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퇴직이 없어요", 일흔살 그의 인생 바꿔놓은 전화 한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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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원래 간호사였어요. 그런데 다들 선생님 같다고 해요(웃음). 어느 날 신문을 보다가 경실련(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라는 단체를 알게 됐어요. 1992년에 회원이 됐어요."
최성주(69)씨는 본인을 소개할 때, '시민운동가'라고 말한다.
"예전에는 시민단체 회원이 많지 않았고, 지인의 권유를 받고 회원이 되는 경우가 많았어요. 저는 경실련에 직접 전화해서 회원이 되겠다고 했어요. 한두 해 지나고 경실련에서 전화가 왔어요. 경실련이 생기고 처음으로 자발적으로 회원이 되겠다고 한 사람이 저여서 인상 깊었대요. 방송 비평과 프로그램 모니터링하는 팀을 만들었는데 그 일을 저랑 같이 하고 싶다고 했어요. 저는 전공이 방송 쪽도 아니고 간호학이라고 했는데도 괜찮다면서 같이 공부하면서 해보자 해서 시작하게 됐어요.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예요(웃음)."
"아마도 내가 우리나라 미디어 교육의 대모쯤 될 거예요. 미디어 교육을 한 지 벌써 30년이 넘었어요. 저는 돈을 버는 일이나 집안 살림하는 쪽 하고는 거리가 멀었어요. 사람들은 저에게 '혹시, 선생님 아니세요?'라고 물어봤어요. 그냥 주부라고 해도 안 믿었어요. 생각해 보니까 제가 사람들 눈높이에 맞춰 설명을 잘하는 것 같아요. 아들이 중학교에 입학했는데 학교에서 특별활동을 진행할 교사를 모집한대요. 담임 선생님이 고생하시니까 엄마가 해주면 좋겠다고 해요. 경실련 활동도 해야 하고, 가톨릭 모임도 해야 하고, 집안일도 해야 해서 안 된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아들이 선생님이 불쌍하다면서 꼭 해 달라고 해서 결국은 특별활동을 맡았어요. 영어회화 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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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세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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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평의 한 단체 사무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는 최성주 |
| ⓒ 문세경 |
최성주(69)씨는 본인을 소개할 때, '시민운동가'라고 말한다. 그것도 자부심이 가득한 얼굴로 말이다. 경실련에서 10년 동안 활동한 후 (사)언론인권센터로 옮겨서 활동을 이어갔다. 그곳에서 10년간 활동하다가 지금은 언론개혁시민연대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언론 단체에서 활동한 이력이 긴 이유가 궁금했다.
"예전에는 시민단체 회원이 많지 않았고, 지인의 권유를 받고 회원이 되는 경우가 많았어요. 저는 경실련에 직접 전화해서 회원이 되겠다고 했어요. 한두 해 지나고 경실련에서 전화가 왔어요. 경실련이 생기고 처음으로 자발적으로 회원이 되겠다고 한 사람이 저여서 인상 깊었대요. 방송 비평과 프로그램 모니터링하는 팀을 만들었는데 그 일을 저랑 같이 하고 싶다고 했어요. 저는 전공이 방송 쪽도 아니고 간호학이라고 했는데도 괜찮다면서 같이 공부하면서 해보자 해서 시작하게 됐어요.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예요(웃음)."
방송하고는 아무런 관련 없는 삶을 살다가 방송 비평을 하게 되었다. 회원들과 함께 언론이 뭔지, 시민이 누구인지, 시민은 어떻게 사회에 의견을 내고, 뉴스는 어떻게 만드는지, 뉴스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광고는 어떤 역할을 하는지, 미디어와 사회는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등 미디어 생태계에 대해 공부했다. 공부 끝에 방송모니터팀을 만들었다. 방송비평, 방송정책 제안을 했고 몇 년 후에는 미디어교육을 시작했다.
"아마도 내가 우리나라 미디어 교육의 대모쯤 될 거예요. 미디어 교육을 한 지 벌써 30년이 넘었어요. 저는 돈을 버는 일이나 집안 살림하는 쪽 하고는 거리가 멀었어요. 사람들은 저에게 '혹시, 선생님 아니세요?'라고 물어봤어요. 그냥 주부라고 해도 안 믿었어요. 생각해 보니까 제가 사람들 눈높이에 맞춰 설명을 잘하는 것 같아요. 아들이 중학교에 입학했는데 학교에서 특별활동을 진행할 교사를 모집한대요. 담임 선생님이 고생하시니까 엄마가 해주면 좋겠다고 해요. 경실련 활동도 해야 하고, 가톨릭 모임도 해야 하고, 집안일도 해야 해서 안 된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아들이 선생님이 불쌍하다면서 꼭 해 달라고 해서 결국은 특별활동을 맡았어요. 영어회화 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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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년 3월, 윤석열정권의 언론 장악을 막기 위해 만든 <언론장악저지공동행동> 출범식이 서울 여의도KBS 사옥 앞에서 열렸다. 공동대표로 발언하는 최성주. |
| ⓒ 최성주 |
막상 수업을 하려고 하니 서점에 미디어 교육 교재가 하나도 없었다. 방송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미디어교육을 해야 한다는 담론만 있을 뿐이었다. 허탈했다. 고심 끝에 경실련 미디어워치 팀과 의논하여 대책을 세웠다. 청소년 미디어교육 교재를 직접 만들기로 했다.
