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사양하니 어르신이 건넨 말... 그 '용기'를 기록합니다

차성덕 2026. 8. 20.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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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작가회의 르포·기록문학분과위원회에서 [지도에 없는 좌표 _기록(문학)을 말하다]를 연재합니다.

자기 삶에 충실히 기록 작업을 해나갔을 뿐이라는 그의 말처럼, 안미선의 글쓰기는 자기가 겪은 시대와 호흡하며 시작됐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기록한다는 것은 그의 삶에서 작가가 선택한 장면들과 해석한 이야기로 구체적인 인과관계를 만들어내는 거고, 그에 대해서 책임지는 거죠. 다시 말해서 분량이 한정된 책에서 인물이 어떻게 그려지느냐는 전적으로 작가의 몫인 거죠. 그리고 동시에 작가는 그 인물이 살면서 지키려고 한 지향 안에서 인과를 만들어내야 해요. '나는 나의 삶을 이렇게 봅니다. 내가 그 선택을 한 것은 이것 때문입니다' 하는 인물의 말을 되도록 따라 가야 해요."

한 인물이 삶에서 추구해 온 가치를 기준으로 그가 살아온 삶에 인과적인 맥락을 만들어내는 게 기록 작가의 의무이자 책임이라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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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에 없는 좌표] 한국작가회의 르포·기록문학분과 기획연재 ③작가 안미선 인터뷰 - 기록자 차성덕

한국작가회의 르포·기록문학분과위원회에서 [지도에 없는 좌표 _기록(문학)을 말하다]를 연재합니다. 타인의 삶을 말하고 사건을 들여다보는 기록이 널리 쓰이고 읽히지만, '무엇이 기록(글)인가'에 대해서는 쓰는 이도 읽는 이도 선뜻 단정해 말하기 어렵습니다. 기록 활동을 이어온 이들의 생각과 이야기를 따라가며, 기록 글이 지닌 의미와 자리를 더듬어 보려 합니다. <기자말>

[차성덕 기자]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 사람과 그 말을 진지하게 들으려고 하는 사람, 이 두 사람의 만남은 말하자면 하나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피에르 쌍소)

한 사람이 있다. 또 다른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이 이야기를 시작하면 다른 사람은 듣고 기록한다. 이야기는 '말'을 넘어 눈빛이나 몸짓, 침묵과 같은 둘 사이의 모든 것을 통해 전달된다. 말하는 자와 듣는 자 사이에 보이지 않는 격렬한 역동이 인다. 두 개의 강물이 하나의 바다로 합쳐지듯, 일인분이었던 이야기는 상대에게로 건너가 모두의 삶으로 확장된다.

한국작가회의 르포·기록문학분과가 만난 세 번째 기록자는 안미선이다. 그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나긋한 목소리가 떠오른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리기 전에 오는 긴 침묵도 함께. 그는 늘 경청의 자세를 취한다. 먼저 충분히 들은 후 "제가 이렇게 이해한 게 맞나요?" 묻고선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온전한 문장으로 말을 건넨다. 아마도 그건 타인의 이야기를 오래 들어온 이에게 축적된 태도이지 않을까. 숙련된 장인의 몸에 그 일의 흔적이 남듯 말이다.

안미선은 200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인터뷰, 구술기록, 에세이 등 기록문학의 여러 장르를 폭넓게 오가며 기록 작업 중이다. 지난 2월 출간한 <길 위의 간호사>¹는 그의 스물세 번째 책이다. 이십 년 넘게 꾸준히 이어오고 있는 그의 작업을 단단히 잇고 있는 것은 단연코 '여성(들)'이다. 그의 작업은 여성에서 시작돼 여성을 향한다. 그는 여성들의 말과 삶을 기록하며 사회가 규정한 여성의 역할과 자리를 짚어내고 질문을 던지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글 속에서 그는 한 여성으로서 기꺼이 자신을 드러내며 다른 여성들이 있는 장소로 건너간다. 그들의 조용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리로 말이다.

