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누가 '네 속도로 세상에 맞서라'고 해줄까" 마지막 된 '안판석'이라는 장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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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랄하고 날카로우면서 따뜻하고 섬세하다.", "예리하면서도 담대하다." 고 안판석 감독의 작품은 이렇듯 전혀 상반된 것 같은 형용사 사이에서 자유자재로 유영했다.
고 국장은 "(안 감독의) 작품에는 여성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여성들이 중심이 되는, '여권'을 담은 드라마를 많이 만들곤 했다"고 떠올렸다.
윤 감독은 "개인적으로 많이 힘들었던 시절, 개연성과 핍진성을 다 잡으면서도 인간들의 아이러니를 드라마로 담아낸 이 작품을 보며 '이 업계에도 배우고 싶은 서사와 장인이 있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드라마 PD를 꿈꾸던 무렵 <밀회>를 봤다는 한 드라마 감독은 13일 <오마이뉴스>에 "드라마 PD가 나이를 먹으면 작품을 하지 못하게 되거나 책임 PD로 옮기는 경우가 많은데 60세가 되어서도 감독으로 현장에 계셨다는 면에서 내게 롤모델인 선배였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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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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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얀거탑',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등을 만든 안판석 감독이 별세했다. 향년 64세. 12일 방송계에 따르면 안 감독은 뇌출혈로 쓰러져 입원 치료를 받던 중 이날 세상을 떠났다. 사진은 지난해 드라마 제작발표회에 참석한 모습. 2026.8.12 |
| ⓒ 연합뉴스 |
'드라마의 거장' 안판석 감독이 12일 향년 64세로 세상을 떠났다. 한국 드라마사에서 너끈히 하나의 장르가 됐던 '안판석 드라마'는 오는 10월 유작인 <연애박사>를 끝으로 더는 볼 수 없게 됐다.
지난 2025년 폐암 진단을 받은 안 감독은 최근 뇌출혈이 겹치며 투병해오다 이날 오후 사망했다. 그는 투병 중에도 <연애박사> 연출을 이어오며 현장과의 끈을 놓지 않았다. 현재 <연애박사>는 촬영과 편집을 모두 마친 상태다.
그는 지난 2018년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기자간담회에서 "인간의 마음을 좋게 바꾸려고 하는 드라마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날 그는 취재진 앞에서 "(그런 드라마에) 사명감이 있다. 내가 언제까지 (드라마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 힘을 합쳐 같이 소중히 가꾸었으면 한다"고 전했다.
그와 과거 함께 일했던 드라마 감독과 그의 드라마를 사랑한 '후배' 드라마 감독들과 대중문화 평론가에게 안판석 감독이 어떤 존재였는지를 물었다.
안 감독과 초기작 함께한 드라마 감독의 전언
안 감독은 1987년 MBC PD로 입사해 꾸준히 드라마를 만들었다. <고개 숙인 남자>(1991)를 통해 드라마 연출가로 데뷔했으며, <짝>(1994)을 만들었다. 그를 하나의 장르로 만든 건 <하얀거탑>(2007)이다. <하얀거탑>은 병원을 무대로 한 치밀한 정치와 욕망의 드라마를 완성해냈다고 평가받는다.
이후로도 안 감독은 안주하지 않고 박차를 가해 <아내의 자격>(2012), <세계의 끝>(2013), <밀회>(2014), <풍문으로 들었소>(2015),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2018), <봄밤>(2019), <졸업>(2024), <협상의 기술>(2025)을 완성시켰다. 여기에 <연애박사>까지 14년 동안 무려 9개의 드라마를 연출했다.
<장미와 콩나물>(1999) 조연출로 안 감독과 인연을 맺은 고동선 전 MBC 드라마국 국장(<내조의 여왕> 연출)은 13일 <오마이뉴스>에 안 감독을 '판석이 형'으로 부르며 애도했다. 고 전 국장은 "상실감이 크다. (안 감독은) 작가, 배우, 후배 연출가를 성장하게 해주는 사람이었다"며 "의견 차이가 있어서 싸우다가도 껄껄 웃으면서 '너는 내 지음(知音)'이라고 말씀하셨던 게 기억에 남는다"고 전했다.
배우 김혜자가 MBC 연기대상 대상을 수상하게 한 <장미와 콩나물>은 안 감독과 정성주 작가가 처음 호흡을 맞춘 드라마다.
"(<장미와 콩나물>을 촬영하던 시기) 정성주 작가의 대본이 늦어 세트 전체 스케줄이 흔들리는 상황이었다. 다음날 오전에 대본이 왔는데 토시 하나 고칠 게 없더라. 최불암, 김혜자 같은 배우들이 밤새도록 대본을 기다리다가 대본이 나오고 30분 만에 녹화에 들어간 거다. 세트에서는 판석이 형이 콘티에 줄을 긋고 다니고, 저는 배우들을 깨우러 다녔다.
한 신을 찍는 사이에 다음 신을 준비하고, 인쇄할 틈도 없이 콘티를 복사해 돌렸다. 그런데 대사도 안 틀리고, NG도 없이 4시간 만에 녹화를 끝냈다. 그날 '이런 게 바로 프로의 세계구나'라고 느꼈다. 방송도 아무런 차질 없이 잘 나왔다. 정말 선수들끼리 뭉쳐 있다는 자부심 있지 않나. 그때 그런 걸 느꼈다. 당시에 제게 '연출이 마음만 먹으면 다 되는 거야'라고 말하더라." (고동선 국장)
고 국장은 "(안 감독의) 작품에는 여성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여성들이 중심이 되는, '여권'을 담은 드라마를 많이 만들곤 했다"고 떠올렸다. 실제로 배우 원미경이 주연을 맡은 드라마 <아줌마>는 성평등 의식 확산에 기여한 공로로 '평등미디어 으뜸상'을 받기도 했다.
