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런이 해석한 독보적 미녀, 무릎을 탁 쳤다

김성호 2026. 8. 4.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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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오디세이> 속 고대 그리스의 신화적 세계관 가운데서든, 영화 바깥 우리가 살아가는 2026년 지구 위에서든 가히 파괴적 논란의 중심인 헬레네 이야기다.

영화 <오디세이>는 트로이 전쟁이 끝나고 근 10년이 흐른 뒤의 이야기다.

앞서 호메로스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모든 콘텐츠는 원전의 이 같은 설정을 충실히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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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씨네만세 1403] <오디세이> 하

[김성호 평론가]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해야 하는 이야기다. <오디세이> 속 고대 그리스의 신화적 세계관 가운데서든, 영화 바깥 우리가 살아가는 2026년 지구 위에서든 가히 파괴적 논란의 중심인 헬레네 이야기다.

<오디세이>와 관련한 가장 큰 잡음은 초기 캐스팅 단계부터 불거졌다. 할리우드가 지속하는 다양성 우대정책, 이를테면 아카데미 시상식이 여성과 성소수자, 장애인, 비백인 인종을 배우로 캐스팅하거나 핵심 스태프로 채용할 경우에만 작품상으로 올라가는 혜택을 주거나 지자체 및 각종 단체가 세제혜택은 물론이고 제작과 배급 관련 지원에서 우대하는 등의 조치가 미국에서도 지난 몇 년 간 꾸준히 논란이 됐다.

그 필요에 공감하는 이도 적지 않았으나 비판에도 일리는 있었다. 무엇보다 다양한 소수자가 고루 혜택을 받는 대신 특정 층에게 정책의 수혜가 집중되고, 심지어 할당을 채우기 위한 캐스팅 탓에 작품성이 훼손된다는 건 부정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찬반이 엇갈리는 정책임에도 일선 제작자는 현실적 선택을 해야만 했다. 그 결과로써 저 리들리 스콧은 라틴족 코카시안, 즉 백인 일색이었던 로마 정치의 중심부에 덴젤 워싱턴을 세웠다. 안데르센 동화 원작의 디즈니 영화 주역들도 흑인이나 라틴계 배우가 연달아 캐스팅되기도 했다. <오디세이>의 인상적 캐릭터 헬레네와 클레임네스트라 역에 루피타 뇽이 1인 2역으로 출연한 건 이 같은 흐름의 결과라고 할 밖에 없다.
▲ 오디세이 스틸컷
ⓒ 유니버설 픽쳐스
신화적 미녀, 제우스의 딸 헬레네를 이 배우가?

신화, 또 호메로스의 두 작품을 기억하는 이라면 놀랄 일이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의 핵심적 사건인 트로이 전쟁이 아닌가.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연합함대를 구성해 동방의 트로이를 공격한 10년의 전쟁이다. 신화는 이 전쟁의 발발원인으로 헬레네를 지목한다. 트로이 사절로 온 파리스와 정분이 나서 조국과 남편, 자식까지 내팽개치고 떠난 헬레네 탓에 일어난 전쟁이라고 말이다. <오디세이>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은 이 서사의 주인공 오디세우스가 주역으로 등장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인 때문이겠다.

헬레네에게 구혼한 수많은 영웅들이 승자가 정해지고 나서도 불화하지 않게끔 꾀를 낸 것이 다름 아닌 오디세우스다. 스스로 여러 영웅을 물리치고 헬레네의 짝이 될 수가 없겠다고 판단한 이 꾀돌이 영웅은 꿩 대신 닭 격으로 페넬로페를 취하며 헬레네를 얻지 못한 영웅들로 하여금 '결혼을 지키는 공동의 맹세'를 하도록 하면 이후의 분란을 막을 수가 있으리라고 귀띔한다. 바로 이 맹세로부터 메넬라오스와 스파르타의 집안 문제가 모든 구혼자, 그리스 전역의 쟁쟁한 영웅들의 문제가 되고 만다.

모든 영웅이 탐냈다는 그리스 세계의 독보적 미녀, 동시에 남편이 스파르타의 왕으로 추대되게 하는 정통 스파르타의 귀족, 제우스가 백조로 변신해 낳은 신의 딸이기도 한 헬레네를 루피타 뇽이 맡았을 때 사실 의구심이 들었다.