초록이 만발하던 여름날, '여성', '작가', '기록'이라는 세 가지 화두를 품고 안미선을 만났다.
 안미선 작가 지난 6월 기록문학 작가, 안미선을 만났다. 2005년 계간문예지 <비평과 전망>에 작품 <한 아이>를 발표하며 등단한 그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 이야기를 듣고 기록해왔다
ⓒ 성덕
여성, 목소리가 필요한 사람들 곁에서

우리가 만난 곳은 오래된 이층집을 개조한 카페였다. 마당에 아름드리나무가 보기 좋다며 웃는 그의 얼굴이 십 대처럼 꾸밈없었다. 듣는 거에 익숙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던 그는, 이야기하는 중에 혹시라도 자신을 부풀리거나 포장하게 될까 봐 경계하는 중이라며 신중한 마음을 드러냈다.

"저는 제 말이 거창해지는 거를 원치 않아요. 왜냐하면 그동안 있는 그대로 보고 기록해 왔거든요. 제가 할 수 있는 크기만큼 살아왔어요. 그보다 더 한 것도 없고 덜 한 것도 없어요. 그 당시의 상황, 그 당시의 충동, 그 당시의 여건, 그 당시에 인연들.... 이런 게 다 만나져서 그 작업을 했어요. 한 발 한 발 뗄 때마다 '아, 이번엔 이쪽으로 발길이 갔구나. 이때까지 해온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다행이다' 이런 마음으로 나아갔던 것 같아요."

자기 삶에 충실히 기록 작업을 해나갔을 뿐이라는 그의 말처럼, 안미선의 글쓰기는 자기가 겪은 시대와 호흡하며 시작됐다. 팽창하는 민주화 과정에서 등장한 여성주의 활동에 영향을 받으며 자연스럽게 여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 거다.

"제가 사회에 나왔던 2천 년대 초반은 80년대 6월 민주화 항쟁과 90년대에 일어난 여러 가지 여성운동의 성과가 나오는 때였어요. 억눌렸던 개인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우리 사회도 그런 목소리를 주목해 주었고요. 그런 시대 분위기 속에서 여성 작가들이 대거 출현했고, 반성폭력 운동과 여성 노동자 글쓰기 운동 등이 분출됐어요. 저도 성매매 성폭력 피해 지원 단체에서 자원 활동을 했는데, 그때 자신의 삶과 목소리를 기록해 달라고, 글 쓸 사람을 구하는 여성들을 만났어요."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던 그는, 졸업 후에 기지촌 여성들을 만나 그 삶을 기록하고 구성하는 데 참여했다. 그렇게 완성된 책이 기지촌 현장 출신 운동가 김연자 자서전 <아메리카타운 왕언니, 죽기 오분 전까지 악을 쓰다>이다.

"저의 작업은 그런 식이었어요. 세상의 무언가를 보고 표현하고 싶은 마음으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걸 한 거죠. 이후로도 내 바로 옆에 있었던, 자기 목소리가 기록되기를 바라고 싸우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어요. 굉장히 오래 기다린 사람들이었어요. 10년, 20년 동안 자기 목소리를 내려고 했지만 잘 안됐던 사람들이죠. 그들을 만났고,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기 시작했어요."

이후 안미선은 여러 목소리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주로 여성들이었다. 미혼의 여자, 결혼한 여자, 아이를 낳은 여자, 어린 여자, 나이든 여자, 노동현장의 여자, 피해자인 여자, 저항하는 여자, 싸우는 여자... 하지만 성별이 같다는 공통점 외엔 전부 다른 존재들이었다. 그는 섣부른 공감으로 상대와 자신의 차이를 좁히려 하기보다 오히려 적절한 거리를 두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그 거리 덕에 감지할 수 있었던 서로 다름은 그가 만난 이들의 삶을 더욱 생생하게 전달해 주곤 한다. 타인과 나의 차이를 가늠할 수 있다는 것은 상대가 살아온 삶에 대한 존중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이 용감하게 살아가는 이야기에 늘 끌린다고 했다.