"빈틈을 만들어 내며 속도전에 역행하는 감독"
김선영 대중문화 평론가는 안 감독의 또 다른 흥행 작품인 <아내의 자격>(2012)을 언급했다. 김 평론가는 "안 감독은 정성주 작가와 콤비를 이루면서 대작을 만들어내지 않았나. 최근 드라마들이 속도전으로 갈 때 안 감독은 정확하게 그 속도에 역행하는 감독이었다"고 떠올렸다.
그는 "그의 스타일을 압축하는 장면이 하나 있다. <아내의 자격>에서 남녀 주인공인 김희애씨와 이성재씨가 천천히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장면인데, 강남 대치동처럼 초압축 경쟁이 일어나는 공간에서 자기만의 속도를 지키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이어 "드라마에 여백이 없도록 '숏폼'을 이어붙이는 시대에도 항상 속도를 조절해서 빈틈을 일부러 만들어 낸다. 이처럼 '시대를 버티는 전략'을 가지셨기에 위대한 감독이라고 생각한다"며 "시대의 욕망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의 심리를,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관찰하면서 <아줌마>, <풍문으로 들었소>와 같은 걸작을 많이 만들어내셨다"고 설명했다.
"안 감독님의 부고 기사를 읽고 '이제는 누가 그런 시대를 버텨주나', '어떤 어른이 너만의 속도로 세상에 맞서라'고 이야기를 해주나 싶어서 그 점이 안타까웠다." (김선영 평론가)
후배 드라마 감독들이 전하는 안판석 감독 "감독들의 감독, 연출가들의 연출가"
<유어 아너>(2024), <60일, 지정생존자>(2019)를 연출한 유종선 드라마 감독 또한 황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유 감독은 13일 <오마이뉴스>에 "안 감독님은 감독들의 감독님이자 연출가들의 연출가인 '모두의 롤모델'이었다. 또한 현업에서 연출하는 감독 가운데 가장 선배이기도 하셨다"며 "80대가 돼서도 현역에 계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국 드라마계의 큰 재산을 빼앗긴 느낌"이라고 밝혔다.
유 감독은 안 감독의 대표작인 <하얀거탑>으로 연출가들과 연출 연구를 했다고 전했다. 이어 "조연출로 일하며 심리적으로 길을 잃었을 때 <아내의 자격>과 <밀회>를 보면서 한국 드라마도 이렇게 깊고 섬세하게 좋은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는 용기를 얻었다"며 "특히 <아내의 자격>은 인물과 사회, 관계를 보는 시선이 굉장히 신랄하고 날카로우면서도 따뜻하고 섬세하지 않나. 드라마 직군에 대한 자부심을 새로 가질 수 있었다"고 전했다. 이어 "한국 드라마는 예상보다 훨씬 더 제한적인 상황 속에서 연출을 고민해야 하는데, 그런 상황 속에서도 굉장한 결과물을 내놓으셨던 분이라 안타깝다"고 털어놓았다.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2021)를 연출한 윤성호 감독에게 안 감독의 드라마는 '하나의 기준'이었다. 윤 감독은 "친한 연기자인 박혁권, 허정도씨가 존경과 신뢰를 담아 자주 이름을 올리는 어른 중에는 언제나 안판석 감독님이 있었다. 주말극이나 일일연속극 같은 대가족극의 형식을 빌려오면서도, 그 안에 계급 사회에 대한 통찰과 사랑과 혁명의 기운까지 담아낸 <풍문으로 들었소>가 특히 내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밝혔다.
윤 감독은 "개인적으로 많이 힘들었던 시절, 개연성과 핍진성을 다 잡으면서도 인간들의 아이러니를 드라마로 담아낸 이 작품을 보며 '이 업계에도 배우고 싶은 서사와 장인이 있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뭐니뭐니 해도 최애는 <장미와 콩나물>이다. 연출을 꿈꾸던 시절도 아닌데 '어떻게 저렇게 사람들이 계속 진짜처럼 재밌게 말하고 움직이지' 감탄한 기억이 있다. 이 드라마의 많은 자잘한 디렉팅과 서브 플롯은, 요새 흥행 드라마 문법대로라면 군더더기라 할지 모른다. 허나 그것들이 안감독님 드라마의 리듬이자 또 다른 레이어가 되어줬다.
내게 안 감독님의 드라마는 '(드라마가) 저래도 된다', '나는 저런 게 더 좋다'는 하나의 기준이 돼주었다. 그 작품들을 따로 장면 하나하나 면밀히 분석해본 적은 없다. 그런 적이 없는데도 이렇게까지 스며들어 있다는 게, 오히려 이 드라마들의 힘을 증명하는 것 같다." (윤 감독)
드라마 PD를 꿈꾸던 무렵 <밀회>를 봤다는 한 드라마 감독은 13일 <오마이뉴스>에 "드라마 PD가 나이를 먹으면 작품을 하지 못하게 되거나 책임 PD로 옮기는 경우가 많은데 60세가 되어서도 감독으로 현장에 계셨다는 면에서 내게 롤모델인 선배였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당시 시사교양 PD와 드라마 PD를 함께 고민하고 있었는데, (안 감독의 작품을 통해) 다큐멘터리가 아닌 재밌는 드라마로도 사회나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잘 담아낼 수 있다는 걸 느꼈다. <밀회>는 거기에 사랑과 음악을 더하지 않나"라며 "안 감독님의 작품에는 늘 인간의 입체성이 잘 드러나 있는 동시에 시대상이 날카롭게 반영돼있다"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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