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 무대’ 꿈꾸는 여든의 헤비메탈 기타리스트[한우물보고서]

“록 음악이 정말 음악입니다.”
헤비메탈 기타리스트 황영선씨가 무대에 오르기 전 말했다. 올해 팔순인 그는 관객이 기자 한 명뿐인 공연을 앞두고도 대형 무대를 준비하는 연주자처럼 장비를 꼼꼼히 점검했다. 마이크에 대고 목을 푼 뒤 기타 이펙터를 비롯한 음향 장비를 확인했고 드럼·베이스·키보드 등 다른 악기 파트가 입력된 엘프(ELF) 반주기를 켰다.
검은 매니큐어를 칠한 왼손으로 깁슨(Gibson) 기타의 지판을 짚고 줄을 튕기자 지하 공간은 순식간에 공연장으로 변했다. 레드 제플린의 ‘블랙 독’에 이어 메탈리카의 ‘원’, 오지 오스본의 ‘미스터 크롤리’가 차례로 울려 퍼졌다. 사운드가 쏟아지면서 헤비메탈의 진동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관객도 박수도 없었지만 황씨의 연주는 조금도 작아지지 않았다. 60년 가까이 몸에 밴 기타 연주에는 여유가 묻어났다. “수십년 전부터 하던 곡들이에요. 겨우 외워서 하는 게 아니고, 이제는 내공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경지까지 온 거죠.”
황씨가 운영하는 ‘FM락카페’는 인천 제물포구 자유공원남로의 2층짜리 흰색 상가 건물 지하에 있다. 방충망 문을 열고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오랜 손때가 묻은 공간 특유의 공기가 느껴졌다. 가게에는 6인용 테이블 3개가, 앞쪽 중앙에는 메인 무대가 마련돼 있었다. 무대에는 키보드와 베이스, 드럼, 기타, 마이크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지난 28일 저녁 취재가 이어진 4시간 동안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온 손님은 없었다. 문을 열고 가게에 들어선 이는 떡 다섯 팩을 든 방문 판매원 한 명이 유일했다. “떡 좀 사달라”는 말에 황씨는 떡은 받지 않은 채 3000원을 건넸다. “떡은 다른 분께 파세요.”

손님 없이도 매일 여는 가게
가게 한편에 놓인 작은 1인용 책상이 황씨의 공부 자리다. 작은 스탠드 불빛이 비추는 독서대에는 황씨가 직접 그린 악보가 놓여있었다. 오선만 인쇄된 노트 위에 음표와 기타 코드, 각 악기의 진행을 하나하나 손으로 적어 내려간 그의 보물이다. 컴퓨터도 복사기도 없던 시절, 밴드 리더였던 그는 드럼과 베이스를 비롯한 각 파트의 악보를 직접 그려 멤버들에게 건네곤 했다.
“손님이 없으면 공부를 해요. 새롭게 배우고 싶은 음악은 꾸준히 생기니까…. 기타도 익혀야 하고, 노래도 오리지널 키로 해야 하고요. 어마어마한 시간이 필요해요.”

황씨의 하루는 생각보다 단조롭다. 연습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오전 6시를 조금 넘긴다. 약 6시간을 자고 낮 12시쯤 일어나 간단히 끼니를 해결한 뒤 홍대 ‘락샵’에서 산 옷을 차려입는다. 전기자전거를 타고 40분가량 달려 도착하는 곳은 송도 바닷가다. 사람의 발길이 드문 외진 장소가 그의 야외 연습실이다.
“창하는 사람들은 계룡산 폭포 밑 같은 곳에서 연습하잖아요. 도심에는 그런 데가 없으니까 비슷한 곳을 찾은 거예요. 송도 신도시 구석진 곳에 가면 갈매기하고 나하고 단둘이 있는 데가 있어요. 거기로 소리 지르러 가는 거죠.”
바닷가에서는 보컬 연습과 운동을 함께 한다. 높은 음을 내기 위해 큰 소리로 노래하고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달린다. 비나 눈이 오지 않으면 대부분 바닷가로 향한다.
가게 안에는 4㎏짜리 아령도 놓여 있었다. 기타 줄을 빠르게 튕기는 ‘속주’를 하려면 팔과 손목의 힘이 필요하다고 했다. 나이가 들수록 손이 떨리거나 연주 속도가 떨어지지 않느냐고 묻자 황씨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그게 내공으로 해결이 돼요. 그래서 연습을 중단하면 끝이에요. 매일 꾸준히 하는 거죠.”