"하루는 식당에서 어느 어르신이 커피 한 잔을 제 옆에 놔주시더라고요. 사양하려 했더니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받아도 돼요. 사람은 얕은 정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 아무 말 못 했어요. 저 말이 그분에게서 나올 때까지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그 사람을 통과했을까 싶어서요. 그냥 묵묵히 일상을 버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포기하지 않으려고 얼마나 안간힘을 썼을까 싶어서요. 어떤 경우에도 생을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게 용기잖아요."

그 삶이 귀한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그냥 스쳐 지나갈 말들이었으리라. 안미선은 기록 작업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자신이 아름다웠다는 걸 모르는 사람도 자신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스스로 자긍심을 가질 수 있게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라고.

"누군가의 삶을 기록할 때, 내가 상대에게 던진 질문이 그 사람의 삶을 다르게 구조화할 수 있다고 봐요. 그렇게 생각하면 잘 듣고 잘 질문하는 이 일에 어떤 자긍심이 생겨나요."

자기 삶이 별거 아니라고 쑥스럽게 웃는 사람들이 있다. 한 번도 우리 사회가 주목한 적 없이 그늘 속에서 살아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의 꾸준한 일상이 작게는 가정을, 크게는 이 사회를 살리는 힘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기록자의 시선이 움직일 때 누군가의 삶이 새롭게 탄생할 거라는 것 또한.

작가, 쓰이지 않은 이야기를 기억하는 자리

안미선은 개인을 제대로 들여다보면 그 사람을 구성한 시대와 사회가 보일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글 구성의 전략이라기보다 작가로서 그가 사회를 바라보는 태도였다.

"(기록자로서) 저는 인물에 관심이 많아요. 누군가의 이야기를 기록할 때 그가 처한 시대적 상황이나 조건을 항상 염두에 두려고 해요. 같은 문학이어도 소설과 기록문학엔 인물을 대하는 데 차이가 있죠. 작가의 가치관 속에서 창조된 소설 속 인물과 달리, 기록문학에 등장하는 인물은 이 세상에 실재하는 사람들이거든요. 말하자면 작가가 감정 이입하거나 이해할 수는 있지만 전부 다 알 수는 없는 인물, 결코 다 해석이 되지 않는 인물이죠. 나의 경험과 입장을 대입해서 최선을 다해 그 인물에게 다가가면서도 내가 본 게 이 사람의 모든 것은 아니라고 겸손하게 비워두려고 해요."

스무 권이 넘는 책을 쓰는 동안에도 자신이 드러낼 수 있었던 것과 드러낼 수 없었던 게 있었다는 사실을 그는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기록한다는 것은 그의 삶에서 작가가 선택한 장면들과 해석한 이야기로 구체적인 인과관계를 만들어내는 거고, 그에 대해서 책임지는 거죠. 다시 말해서 분량이 한정된 책에서 인물이 어떻게 그려지느냐는 전적으로 작가의 몫인 거죠. 그리고 동시에 작가는 그 인물이 살면서 지키려고 한 지향 안에서 인과를 만들어내야 해요. '나는 나의 삶을 이렇게 봅니다. 내가 그 선택을 한 것은 이것 때문입니다' 하는 인물의 말을 되도록 따라 가야 해요."

한 인물이 삶에서 추구해 온 가치를 기준으로 그가 살아온 삶에 인과적인 맥락을 만들어내는 게 기록 작가의 의무이자 책임이라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런데 문득, 한 권의 책 속에 포함되지 못한 이야기들은 어디로 가는지 궁금해졌다.

"책에 담기지 못한 이야기는 내 마음에 남아 있어요. 그것들은 내가 평생 가져가야 하는 거예요. 이야기 안에서는 그 세계가 전부겠지만 그로부터 한 발 물러서 보면 항상 여분의 이야기가, 말로 다할 수 없는 이야기가 남아 있어요. 그리고 많은 사람의 삶은 오히려 그런 여분의 것으로 이뤄져 있고요. 내가 전부 기록할 수 없고, 내가 기록한다 해도 그 사람의 아주 일부분을 기록하는 거란 걸 기억해야 해요."

