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여행 계획표에 ‘빈칸’을 넣어보자

최훈 한림대 심리학과 교수 2026. 8. 7.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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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 여름이다!" 학창 시절 즐겨 들었던 노래가 생각나는 계절이 돌아왔다.

여행은 출발하기 전에 시작된다고 했었나? 계획형 인간인 필자야 말할 것도 없다.

기껏 고생해서 가족 여행을 다녀왔는데, 막상 아이들에게 "뭐가 제일 기억나?"라고 물으면 해맑게 "호텔에서 마음 편히 게임한 것"이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흔하지 않은가.

그 빈칸에서 우리는 가장 여행다운 우연을 만나고, 오래 숨겨 두었던 자신과도 다시 마주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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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훈의 이것도 심리학
사진 = 클립아트코리아
“와우, 여름이다!” 학창 시절 즐겨 들었던 노래가 생각나는 계절이 돌아왔다. 뜨거운 태양, 숨 막힐 것 같은 더위. 그래도 여름이 즐거운 이유는 아마도 ‘휴가’ 때문이 아닐까? 방학을 맞이한 우리 집 아이들도 ‘어디 가고, 어디 가고’를 줄줄이 외치며 뜨겁고 화려한 여름을 계획 중이다.

여행은 출발하기 전에 시작된다고 했었나? 계획형 인간인 필자야 말할 것도 없다. 워낙 시간 허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인데다 ‘여행은 철저한 준비가 동반돼야 충실할 수 있다’는 신념인지라, 여행지에서 가볼 만한 곳, 맛집 등을 꼼꼼하게 챙기는 편이다. 특히 ‘정보의 바다’라는 인터넷이 활성화된 이후로는 여행보다 더 긴 준비 시간을 갖는다.

물론 휴가의 즐거움에는 계획을 세우는 것도 포함된다. 여행지를 검색하고 숙소 사진을 보며 그곳의 모습을 상상하는 동안 우리는 아직 오지 않은 행복을 미리 경험한다. 필자도 원래 미리 경험하는 행복을 만끽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AI에게 물어보고 말까’하는 유혹에 빠진다. 이게 여행인지, 아니면 일인지 헛갈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휴가는 원래 일상의 의무에서 잠시 벗어나는 시간이다. 하지만 현대인은 쉬는 시간마저 효율적으로 관리하려고 한다. 어쩔 수가 없다. 항상 오는 휴가가 아니다. 1년을 기다려서 받는 귀하디 귀한 시간이다. 게다가 요즘 물가는 살인적인 수준. 나름 큰 맘 먹고 통 큰 투자를 하는 셈이니, 휴가를 어영부영 보낼 수는 없지 않겠는가.

이러다 보니 휴가는 또 다른 업무 프로젝트가 된다. 회사에서 업무를 볼 때보다 더 촘촘히 짜인 일정표를 들고, 한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다음 장소의 주차장과 이동 시간을 검색하고, 눈앞의 풍경을 보면서도 예약 시간에 늦지 않을까 걱정한다. 몸은 바닷가에 있지만 마음은 여전히 일정표 안에 있다. 업무의 내용만 바뀌었을 뿐, 시간을 통제하고 성과를 확인하는 방식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고 즉흥적인 여행이 계획적인 여행보다 항상 좋다는 뜻은 아니다. 적절한 계획은 예측 가능성을 높여 불안을 줄이고 여행을 더 편안하게 만든다. 심리학에서도 예측 가능성과 통제감이 긍정적인 경험을 높이는 중요한 요인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계획이 지나치게 촘촘해져 그 계획을 지키는 것이 강박적으로 느껴진다면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휴가가 즐거운 이유 중 하나는 내가 무엇을 할지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심리학에서는 행복의 중요 조건으로 ‘자율성’을 꼽는다. 자기결정성 이론에 따르면, 사람은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선택한다고 느낄 때 가장 큰 만족감과 활력을 경험한다. 휴가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그 시간과 장소를 선택했다고 느끼는가’이다. 하지만 스스로 짠 일정도 지나치게 빡빡하면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 일정이 너무 많으면 여행이 자연스럽게 진행된다는 느낌이 줄고 일이나 의무처럼 느껴져 즐거움이 감소한다는 연구가 있다. 처음에는 자율적으로 선택한 계획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 계획이 자율성을 저하시키는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셈이다.

그래서 좋은 휴가에는 ‘빈칸’이 필요하다. 빈칸은 단순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남는 시간이 아니다. 무엇을 할지 미리 정하지 않은 시간이다. 늦잠을 잘 수도 있고, 숙소 근처를 걷다가 작은 카페에 들어갈 수도 있다. 아이가 물놀이를 더 하고 싶어 하면 한 시간을 더 머물 수도 있고, 비가 오면 창밖을 바라보며 책을 읽을 수도 있다. 정해진 목적이 없기 때문에 그 순간의 몸과 마음이 원하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일정이 우리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빈칸에서 비로소 우리가 시간을 선택한다.

빈칸은 기억에 남을 장면이 들어설 여지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우리는 여행의 모든 순간을 생생히 기억하지 못하며, 같은 여행을 다녀와도 사람마다 마음에 남는 장면은 다르다. 기껏 고생해서 가족 여행을 다녀왔는데, 막상 아이들에게 “뭐가 제일 기억나?”라고 물으면 해맑게 “호텔에서 마음 편히 게임한 것”이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흔하지 않은가. 부모의 입장에서는 허탈하기 그지없겠지만, 아이에게는 별다른 일정이 없었던 시간이 여행에서 가장 자유롭고 즐거운 순간이었을 수 있다.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은 우리의 경험을 바라보는 두 관점을 ‘경험하는 나’와 ‘기억하는 나’로 구분했다. 흥미로운 점은 두 관점의 판단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행하는 내내 더위와 피로, 교통체증 때문에 불평만 가득했던 경험이었어도, 아름다운 노을 한 장면이나 가족과 맛있게 먹었던 한 끼 저녁 식사가 강하게 기억에 남으면 나중에는 좋은 여행으로 추억할 수 있다. 굳이 휴가에서 경험의 양을 경쟁하듯 늘릴 필요는 없다. 기억하고 싶은 장면 한 조각이면 충분할 수 있다.

그 장면은 반드시 유명한 관광지나 특별한 체험에서만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아무 계획 없이 늦잠을 잔 아침, 숙소에서 함께 과일을 먹던 시간, 목적 없이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풍경이 더 오래 남기도 한다.

좋은 휴가는 빈틈없이 완성된 휴가가 아니다. 떠나기 전에 설레고, 여행 중 가끔 길을 잃고 힘들어도 돌아온 뒤에는 다시 꺼내 보고 싶은 장면 하나가 남는 게 휴가다. 이번 여름에는 일정표에 장소 하나 대신 빈칸 하나를 넣어 보면 어떨까. 그 빈칸에서 우리는 가장 여행다운 우연을 만나고, 오래 숨겨 두었던 자신과도 다시 마주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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