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파괴 아니다”…영화 ‘오디세이’ 이해 위한 두개의 키워드 [송원섭의 와칭]

송원섭 2026. 8. 2.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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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을 거두고 귀국길에 오르는 오디세우스(맷 데이먼). 그러나 신의 저주가 귀국길을 가로막는다. 사진 유니버설픽처스.

그리스의 영웅 오디세우스는 목마를 이용한 과감한 전술로 트로이 성을 불바다로 만들고 마침내 10년에 걸친 전쟁을 끝냅니다. 하지만 귀향길은 쉽지 않습니다. 온갖 고초를 겪으며 10년을 더 바다 위에서 방황해야 하죠.

이 유명한 이야기를 다룬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에 온 세계가 흥분하고 있습니다. 지난 7월 17일 개봉한 미국에서는 이미 입장수입 1억 달러를 넘어섰고, 유럽과 중국, 일본 등 모든 공개 국가에서 박스 오피스 1위를 달리고 있죠. 한국에서도 8월 5일 공개됩니다.

물론 영화 ‘오디세이’를 보기 위해서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다시 읽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놀란은 이번 작품에서 원작의 줄거리를 따라가고 있기는 하지만, 옛날이야기의 재현보다는 오디세우스의 긴 방랑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는 쪽에 더 관심 있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제기된 '원작 파괴' 논란은 초점을 잘못 잡은 이야기라고나 할까요.

다음의 내용은 놀란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배경을 설명하는 글이라서, 영화를 보러 가시기 전에 읽으면 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영화를 보는 동안 제 머릿속에는 두 가지 키워드가 떠올랐습니다. 바로 ‘환대’와 ‘문명의 종말’ 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우리가 알고 있는 기원전 11세기의 그리스 신화 세계와 서기 2026년, 현재를 연결하는 끈이기도 합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환대란 무엇일까


유명한 영웅들이 활약하던 신화시대의 그리스에는 크세니아(Xenia)라는 엄격한 규범이 있었습니다. ‘손님에 대한 환대’를 뜻하는데, 이 시대에는 낯선 길손이 내 집을 방문했을 때 그 손님의 신분을 묻지 않고 성의껏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집주인의 의무였습니다.

그리스 신화의 주신 제우스는 때로 제우스 크세니오스(Zeus Xenios), 즉 ‘환대하는 제우스’라고 불렸습니다. 이 말은 ‘네가 맞는 손님 가운데 인간으로 변장한 제우스가 있을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죠. 네가 크세니아를 준수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제우스는 남루한 차림으로 너를 방문할 것이며, 만약 성심껏 대접하지 않으면 신의 벌이 내릴 것이라는 얘깁니다.

피터 폴 루벤스가 1620년에 그린 ‘필레몬과 바우키스의 집에 있는 주피터와 머큐리’. 로마 신화의 주피터와 머큐리는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와 헤르메스를 의미한다. 사진 빈 예술사박물관.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실린 바우키스와 필레몬의 이야기는 이 정서를 잘 설명해 줍니다. 어느 날, 제우스와 헤르메스는 거지로 변장하고 한 마을을 방문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이들을 박대합니다. 분노한 제우스를 반긴 것은 마을 외곽에 살던 바우키스와 필레몬이라는 가난한 노부부뿐이었죠. 이들의 진심어린 환대에 감동한 제우스는 신의 권능을 드러내 마을을 호수로, 거만한 마을 사람들을 물고기로 바꿔 버립니다. 이어 노부부의 집을 신전으로 바꾸고, 이들을 자신을 섬기는 신관으로 삼아 오래오래 걱정 없이 살게 합니다.


무너지는 크세니아


‘오디세이’의 배경이 되는 트로이 전쟁은 사실 크세니아의 위반으로 촉발됩니다. 주인의 미덕이 손님을 잘 섬기는 것이라면, 손님의 의무 역시 주인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공손하게 처신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는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의 손님이면서 왕비 헬레네를 유혹해 트로이로 도주하죠. 이것이 납치든, 사랑의 도피든 크세니아의 기준에서는 용서할 수 없는 만행입니다.

놀란의 영화 ‘오딧세이’는 이 엄격한 크세니아가 철저하게 무시당하는 현장을 보여주며 시작합니다. 오디세우스가 10년간의 전쟁과 10년간의 방랑으로 집을 비운 동안 이타카 섬의 왕궁에는 그의 아내 페넬로페와 결혼해 왕좌를 차지하려는 구혼자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습니다(아폴로도로스에 따르면 구혼자는 무려 136명이나 됩니다).

오디세우스를 기다리는 아내 페넬로페(앤 해서웨이)와 아들 텔레마커스(톰 홀랜드). 사진 유니버설픽처스.

페넬로페와 아들 텔레마코스는 크세니아 때문에 이들을 내쫓지 못하고, 소를 잡고 와인을 걸러 이들을 대접하지만, 이들은 떠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오디세우스가 이미 죽은 것이 분명하다며 페넬로페 왕비의 재혼을 재촉하죠.