온 마음을 다해 글을 쓴다는 건 이런 거겠구나 싶었다. 그 과정이 녹록하지 않을 거 같았다. 작가로서 그가 느끼는 기쁨과 괴로움이 궁금했다. 그리고 그걸 극복하는 힘에 대해서도.

"작업을 할 때마다 늘 나름의 배움이 생겨요. '여기가 내 끝'이다 싶은 한계점에 갔다가도 그걸 극복해 내면 그다음에는 다른 지점에 가 있게 돼요. 그래서 작업의 고통이나 괴로움은 남에게 말할 필요 없기도 해요. 오롯이 내 역사가 되니까요. '나는 이런 사람이었구나. 나는 이런 걸 도저히 넘기 힘들어했구나. 그리고 내가 이런 걸 넘을 때 나는 이런 행동을 했고, 나는 생각보다 강한 사람이구나 그걸 넘는구나, 그리고 긍정하는구나.' 그걸 알아가는 기쁨이 있죠. 내가 결국엔 해낼 건 알지만 늘 두려움과 싸워요. '이거를 해내야 하는데 내가 못 하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이죠. 그래도 할 수 있다고 되뇌어요. '왜 못해? 이때까지 했는데 왜 못해?' 그러다가 해냈을 때는 다행이다 싶어요."

그가 잠시 창밖에 시선을 던졌다. 나도 질문을 멈추고 그를 보았다. 자신이 만났던 사람들의 미처 다 쓰지 못한 이야기를 속으로 되뇌는 걸까 생각할 때, 그가 고백하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쓴 문장 속에 그 당시의 내 호흡과 숨, 맥박이 전부 다 녹아있다는 생각을 해요. 내 생명의 일부가 책 속에 담겨서, 이 책이 정말 살아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 삶의 일부를 바쳤기 때문에 독자들도 이 책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럴 거라는 믿음이 있어요."

쓰는 사람이 읽는 사람의 태도를 결정한다는 것을 그의 책을 읽으면서 알았다. 진심을 다해 누군가의 말을 들은 그 덕분에 나 또한 그 이야기를 진심을 다해 읽을 수 있었다. 작가가 책에 쏟아 부은 생명력이 그렇게 독자에게 전달되는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묵직해졌다.

타인과 경계를 허무는, 기록문학
 안미선 작가는 말한다. "무언가를 지켜보고 느꼈을 때 드는 판단, 느낌, 감각을 내가 언어로 표현하는 일의 가치를 믿어요. 그리고 그것이 사회 공동체에 도움이 될 거라고도요. 이 믿음이 내가 작가로서 당당할 수 있는 이유죠."
ⓒ 성덕
나 아닌 타자와 연결된다는 것은 언제나 마찰을 전제로 한다. 타인의 이야기를 기록한다는 것은 그 마찰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각오가 아닐까. 안미선은 이 경험을 "문득 경계를 만난다"²라고 표현했다. 타인이라는 경계를 만나는 건 기록 작업에서 피할 수 없는 사건이다. 바로 그 때문에 오늘날 기록문학의 가치에 더 주목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저는 기록문학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튼튼하게 한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기록은 타자를 만나게 하는 일이거든요. 내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어보겠다는 것, 그 사람의 삶에 나를 대입해서 적극적으로 생각해 보겠다는 태도 자체가 타자와 함께 사는 이 사회에서 어떤 공동체를 만들어 가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잖아요. 그래서 저는 기록을 많이 읽고 쓰게 될 때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지고 타인을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이 생긴다고 봐요."

기록문학에는 읽는 사람을 바꾸고 새로운 질문이 탄생하도록 이끄는 힘이 있다는 거였다.

