 시민사회를 통칭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같은 시대에 도착한 두 인권 이야기
1995년 1월 9일,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네팔 출신 산업연수생 13명이 쇠사슬로 몸을 묶고 농성을 시작했다. 손팻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때리지 마세요", "우리도 인간입니다". 노동운동이자 인권운동이었다.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임금체불과 폭행에 시달리던 이들의 농성은 큰 파장을 일으켰고, 그해 7월 민주노총과 종교계, 시민단체들이 모여 한국 최초의 이주노동자 연대 조직인 외국인노동자대책협의회(외노협)이 만들어졌다.
1995년 1월 명동성당 농성은 한국 이주노동자 운동사의 결정적 분기점으로 평가받는 사건으로, 이에 앞서 1994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강당에서 산업재해 피해 이주노동자들의 농성이 있었다.
이주노동자 운동은 이후 산업연수생제도 폐지 투쟁을 거쳐 2004년 고용허가제 도입으로 이주노동자의 노동자성을 법으로 인정받아 냈다. 하나의 농성이 연대를 낳고, 연대가 제도를 바꾼 30년이었다.
같은 시기, 또 하나의 흐름이 한국 사회를 향해 오고 있었다. 고난의 행군을 전후로 북한을 떠난 사람들이 중국을 거쳐 도착하기 시작한 것이다. 1998년까지 국내 입국자는 모두 합쳐 947명이었지만, 이후 해마다 늘어 2002년에는 연간 1000명을 넘어섰다. 국경을 넘어온 사람들, 낯선 제도와 시선 앞에 선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두 흐름은 닮아 있었다.
그러나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두 존재는 한 번도 같은 광장에서 만나지 못했다. 이주노동자 의제는 '노동'과 '인권'이라는 보편 언어를 매개로 노동운동과 종교계, 진보적 시민단체의 연대망에 접속하며 성장했다.
북한이탈주민과 북한인권 의제는 반공주의의 유산과 보수성향의 기독교 네트워크, 그리고 훗날 해외 기금의 자원 속에서 성장했다. 같은 광장에서 목소리를 내고 거리를 걸으면서도 서로를 향해 손을 내밀지 않았다. 서로가 거기에 있다는 사실조차 잘 알지 못했다.
국가가 먼저 이름을 정했다
왜 만나지 못했을까. 답의 첫 자락은 법전에 있다. 북한을 떠나온 사람들을 처음 맞이한 것은 시민사회가 아니라 국가였고, 국가는 법률로 이들의 이름을 정해왔다. 1962년 국가유공자 및 월남귀순자 특별원호법은 귀순자에게 국가유공자에 준하는 지위를 부여했다.
1979년 월남귀순용사 특별보상법에서 이들은 '용사'가 되었다. 1993년 귀순북한동포보호법에 따라 '용사'는 보호 대상 '동포'로 바뀌고 지원 규모는 대폭 줄어든다. 1997년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이들은 '이탈주민'이 되었다. 국가유공자에서 용사로, 용사에서 동포로, 동포에서 이탈주민으로. 어느 것도 당사자가 지은 이름이 아니다.
민간의 이름도 사정은 비슷했다. 1994년 언론에서 처음 쓰인 '탈북자'가 보편화되었고, 2005년 정부가 기존 '탈북자'라는 표현이 불편하다는 당사자들의 의견을 수용하여 어감을 순화한다며 '새터민'을 내놓았지만 당사자들의 반발에 부딪혔다. 2008년 정부는 이 호칭을 가급적 쓰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냉전의 언어로 호명된 존재는 냉전 이후의 시민사회 연대망에 접속하기 어려웠다. 민주화 이후 새로운 의제들이 저마다 연대망을 찾아가던 1990년대, '탈북민' 의제만은 시민사회가 개입하기도 전에 이미 국가의 언어 속에 놓여 있었다. 첫 단추는 법전 안에서 끼워졌다.
확장되는 인권의 언어와 멀어지는 북한 인권
2000년대는 인권의 언어가 폭발적으로 확장된 시대였다. 2001년 오이도역 리프트 추락 사고를 계기로 장애인 이동권 투쟁이 지하철역에서 사회의 시선을 붙잡았고, 2005년에는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과 민법 개정으로 호주제가 폐지되었으며, 2008년에는 성소수자 운동이 광장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2003년에는 고용허가제가 도입되며 이주노동자들이 노동권과 체류권을 요구하는 투쟁이 본격화되었고, 2007년에는 이주노동자노조(MTU)가 설립되며 국적을 넘어선 노동권 요구가 사회적 의제로 떠올랐으며, 2000년대 중반부터는 학생인권조례 운동이 확산되어 2010년 경기도에서 첫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었다.