"미디어교육 프로그램은 대박이었어요. 다큐 프로그램 이해를 빙자해서 <생명의 신비>를 봤어요.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고, 백인도 흑인도 다 같은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죠. 방송국 견학도 가고, 시사 프로그램이나 청소년 드라마를 보고 질문하고 토론했어요. 아이들이 생각의 키가 한 뼘씩 자랐어요. 저의 특별활동을 지켜본 아들 담임 선생님은 자기 아들 학교에서도 꼭 해달라고 부탁했어요. 인기 많았죠. 보람도 컸고."
그 일을 계기로 최성주의 미디어워치 팀 회원 전체가 미디어교육 강사가 되었다. 서울 시내 40개 중고등학교에서 교육을 했다. 2000년도의 일이다. 팀의 활약은 인정받았고, 미디어교육계에서는 꽤 알려진 단체가 되었다. 그 일을 몇 년 더 하고 2002년에 설립된 (사)언론인권센터라는 언론 피해 당사자를 법률적으로 지원하는 단체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2006년에는 상임이사가 되어 언론인권센터를 이끌었다. 현재는 2018년부터 언론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우연찮게 언론 시민운동에 몸 담았고 어느새 30년이 훌쩍 넘었다. 최성주는 여전히 현역이라고 한다.
"시민운동에는 정년퇴직이 없어요. 정년의 압박을 느끼지도 않고요(웃음). 사회의 변화는 더디고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계속 활동할 수밖에 없어요. 언론의 중심에 시민이 있어야 하는데 권력과 자본이 언론의 중심에 있어요. 권력이 개입하고 자본이 좌지우지하고 있죠. 공영방송 대표나 이사를 선임할 때 어떤 방식으로 선출해야 가장 공정한가, 어떻게 해야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된 언론 시스템을 만들까 고민하고 또 고민했지요."
언론개혁은 생각처럼 쉽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30년째 싸우고 있지만 여전히 어렵다. 그럼에도 자신의 활동이 언론 공공성을 지키는 일에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2016년에는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를 만들었다. 상임이사를 맡아 기념사업회의 많은 일을 하고 있다. 최성주는 최운산 장군의 손녀딸이다.
"'봉오동전투' 하면 홍범도 장군을 제일 먼저 떠올리고 업적을 높이 평가하죠. 하지만 봉오동 전투 승리의 토대를 만든 사람은 최운산 장군이에요. 최운산 장군은 저희 할아버지예요. 최운산 장군은 간도 지역의 대지주였어요. 할아버지는 자신의 소유지였던 봉오동 일대를 개간하고 요새화하여 독립운동의 요람으로 만들었어요. 토지를 처분하고 1차대전 종료 후 귀국하던 체코군으로부터 최신식 소총, 기관총, 대포, 탄약 등을 대량으로 사들였어요. 봉오동 독립군이 일본군 보다 뛰어난 화력을 갖출 수 있었던 건 봉오동에서 장기간 훈련양성된 독립군이 많았기 때문이에요."
할머니와 아버지로부터 매일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최성주는 봉오동 독립전쟁이 홍범도 장군에만 초점이 맞춰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의 업적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최운산 장군은 땅만 소유한 게 아니었다. 국수공장, 콩기름공장, 양조장, 성냥공장, 비누공장, 두병공장 등을 세우고 운영했다. 거기서 번 돈을 모두 독립운동에 투자했다. 봉오동의 독립군들이 배불리 먹고 충분한 무기를 가지고 훈련하는 데 썼다. 봉오동 독립전쟁의 승리는 최운산 장군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다. 전투를 지휘하고 앞에서 싸운 사람도 최운산 장군이고, 배후도 최운산 장군이다. 그 때문에 최성주는 최운산장군 기념사업회 일을 게을리하지 않기로 했다.
언론운동 30년 차에 할아버지인 최운산 장군의 기념사업회 일을 시작한 것이 벌써 10년째다. 지칠 만도 할 텐데 그는 여전히 할 일이 많다며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최성주도 가정이 있는 주부다. 하지만 주부로서의 역할은 썩 잘하지 못했다. 주부의 역할을 소홀히 하고 언론운동을 할 수 있었던 배후에는 남편이 있었다. 그는 "활동 성과의 50%는 남편의 것"이라며 웃었다.
"시민운동이라는 것은 누군가 해야만 하는 일이에요. 남이 해주기를 바라지 말고 이 나라의 주인인 내가 먼저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어요. 활동을 시작할 때, 우리 가족 중에 환자가 없었고, 돌봄이 필요한 사람이 없었어요. 내가 집안일을 소홀히 해도 눈치를 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지금까지 발 안 빼고 집안일 내팽개치고(?)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남편 덕분이에요. 많이 고맙죠."
