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건 대낮에 살인 기계들만 설쳐대는 동네, 남 일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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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이상한 영화 <호프>가 상영되고 있다. 관객들의 혼을 쏙 빼놓는 추격 장면으로 가득 찬 역동적인 영화.
여태까지 본 영화 가운데 가장 더럽고 혼란스러우며 뒤죽박죽으로 엉망진창인 영화 <호프>. 무질서한 정도를 표현하는 물리학 용어 '엔트로피'가 극한으로 구현된 경이로운 영화.
저토록 혼란하고 막장처럼 무너진 곳에서 1980년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물음을 저절로 떠오르게 하는 <호프>. 가난하지만 화목하고 정겹게 이웃들과 정을 나누며 살았다는 <응답하라 1988> 같은 드라마를 동화로 만들어버리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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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종 기자]
정말 이상한 영화 <호프>가 상영되고 있다. 관객들의 혼을 쏙 빼놓는 추격 장면으로 가득 찬 역동적인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이리로 달리고 저리로 뛰는 인간들의 드라마. 어리석고 괴기스러운 사람들과 출처 불명 외계인들이 각축하는 난장판 영화. 혼란과 무질서, 무능하지만, 살기(殺氣) 하나만은 100% 충전한 채 살아가는 비정한 사람들의 영화.
156분 상영시간이 길게 느껴지지 않게 하는 나홍진 감독의 솜씨는 명불허전 훌륭하다. 우리를 흥분시키고 몸과 마음을 쫄깃쫄깃하게 만드는 '괴물'의 실체가 아주 더디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봉준호의 괴물은 제법 이른 시간에 모습을 드러내지만, <호프>의 괴물은 관객의 기다림이 멈춘 시점에 불쑥 나타난다. 갑작스러움이 전하는 놀랍고도 신선한 충격.
관객을 웃기려는 시나리오의 의도는 매번 빗나가지만, 그렇다고 실망할 이유는 없다. <호프>의 초점은 웃음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건과 인물들의 긴장과 이완이 때때로 상호 엇박자를 보여주지만, 영화는 지리멸렬한 상황까지는 밀려나지 않는다. 그것은 <호프>에서 감독이 전하는 명시적인 주제 의식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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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호프'의 스틸컷 영화 '호프'의 스틸컷 |
| ⓒ 플러스엠 |
호포를 구체화하는 몇몇 시공간 장치는 자못 흥미롭다. '간첩 침투 밤낮없고, 간첩 신고 내일 없다'는 거대한 공고판. 하지만 공산주의를 박멸하자는 멸공 훈련 기념탑은 허리가 부러진 채 방치돼 있다. 이념은 아직 생생하지만, 접경지역을 살아가는 주민들의 의식에서 멸공과 방첩은 녹슬고 낡은 구닥다리다. 휴전선을 날아다니는 새들도 비웃는 것 같다.
그런데 해병 출신 사냥꾼 이마를 묶은 붉은 천에 선명하게 박힌 두 글자 '필살(必殺)'.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상대를 죽여버리겠다는 지독한 다짐, 필살. 그들이 살아가는 시간은 1980년대처럼 보인다. 세련되고 강력한 1983년형 스텔라가 경찰차로 나오고, 간첩 신고 번호 113도 한몫한다. 하지만 1997년에 처음 등장한 '하나로 마트'는 옥에 티처럼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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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호프> 스틸컷 |
|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
예나 지금이나 노인들만의 세상 어촌의 실상은 우리에게 희망의 끝을 한껏 선사한다. 마을 청년들과 부하에게도 무시당하는 파출소장 범석. 간호사와 경찰관을 겸임하는 성애. 정신착란자처럼 보이는 목수 양배마저 사제총기로 살상할 수 있는 지역.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지원 병력. 누구나 능란하고 멋지게 난사하는 각종 총기류의 불꽃 튀는 향연.
<호프>는 비위 약한 관객에게는 대단한 고역이다. 여의사가 구현하는 해부 장면은 정말 압도적이다. 무슨 이유로 그녀가 피로 전신을 떡칠할 때까지 질기고 두꺼운 살을 도려내야 하는지, 관객은 끝내 알지 못한다. 과학자 혹은 법의학자의 사명감인지, 개인의 지적 호기심 때문인지, 아니면 파출소장에게 자신의 대담성과 능력치를 과시하려는 것인지.