따라서 오디세우스의 귀환과 구혼자들의 처단은 그저 개인적인 복수를 넘어 크세니아의 회복을 뜻합니다. 전쟁이라는 비상상황에서 일상으로 돌아가자는 노력이죠. 호메로스의 ‘오디세이’는 그렇게 해서 오디세우스와 이타카 섬이 평화를 회복하는 것으로 끝을 맺지만, 영화는 그 이상의 것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신화의 시간'은 고작 100년 안팎?


그리스 신화에 밝은 분들은 아시겠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 신화의 영웅들은 대략 3세대, 늘려 잡아야 3.5세대에 지나지 않습니다. 약 100년 정도의 시간이죠. 1세대는 헤라클레스와 테세우스 등이고 2세대는 그 아들 세대인 아킬레스와 오디세우스 등. 3세대는 또 그들의 아들 세대입니다.

한 번쯤 이상하게 생각하신 적 없으신가요. 우리가 알고 있는 신화 속 인물들은 고작 이 100년 남짓한 시간 속에 빼곡 들어차 있고 왜 그들 이후엔 영웅이 나타나지 않는 걸까요. 알고 보면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미케네의 왕이자 전 그리스의 지도자 아가멤논의 강대한 권력을 상징하는 '오디세이'의 포스터. 트로이 전쟁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이 강대한 문명은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고 만다. 사진 유니버설픽처스.

트로이 전쟁을 일으킨 것은 고대 그리스 역사에서 미케네 문명(기원전 16세기~기원전 11세기)이라고 불리는 세력입니다. 트로이 원정군의 총사령관인 아가멤논이 바로 신화 속 미케네의 왕이면서 그리스 전체에 군림하는 권력자죠. 이 미케네 문명의 마지막 100년, 즉 기원전 12세기에서 11세기에 이르는 시기가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영웅들의 시대이며, 트로이 전쟁이 이 시대의 마지막 불꽃입니다.

미케네인들은 경쟁자인 해양 세력 트로이를 멸망시킬 정도로 강성했지만, 그 뒤로 역사에서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립니다. 지중해 전역에 걸쳐 가뭄과 기상 이변이 닥치고, 식량이 부족해지자 여기저기서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됩니다. 그리스 북쪽에서는 도리아 인이라는 새로운 민족이 쳐들어왔고, 지중해 곳곳에서 난민들로 조직된 거대한 선단이 해안을 침략하기 시작합니다. 영화 ‘오디세이’에서 언급되는 ‘바다로부터의 위협’이라는 것이 바로 이들, 즉 바다 민족(sea people)을 가리킵니다.
'오디세이' 촬영장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가운데). 사진 유니버설픽처스.


“곧 암흑이 찾아온다”


화려했던 미케네 문명은 그렇게 재해와 전쟁으로 몰락하고, 그 뒤로 300년 동안 그리스 전역은 암흑시대를 맞습니다. 그러니까 이 미케네 문명의 몰락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 신화의 끝입니다. 그리고 이 몰락을 피해 튀르키예로 도피한 그리스 난민의 후손인 호메로스는 찬란했던 조상들의 전설을 소재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라는 두 편의 서사시를 집필합니다. 이 두 작품의 탄생은 곧 그리스 문명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오디세이’는 미케네 문명이 멸망하기 직전, 그리스 신화에 ‘영웅들’이 등장하던 마지막 시대를 회상한 작품입니다. 놀란이 그려낸 오디세우스의 침울한 눈빛은 긴 트로이 전쟁이 끝났어도 화려했던 문명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불길함을 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명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가 바로 크세니아의 실종이죠.
놀란의 '오디세이'에서 유명한 트로이의 목마는 바다에서 건져올려진다. 사진 유니버설픽처스.


문명의 황혼, 왜 낯설지 않을까


크세니아란 결국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신뢰를 근거로 합니다. 경찰도, 행정력도, 교통 시스템도 오늘날에 비교할 수 없었던 그 시대에 원거리를 이동한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일이었죠. 주인이 이방인을, 이방인이 주인을 믿지 못하면 크세니아라는 율법은 애당초 성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화 ‘오디세이’의 세계는 더는 크세니아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더는 이질적인 것을 이해하거나 공존하려 하지 않고, 그저 나와 맞서는 것은 죽여 없애야 내가 살 수 있다는 세계가 찾아오고 있던 겁니다. 이렇게 야만의 시대가 눈앞에 와 있음을 안 오디세우스는 결국 정착을 포기하게 됩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는 오디세우스의 왕권 회복에서 끝나지만, 다른 신화에 나오는 오디세우스의 최후는 어처구니없게 비참합니다.)

상호 이해의 실종과 문명의 몰락에 대한 예감. 놀란이 이 영화를 통해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어렵지 않습니다. 개방과 관용을 중심으로 한 민주주의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는 지금, 놀란은 미케네 문명의 황혼을 통해 2026년의 관객들에게 현재의 인간 세계를 돌아보게 합니다.

제가 보기에 ‘오디세이’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영화였습니다. 배경 이야기를 하느라 정작 영화에 대해 얘기는 할 틈이 없었네요. 구체적인 영화에 대한 내용을 담은 다른 글로 곧 돌아오겠습니다. 아. 영화 '오디세이'는 강추.

송원섭 song.weonseo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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