"우리가 속한 사회의 이데올로기나 관습과 같은 정형화된 틀에서만 자신을 바라본다면 스스로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할 수 없어요. 더 가지고 싶은데 나만 못 가졌다, 나는 억울하다는 식의 이야기가 판칠 거예요. 그러니까 이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놓은 이야기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거죠. 그런데 타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자기 경험에 갇혀있을 때와는 다른 어떤 빛을 볼 수 있는 넓은 시야를 확보하게 돼요. 타인의 이야기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내 생각들이 계층, 젠더, 종교나 국적 등, 내가 처한 조건 속에서 우연히 만들어진 가변적인 거라는 걸 깨닫게 된다면 나의 행복은 무엇인지, 나의 지향과 가치는 무엇인지, 어떤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지. 이런 질문에 스스로 대답할 수 있게 되는 거죠."

자신이 기록한 누군가의 이야기를 읽은 사람들이 그 속에 녹아있는 어떤 가치를 발견한다면 기존에 없던 새로운 질문을 이 사회에 던질 수 있으리라 그는 믿었다.

"이야기가 기록될 때는 밀실에서 시작하지만 결국 광장에서 유통돼요. 한 사람의 삶이 기록됐을 때 그 사람의 편에 설 수 있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생겨날 수 있는 거죠. 이 사람(인터뷰이)은 지금 나(기록자)만 보고 이야기를 하는 거지만, 기록된 이야기는 결국 광장에 던져지기 때문에 광장에 모인 모두에게 그 가치가 기능하게 되는 거죠. 시간이 지나서 책이 사라진다 해도, 기록에 담겨있던 생각의 씨앗은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파될 거예요. 그러면 어떤 이는 그 씨앗을 토대로 새로운 창작을 할 수도 있을 거고요. 그렇게 기록의 선한 영향력이 계속 이어질 수 있는 거죠."

그는 기록문학을 읽는 독자뿐만 아니라 기록 작업을 수행하는 기록자들이 더 많이 늘어나길 소망했다. 기록 작업을 하고 싶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좋을지 모르는 이들을 위해 조언을 구했다.

"기록문학은 한국 문학계에서도 좀 새롭고 다른 분야예요. 등단 제도가 딱히 없고 장르도 정해져 있지 않아요. 그래서 전범을 삼을만한 건 없다고 저는 생각해요. 특히 우리나라의 기록문학에서는요. 자기가 가진 자원을 기반으로 다양한 기록 작업을 해보면 좋겠어요. 저는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고 여성주의 활동에 관심이 있었고 여성 노동자 글쓰기에도 관심이 있었어요. 이런 것들이 저의 어떤 스타일과 작업들, 그리고 함께하는 동료들을 만들어냈어요. 쓰고자 한다면 각자의 자원을 발판으로 충분히 창의적인 새로운 논픽션을 쓸 수 있다고 봐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남과 다른 경험, 자기가 가진 활동 관계 속에서 자기만의 논픽션을 만들어 가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안미선은 자기 다음에 올 사람들을 믿으며 기록한다고 했다. 그의 굳은 믿음은 기록 작가로서 세상과 연결되고 아직 만나지 않은 동료들과 연결되며 스스로의 자부심이 된다.

빛이 있는 동안 빛을 향해 걷는 사람
 안미선이 인터뷰 작업에 대해 쓴 에세이 <당신의 말을 내가 들었다>의 표지. 누군가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건, 세상의 온도를 낮추고 풍경마저 바꿔버리는 힘이 될 수 있다.
ⓒ 낮은산
인터뷰 말미쯤, 기록 작업에 대한 그의 에세이 <당신의 말을 내가 들었다>의 표지가 떠올랐다. 흰 눈이 소복하게 쌓인 들판에 텅 빈 의자 두 개가 나란히 놓여있는 풍경이었다.

"'여자들의 이야기는 눈송이처럼 소리 없이 땅을 적시고, 땅의 무례한 온도를 낮추다가, 어느 순간 눈에 띄게 쌓이면서 세상의 풍경을 변화시킨다'라고 그 책에 썼어요. 편집자님이 그걸 보고 이 표지를 제안하셨어요. 표지 그림을 보면 눈이 하얗게 쌓여 있어요.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떠났지만, 그사이 내린 눈은 녹지 않고 남아, 세상의 풍경을 바꾼 거예요."