또한 2004년부터 HIV/AIDS 감염인 인권운동이 강제격리와 의료 차별에 맞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2003년 농민 전용철·홍덕표 사망 사건과 2004년 빈곤사회연대 결성을 계기로 농민·빈곤층의 생존권과 주거권 문제가 인권의 언어로 재구성되었으며, 2009년 용산참사는 철거민 운동을 한국 사회의 중심적 인권 의제로 끌어올렸다.
이 모든 흐름은 인권을 '특정 집단의 권리'가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의 구조와 제도, 일상과 관계를 다시 설계하는 언어로 확장시킨 결정적 전환기였다. 모두 인권의 범주에 있는 운동들이었다.
같은 시기 북한인권운동의 무대는 서울이 아니라 워싱턴과 제네바였다. 2003년 유엔 인권위원회가 첫 북한인권결의안을 채택했고, 2004년 10월 미국 의회는 북한인권법을 제정했다. 분명한 성과였다.
그러나 의제의 중심 무대가 해외로 이동하는 동안 한국 시민사회 안에서 이 의제를 위한 언어와 연대망을 만드는 작업은 뒤로 밀렸다. 비슷한 북한인권 단체들과의 연대망은 작게 구축되는 듯했으나 주요 시민사회 담론 안으로 포섭되지도, 들어가지도 않았다. 북한인권운동 돈의 흐름도, 발화의 무대도, 입법의 무대까지도 바깥에 있었다.
이 시기의 단절을 보여주는 것은 양쪽 운동의 걸어온 길을 보면 알 수 있다. 한국 주요 시민사회와 인권 단체들의 연대회의, 공동 성명, 기념일의 목록에 북한인권 단체의 이름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동시에 북한인권 단체들의 행사와 집회에는 비슷한 북한인권 단체들 이외에 한국 시민사회와 인권 단체 이름도 연대 발언도 찾아보기 어렵다. 같은 도시에서 활동하면서도, 같은 인권 범주 안에 있으면서도 서로의 시선이 마주치지 않는 관계였다. 어쩌면 서로 피한 것이기도 하다.
두 개의 법과 서로 다른 시선들
한국 국회에는 십수 년째 표류해 온 두 개의 인권 입법이 있다. 하나는 2007년 처음 발의된 이래 발의와 폐기를 반복해 온 차별금지법이고, 다른 하나는 2005년 처음 발의되어 11년 만인 2016년에야 제정된 북한인권법이다.
두 법안은 모두 '인권'을 다루지만, 각각이 놓인 정치적 맥락과 이해관계가 달랐기 때문에 전혀 다른 경로를 밟았다. 차별금지법은 성소수자·여성·장애인·이주민 등 한국 사회 내부의 소수자 권리를 제도화하는 법안이었고, 북한인권법은 북한 주민의 인권을 외교·안보 맥락에서 다루는 법안이었다.
즉 하나는 국내 사회구조와 인식을 바꾸는 법, 다른 하나는 북한 주민이 처한 인권상황 공론화와 대북 정책의 방향을 규정하는 법이었다. 이 차이는 국회에서의 진영별 태도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차별금지법은 주로 보수 진영의 반대로 막혀 왔고, 북한인권법은 주로 진보 진영의 유보 속에 표류했다.
하나는 사회적 가치관의 변화를 요구하는 법으로, 다른 하나는 북한 압박용 대북 정책의 방향을 둘러싼 법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결국 국회가 두 개의 인권 법안을 서로 다른 정치적 논리와 우선순위로 바라본 셈이다.
북한인권법은 제정 이후에도 표류를 끝내지 못했다. 이 법이 설치를 규정한 북한인권재단은 여야의 이사 추천 공방 속에 지금까지 출범하지 못했다. 통일부가 국회에 이사 추천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낸 것만 열네 차례다.
반면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시민사회의 목소리는 정권과 진영을 넘어 꾸준히 이어져 왔다. 북한인권재단 출범을 촉구하는 시민사회의 목소리는 - 적어도 진영을 넘어선 형태로는 - 들리지 않았다. 두 법안의 운명이 이렇게 갈라진 것은 인권이라는 단어가 한국 정치에서 항상 같은 의미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차별금지법은 한국 사회 내부의 구조적 변화를 요구하는 법으로, 북한인권법은 외교·안보 영역에서의 정책적 선택으로 이해되었다. 같은 '인권'이라도 어떤 집단의 인권을 말하는지, 그 인권이 국내 문제인지 외교 문제인지에 따라 정치적 저항과 동원 방식이 달라졌던 것이다.