문제의식을 가진 이조차 박수를 치게 만드는 해법을 내놓는 일, 크리스토퍼 놀런이 바로 그 어려운 작업을 해낸다. 하지만 결국 원전을 거의 그대로 따르는 <오디세이>에서 헬레네와 클라임네스트라, 특히 헬레네의 인종과 외모를 바꿔 놓은 캐스팅에 박수를 치게 됐다.
▲ 오디세이 스틸컷
ⓒ 유니버설 픽쳐스
목마가 성문을 통과하듯, 놀런은 논란을 돌파한다

영화 <오디세이>는 트로이 전쟁이 끝나고 근 10년이 흐른 뒤의 이야기다. 오디세우스와 작은 아이아스 정도를 제외하고는 그리스 연합군에 속한 영웅 중 전쟁이 끝나고 생존한 이는 죄다 복귀한 시점이다. 당연히 전쟁의 목적이었던 헬레네 또한 메넬라오스의 손에 넘겨져 스파르타로 돌아온다. 왕비의 자리에 앉은 그녀의 모습이 영화 가운데 몇 차례 등장하는 건 원작에 따른 결과다. 이타카의 왕 오디세우스의 귀환을 기다리다 못해 그 아들 텔레마코스가 필로스에 이어 스파르타를 찾아가며 이들 부부를 만나게 된다.

원전인 <오디세이아>에서 메넬라오스는 스파르타로 돌아온 지 고작 2년이 지난 때였다. 그 과정에서 그는 바다의 작은 신까지 잡아다가 온갖 정보를 얻기도 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오디세우스가 칼립소의 섬에 잡혀 있었다는 것이었다.

영화는 그와는 다른 길을 걷는다. 신의 이야기는 배제하고 인간의 이야기를 써내는 것이다. 메넬라오스는 오디세우스에 대한 어떤 정보도 갖고 있지 못하다. 헬레네는 제우스의 딸이 아닌 그저 인간일 뿐이다. 그리하여 메넬라오스에게 학대당하고 모욕당하기까지 한다. 그 헬레네가 메넬라오스에게 던지는 몇 마디 말, 또 앞서 주인공인 오디세우스의 입으로 뱉게 했던 말들이 고전으로부터 벗어난 영화의 독자적 주제가 된다. 요컨대 크리스토퍼 놀런이 <오디세이>를 다시 만들기를 택한 이유다.

전쟁은 왜 일어났는가. 호메로스는 파리스를 따라나선 헬레네 탓이라고 말한다. 거기엔 또한 사정이 있는데, 뭣 모르던 목동시절 파리스가 세 여신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이로 하필 아프로디테를 꼽았고, 그녀가 보답이라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파리스에게 주기 위하여서 에로스의 금화살을 헬레네에게 쏘았던 탓이다. 아프로디테 저 자신도 저항하지 못하는 에로스의 금화살이 아닌가.

헬레네는 결국 신들의 농간으로 파리스를 따라나선 것 뿐이지 제 의지로서 남편과 자식과 백성을 저버린 것이 아니다. 하물며 저를 구하기 위해 그리스 전역의 군대가 일어나 트로이를 멸할 줄 또 어떻게 알았으랴.
▲ 오디세이 스틸컷
ⓒ 유니버설 픽쳐스
'중요한 걸 알기는 아느냐'는 물음

앞서 호메로스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모든 콘텐츠는 원전의 이 같은 설정을 충실히 따랐다. 볼프강 페터젠의 2004년 작 <트로이>가 그러했고, 한 해 앞서 제작된 인상적 작품 <헬렌 오브 트로이>가 독자적 해석을 시도했으나 근본적으로는 호메로스가 쓴 신화적 동기에 저항했다고 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오디세이>는 다르다. 크리스토퍼 놀런은 헬레네의 무도함이며 신들의 장난질을 수많은 희생자를 나은 10년 전쟁의 이유로 제시하지 않는다. 전쟁 아래 깔린 진실, 트로이와 서방의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무역분쟁이 진짜 원인이라는 사실을 오디세우스의 말을 통하여 확인케 한다.