저토록 혼란하고 막장처럼 무너진 곳에서 1980년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물음을 저절로 떠오르게 하는 <호프>. 가난하지만 화목하고 정겹게 이웃들과 정을 나누며 살았다는 <응답하라 1988> 같은 드라마를 동화로 만들어버리는 영화. 살아가는 이유와 방법을 묻지 않고, 권력자가 켜놓은 방향 지시등을 따라 일렬종대로 걸어야 했던 1980년대.
소통과 공감 제로 사회
쌍소리 말고는 들을 만한 언어가 없는 인간들이 득시글거리는 호포. 생명을 존중하는 어떤 마음가짐도 갖추지 않은 야만성과 무교양이 차고 넘치는 세상. 이쯤에서 제기되는 문제가 외계인 '바미기르'의 폭력성이다. 선혈이 낭자한 시신들이 넝마처럼 널려있고, 흉측하게 찢겨나간 상처에 끈적하게 달라붙는 파리 떼를 양산한 바미기르의 이해할 길 없는 분노.
경험해 보지 못한 미지의 생명체가 벌이는 광란의 살육에 인간들은 온전하게 사고할 능력을 상실한다. 그게 아니다. 그들은 제대로 생각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닌지도 모른다. 그들은 외계인이 무엇을 바라는지, 왜 여기 왔는지 묻지도 생각하지도 않고 무차별적인 총질만 거듭한다. 무엇인가 물어보려는 것 같고, 뭔가 찾아 헤매는 듯한 외계인을 향한 총탄 난사.
그래도 <호프>가 할리우드 괴수 영화와 다른 점은 '눈물'에 있다. 영화에서 인간적인 면모를 느낄 수 있는 드문 장면 하나. 질주하는 경찰차 안에서 중무장한 범석이 바미기르의 눈을 오래도록 바라본다. 그는 외계인의 놀란 듯 슬픈 듯한 커다란 눈망울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본다. 빨리 쏘라는 성애의 고함에도 무엇엔가 홀린 듯 잠시 생각에 빠져드는 범석.
외계인의 불가해한 언어가 한국어로 번역되면서 비로소 관객은 그들의 분노와 슬픔 그리고 지극한 폭력적인 광기를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영화의 인물들은 외계인의 등장과 이질적인 행동 방식을 끝까지 이해하지 못한다. 파출소장도, 그의 육촌 동생 성기도, 해병대 출신 포수들도, 어촌계의 지원 병력도, 여경도 하나같이 생각하는 능력을 상실한 사람들이다.
더 나은 세상을 기다리며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에서 생각의 무능이 언어의 무능을 낳고, 언어의 무능이 행동의 무능을 가져온다고 쓴다. 아렌트의 주장을 <호프>의 등장인물들만큼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구현하는 인물들은 없다. 그들은 하나같이 판박이들이다. 외계인들을 향한 그들의 공포와 분노는 걷잡을 수 없는 무분별한 폭력과 잔인한 살상을 동반한다.
그들은 따로 또 같이 행동한다. 그들을 묶어주는 공동선은 퇴색했지만, 그 뿌리는 왕성하게 살아서 꿈틀거리는 반공주의 이데올로기다. 호포 전역을 지배하는 단 하나의 반공주의는 알게 모르게 그들의 혈관 깊은 곳에 침투하여 집단적 광기가 된다. 상대가 누군지, 무엇을 원하는지 묻기 전에, 그들은 자기들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상대에게 총질을 시작한다.
대화와 소통이 완전히 실종되고 죽이고 죽는 살인 기계들만 벌건 대낮에 설쳐대는 공간 호포. 호포는 1980년대 가상 공간만은 아니라고 영화는 말한다. 그것은 2026년 현재 대한민국 전역에서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낭자하게 펼쳐지는 광란의 폭력이라고 주장한다. <호프>는 상호 이해를 위한 의사소통과 의견교환이 실종된 야만 사회의 민낯을 보여주는 영화다.
그런데 영화는 무엇인가 끝까지 말하지 않고 남겨둔 느낌을 준다. 이색적이지만 아름답고 세련된 조르의 입에서 나오는 말 "운명을 바꿔야지!"가 함축하는 무엇인가가 있다. 이질적인 존재와 사상을 필살의 의지로 사냥하는 인간들에게 왜 그래야 하는지 묻다가 단호한 행동을 암시하는 조르. <호프>의 후속작을 기다리며, 관객은 더 나은 시공간을 희망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저의 블로그 시대로 열린 창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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