같은 2016년, 한국 사회는 강남역 사건 이후 페미니즘의 대중화라는 거대한 전환을 통과하고 있었다. 앞서 나열했듯, 한국 사회에서 인권 담론은 여러 층위에서 복합적으로, 동시다발적으로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벽들을 허물고 인식을 바꾸는 방향으로 진보해 왔다. 한쪽에서 인권의 언어가 일상을 재구성하는 동안, 다른 한쪽에서 같은 언어는 내용보다 진영이 먼저 읽히는 자리에 놓여 있었다.
2020년대 들어 풍경은 더 조용해졌다. 코로나 이후 북중 국경이 봉쇄되면서 한 해 천 명을 웃돌던 입국자는 2021년 63명까지 떨어졌고, 이후에도 연간 200명 수준에 머물러 있다. 누적 입국자 3만 4500여 명. 새로 오는 사람은 줄었지만 이미 와 있는 사람들의 삶은 계속된다. 일자리, 주거, 교육, 차별. 어느 것 하나 한국 시민사회의 의제가 아닌 것이 없는데, '북한인권' 의제가 모든 의제를 마치 집어삼킨 듯 느껴지기도 한다.
서로 다른 기준과 시선들
북한인권운동이 주요 한국 시민사회와 단절된 채 다른 경로를 걸어왔음을 살펴봤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는 이 단절의 책임이 어느 한쪽에 있다고 느낄지 모른다. 그러나 단절의 문은 양쪽에서 잠겨 있었다.
시민사회 쪽에서 북한인권 의제는 '정치적 의제'로 분류되었고, 이 분류는 곧 북한인권 의제를 회피하는 근거가 되었다. 연대했다가는 진영 논쟁에 휘말릴 위험, 북한 정권과의 단절을 주장하는 보수 단체와 같은 자리에 서게 될 위험, 남북관계에 흠집을 낼 위험 등 단체마다 이 계산은 합리적이었다.
다만 이러한 합리적 회피가 쌓여가는 동안, 북한인권 의제가 보편적 인권의 공론장 바깥으로 밀려나 있었다. 연대가 어려웠던 데에는 북한인권운동 안쪽의 이유도 있다.
일부에서는 대북 전단처럼 자국민의 안보 우려가 제기되는 방식에 이견을 낸 목소리를 이념의 잣대로 재단하거나, 이주민·다문화 같은 다른 보편 인권 의제와는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런 장면들이 쌓일 때, 시민사회가 이를 '같은 인권'의 언어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북한인권운동 쪽에는 '북한 문제의 특수성'이라는 논리가 있었다. 북한인권은 다른 인권 문제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인식, 시민사회의 연대보다 국제사회의 압박이 더 효과적이라는 판단이다. 실제로 국제사회의 압박은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 설치와 2014년 보고서라는 성과를 낳기도 했다.
솔직히 말하면, 진보적 시민사회에 대한 오랜 불신도 연대를 가로막는 큰 이유 중 하나다. 북한인권운동 쪽에서는 평화나 남북 교류를 말하는 시민단체들을 북한에 우호적인 세력으로 여겨왔고, 반대로 그 시민단체들은 북한인권운동을 냉전적 반공 진영의 일부로 바라봐왔다.
양쪽 다 상대를 특정 진영으로 못 박아온 것이다. 이렇듯 연대 없는 북한인권운동은 한국 시민사회에서 고립되고 더 깊이 해외 자원에 의존하게 되었으며, 그 의존은 다시 '정치적 의제'라는 분류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상황으로 고착화시켰다. 양쪽에서 문을 열고 접점을 찾아야 한다. 언젠가는 그리될 것이다.
1995년 1월 명동성당 들머리의 농성과 같은 시대에 도착하기 시작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이 글을 열었다. 30년이 지난 지금, 두 운동의 도착지는 다르다.
"우리도 인간입니다"라는 팻말에서 시작한 이주노동자 운동은 여전히 많은 과제를 안고 있지만, 연대 조직을 만들고 제도를 바꾸며 한국 시민사회의 인권 지도 안에 자신의 자리를 새겼다. 북한인권 의제는 여전히 이 지도 바깥에 있다. 무엇이 이 차이를 만들었을까.
이 글은 1편에 이어 북한인권이 시민사회와 연결되지 못하는 이유를 운동사적 관점에서 들여다보고자 했다.
[조경일의 북한인권]
① 왜 북한 인권은 고립되었는가 https://omn.kr/2jdfj
덧붙이는 글 | 조경일 작가는 현재 피스아고라 대표로 활동한다. 정치개혁, 분단체제 해체 등을 연구하며 주체적 시민의 참여를 실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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