누군가 앞장서야 할 일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앞장서기를 꺼린다. 아파트의 부녀회장을 맡거나, 동대표가 되는 일이 그렇다. 앞장서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 일도 되지 않는다. 공동주택을 관리하고 책임지는 일이 쉬운 일인가. 최성주는 아무도 하려고 하지 않는 부녀회장을 맡았다. 분리수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30년 전이다. 쓰레기통을 뒤지고 분리수거를 열심히 했다. 어찌나 열심히 했는지 최성주가 사는 아파트가 모범 사례로 뽑혀서 상금을 100만 원이나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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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년 7월, 프레스센터 앞에 건립한 '굽히지 않는 펜' 조형물 제막식 모습(오른쪽에서 다섯번째가 최성주) |
| ⓒ 최성주 |
언론시민운동,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두 가지 일을 하기도 벅찬데 합창단 활동까지 하고 있다. 더 나이 들면 목소리가 안 나올지 모르니 하루라도 빨리 시작하자는 마음에 5년 전에 합창을 시작했다. 젊은 시절에도 합창단에 가입해 노래를 불렀지만 시민운동 하느라 시간이 빠듯해 계속하지 못했다. 최성주는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종합예술단 <봄날>을 만들었다. 단원은 스무 명이 조금 넘는 작은 합창단이다.
"규모가 큰 합창단은 큰 행사에 가요. 큰 합창단이 가지 못하는 작은 행사에 <봄날>이 갑니다. <봄날>은 노래를 잘하는 게 목표가 아니에요. '노래로 위로를 줄 수 있고 연대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자'고 해서 만든 합창단이거든요. <봄날>에서 노래를 부른 건 6년째예요. 내가 제일 나이가 많아요. 저희와 교류하는 일본 합창단이 있는데 단원들이 정말 호호 할머니예요. 구부정한 허리를 하고서도 무대에 올라와서 노래를 부르시는 것 보고 '나는 아직 젊구나, 열심히 노래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봄날>이 주로 가는 곳은 힘든 일을 겪고 있는 투쟁 사업장이다. 거리 공연도 마다하지 않는다. 힘들게 싸우고 있는 사람들에게 노래로 위로하고 노래로 희망을 주기 위함이다. 합창 연습을 쉬지 않는 이유다. 주로 저녁에 연습 일정이 잡혀 있다. 지쳐서 집에 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지만 연습을 하고 나면, '내가 언제 힘들었지?' 하며 피로가 풀린다고 한다.
최성주의 인생 2막은 합창 활동과 함께 진행 중이다.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일을 하면서 봉오동 독립전쟁이 얼마나 오랫동안 준비하고 얼마나 많은 선조들이 참여했으며 어떻게 이겼는지를 이야기는 하는 강의도 한다. 최성주가 강의 말미에 반드시 하는 말이 있다.
"최운산 장군이 봉오동 전투의 후방을 책임지고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은 최운산 장군의 아내인 김성녀(최성주의 할머니)의 역할이 컸어요. 김성녀는 봉오동 전투가 승리할 수 있도록 병참대장을 맡았어요. 할머니는 식량 조달과 취사 총괄에 그치지 않고 위험을 무릅쓰고 군사 정보를 본진에 전달했어요. 후세의 역사 학자들은 저희 할머니를 '봉오동 전투를 가능하게 한 후방 병참사령관' 또는 '무장독립운동의 숨은 주역'으로 평가하기도 해요. 손녀인 제가 김성녀의 삶을 제대로 알려주는 것이 꼭 필요하더라고요."
인생의 황혼을 보람되고 행복한 시간으로 채우면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기본생활이 충족 돼야만 가능하다. 황혼의 길목에서 돈 걱정 없이 자유롭게 사는 이가 얼마나 될까. 최성주도 결국 같은 문제에 부딪혔다.
"간호사로 일 했지만 오래 하지 않았고, 시민단체에서 30년 넘게 일했지만 자원봉사의 성격이었어요. 그래서 연금을 준비하지 못했어요. 시민단체 책임자로 일할 때 활동비를 200만 원 준다고 했는데 그 조직(시민단체)에 (금전적) 여유가 없을 것 같아 50만 원만 받았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남편이 직장 잘 다니고 있어서 괜찮았어요. 지금은 연금을 못 받는 노후 생활을 하고 있네요. 남편의 사업이 망하지만 않았어도 노후 생활을 걱정하지 않았을 텐데..."
연금 없는 노후생활이라니 우울할 만도 한데 최성주의 얼굴은 인터뷰 내내 상기되어 있었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을 본인이 앞장서서 했다는 뿌듯함 때문일까? 아니면 봉오동 전투의 주역인 최운산장군의 손녀딸이어서 일까? DNA는 속일 수 없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이음나눔유니온 홈페이지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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