그는 자신의 글이 세상의 온도를 낮추는 눈송이가 되면 좋겠노라 웃었다. 다음에 오는 글들이 첫눈 위로 내리는 눈처럼 더 소복이 쌓일 걸 알기 때문이었다.

"내가 이 세상에 있지 않더라도 제가 이제껏 해왔던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기록이 이곳에 남아서 그들의 가치를 부풀려주고, 다음에 또 작업할 이들을 격려해 줄 거라 믿어요. '이 사람이 끝까지 갔으니까 나도 할 수 있겠다'라고 말이죠. 제가 90년대 대학에 다니면서 이전(세대) 여성 작가들의 작품들을 만났을 때 '이 사람이 세상을 언어로 이렇게 끝까지 해석을 해냈구나'하는 발견이 저에게 굉장한 영감이 됐던 것처럼요."

그는 '이야기가 사람들의 삶을 부풀게 하고 빛나게 만든다'³고 말한다. 나의 삶이 텅 비었다고 생각할 때 좌절과 절망이 온다. 그리고 세상을 향한 증오가 되어 타자를 공격하게 되는 게 아닐까. 어쩌면 나와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글을 쓰는 행위가 그러한 증오 속에서 스스로를 구원하는 일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 위의 간호사> 마지막에 그는 이렇게 썼다. '간호사 조옥화는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 오늘도 그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라고. 문득, 작가 안미선이 찾고 있는, 자신의 자리는 어디일까 궁금했다.

"성경에 '빛이 있는 동안 빛 쪽으로 걸어라'라는 말이 있어요⁴. 그게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게 '빛이 있는 동안에' 걸어가라고 해서예요. 우리에게 주어진 빛의 시간이 제한돼 있다는 거죠. 마치 책의 갈피가 제한된 것처럼. 그러면 내가 그늘진 곳으로 걸을 것인가, 빛을 향해 걸을 것인가는 내 선택의 문제라는 거죠. 십 대 때부터 이런 생각을 했어요. '삶이 한정적이니까 후회 없는 선택을 하자'고요. '빛이 나한테 내리쬘 동안 빛을 보고, 빛을 받아 빛나는 것들을 되도록 바라보겠다'라고요. 빛에 있는 동안 저는 빛을 향해 걸었어요. 아직까지는 그럭저럭 오지 않았나, 생각이 드는데 이제 남은 시간 잘 해야 하겠죠."

낮에 시작한 인터뷰는 해가 저물 때까지 이어졌다. 카페에서 나와 우리는 역까지 함께 걸었다. 걷는 동안에도 그는 여러 가지를 발견했다. 길가에 심어진 낯선 풀과 꽃들의 아름다움,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을 내게 알려주었다. 내가 만난 안미선은 눈이 밝은 사람이었고, 더 많이 들리는 사람이었다. 세상이 잘 보지 않고 잘 들으려 하지 않는 삶을 보고 쓰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의 기록 작업들이 그를 그런 사람으로 계속, 계속 다시 태어나게 했다는 걸 이제 알겠다.

인터뷰이: 안미선
인터뷰어 및 기록, 촬영: 차성덕

덧붙이는 글 | 미주1. <길 위의 간호사 - 약자의 편에서 새 세상을 꿈꾸며 걸어온 조옥화의 삶>(안미선 지음. 산지니 2026) 미주2. <당신의 말을 내가 들었다> 중 '경계' (안미선 지음. 낮은산 2020) 미주3. <그때 치마가 빛났다> 중 '치마가 부풀다' (안미선 지음, 오월의봄 2022) 미주4. 성서 요한복음 12장 36절 "너희에게 아직 잠시 동안 빛이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니라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에게 빛이 있는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한국작가회의 르포.기록문학분과(이하 기록분과)에서 기획한 연재입니다. 희정, 차성덕, 소희가 함께하고 있습니다. 가입이나 기타 문의는 hanjak_repo@naver.com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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