또한 헬레네 스스로 '자신의 이름으로 범해진 전쟁의 피해'에 대해 언급하고 사죄하도록 하는데, 이는 그 자체로 이 전쟁이 실제로는 그녀 하나의 잘못으로 이뤄진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전쟁엔 다만 명분이 필요했을 뿐, 아가멤논과 그가 이끄는 패권국 미케네, 나아가 그에 동조하는 그리스 전역의 이익이 더욱 중요한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어찌 보면 헬레네는 트로이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일 수도 있겠다. 영화가 그리고 있는 것처럼 헬레네는 당대에서는 물론이고 후세인 소크라테스와 페리클레스 같은 영웅들의 시대, 심지어 수천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트로이 전쟁의 원인으로 지목되어왔다. 그게 진실과 부합하는지를 누구도 충실히 따지려 들지 않았다. 그럴듯한 이유면 충분하다고, 심지어 신들의 경쟁과 시기심, 인간의 미욱함이 얽혀든 이야기면 더없이 좋겠다고 여긴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헬레네에게 모든 짐을 지운 호메로스의 신화가 꼭 그에 부합했다. 그리하여 헬레네는 당대 가장 큰 전쟁의 원흉으로 남았다.

대체 무엇이 중한가. 헬레네 따위, 그녀가 진실로 어떤 사람이었는지가 <오디세이아> 가운데 무어 중요하냐는 말이다. 그녀가 백인이든 흑인이든 아시안이든, 사람이든 신이든 짐승이든, 그깟 건 하나도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녀가 전쟁의 원인으로 지목돼 수백 수천 년이 흐르는 동안 <오디세이아>는 위대한 고전으로 자리매김했고, 호메로스는 또한 서양 문화의 원류를 연 전설적 작가로 추앙받았다. 헬레네는 그렇게 수많은 영웅의 죽음과 그보다 훨씬 더 많았을 이름 없는 이들의 고통에 원인으로 새겨졌다.
▲ 오디세이 포스터
ⓒ 유니버설 픽쳐스
죽은 고전이 아니다, 산 현실이다

2차대전 이후의 질서가 붕괴하고 전에 없던 큰 전쟁들이 인류사의 비극을 낳고 있는 오늘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 등과 벌이는 전쟁이 대표적이다. 두 전쟁뿐 아니라 앞서 일어난 여러 전쟁들에서 민주주의며 평화 같은 명분이 제시됐단 건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4년 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주민들이 우크라이나 극우 민족주의 세력에 의해 학살당하고 있다며 그를 보호하겠단 명분으로 우크라이나를 전격 침공했다. 미국은 핵 확산을 방지하고 문명을 수호하기 위해 이란을 공격했다 주장하고, 이스라엘은 테러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적극적 자위권 발동이라 항변한다.

제시된 명분 아래 깔린 진실은 무엇인가. 나토의 동방 확장과 그에 반해 팽창하는 러시아의 지정학적 부닥침을 말하는 이가 있다. 베네수엘라와 이란에 매장된 막대한 석유, 호르무즈 해협을 통한 에너지 운송의 문제가 또한 관련이 없다 할 수 없다. 중국과 미국의 좁아든 기술격차와 흔들리는 달러 패권을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다.

수천 년 전 그리스는 어땠을까. 오늘날 역사학계는 트로이가 흑해와 에게해를 잇는 요충지, 오늘날 터키 히사리크에 위치했다고 비정한다. 청동기 문명의 핵심 자원이라 해도 좋을 주석이 중앙아시아로부터 이곳을 거쳐 그리스 사회로 들어갔다. 트로이 10년 전쟁은, 트로이에서 벌어진 그 잔혹한 학살극은 그저 헬레네라는 한 여자의 부정 때문에, 신들의 농간 탓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그렇다. 헬레네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녀가 흑인이건 백인이건 동양인이건, 백조의 딸이건 제우스의 딸이건 부정의 결과이건, 미녀이건 추녀이건 평범한 아낙이든 말이다. 크리스토퍼 놀런이 논란이 되어 마땅했던 캐스팅 문제를 돌파한 방식이 너무나 탁월하여서 조용한 극장에서 경탄을 터뜨리고 말았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오디세이>이야기는 '씨네만세 1402'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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