미8군 무대에서 온천 밤무대까지
“혼자 연습을 하다가 더 배우고 싶어서 서울에 있는 ‘종로 음악 학원’을 찾아갔어요. 학원에 갔는데 다 아는 거더라고요. 기타 선생님이 저를 잘 보셨는지 ‘조교를 해보라’고 했어요.”
학원 수강생 가운데 한 명이 황씨에게 미8군(주한미군 제8군) 부대 클럽에서 공연하던 밴드의 빈자리를 소개했다. 당시 미군 부대 클럽은 로큰롤과 재즈 등 서구 대중음악이 국내에 빠르게 전해지는 통로였다.
황씨에 따르면 1970년대 초 미군 부대 클럽에서 활동한 밴드들은 기획사와 계약을 맺고 월급을 받았다. 한 달 치 공연 일정이 달력처럼 짜여 나오면 팀별로 의정부와 동두천 등 미군 부대를 도는 식이었다.
“그때는 로큰롤 시절이었어요. 국내에서는 한발 앞선 음악이었고 인기도 좋았어요. 연주자들의 열정도 좋았고 반응도 좋았던 시절이에요.”

미8군 클럽에서 3년간 활동한 황씨는 함께 하숙하던 음악인들의 제안을 받고 인천으로 향했다. 당시 인천에는 밴드의 생음악을 들을 수 있는 호텔 나이트클럽이 속속 들어서고 있었다. 30대 초반, 황씨는 인천 프린스호텔을 시작으로 인천회관, 하이웨이, 올림푸스 등 당시 여러 나이트클럽에서 리드기타를 잡았다.
애석하게도 대중음악 유행은 빠르게 바뀌었다. 로큰롤의 시대가 저물고 디스코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나이트클럽은 손님들이 춤추기 좋은 디스코와 블루스 음악을 원했다.
로큰롤을 고집하고 싶다가도 당장 먹고 살길이 막막했다. 그렇게 찾게 된 곳이 지방 온천 관광지였다. 수안보를 비롯한 온천 지역 나이트클럽은 서울과 인천보다 음악적 요구가 상대적으로 느슨했다. 디스코와 록 음악을 섞어 연주할 수 있었다.
10년 가까이 전국의 밤무대를 돌며 여러 밴드의 리더를 맡았지만 음악에만 집중하기는 어려웠다. 공연 도중 멤버가 그만두면 다른 지역에서 연주자를 데려와 악보를 다시 만들고 합을 맞춰야 했다.
“애로사항이 많았죠. 무엇보다 음악 공부할 시간이 없었어요. 매일 무대에는 섰지만 정작 제가 원하는 연주와 노래는 연구하지 못했어요.”

산골 10년의 수행, 목소리부터 다시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팀을 해체하고, 일은 접고, 10년 동안 기타와 노래만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했죠.”
그때까지 황씨는 주로 기타만 연주했다. 보컬은 늘 다른 멤버 몫이었다. 산골에서는 목소리부터 만들기 시작했다.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곳을 찾아 산으로 올라갔다. 음역을 넓히기 위해 반복해 고음을 질렀다. 생계는 함께 밴드를 했던 친구의 논밭일을 틈틈이 도우며 이어갔다.
“산에서 소리를 질렀어요. 보이스를 키우고 옥타브를 올려야 하니까요. 그전에는 노래를 안 했는데, 거기서부터 내공을 쌓은 거죠.”
10년 뒤인 2000년, 자신과의 약속을 지킨 황씨는 빈집을 나섰다. 차비만 챙겨 과거 함께 음악을 했던 후배들이 있는 인천으로 향했다. 다시 소규모 밤무대부터 시작해, 15년 동안 여러 업소를 옮겨 다니며 연주했다.

그러나 그의 음악은 여전히 밤무대와 겉돌았다. 업소는 손님이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곡을 원했지만, 황씨가 하고 싶은 것은 더 강하고 거친 헤비메탈이었다.
“제 음악성이 록 쪽으로 너무 강하다 보니까 대중적인 음악을 원하는 클럽이랑 안 맞더라고요. 결국 ‘내 클럽을 해야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연구할 수 있겠구나’ 생각한 거죠.”
황씨가 지금의 지하 공간을 얻은 것은 약 10년 전이다. 큰길에서 떨어진 데다 지하에 있어 보증금과 월세가 상대적으로 저렴했다. 기존 상호인 ‘FM단란주점’에서 ‘FM’만 남겼다. 초창기에는 음악 소리를 두고 주변에서 항의가 들어와 방음시설을 보강하기도 했다.
운영 방식은 여느 술집과 다르다. 손님은 1인당 3만원의 입장료를 내고 맥주나 음료수, 마른안주를 받는다. 메뉴판은 없지만 신청곡은 받는다.
“손님들이 여기 와서 먹는 건 별로 없어요. 음료수나 맥주 몇 잔 마시고, 제가 주는 마른안주를 드시는 정도죠. 그냥 음악을 감상하다 가는 거예요.”
가게를 처음 열었을 때는 대중가요를 듣고 싶어 하는 손님도 찾아왔다. 황씨는 손님의 취향에 맞춰 음악을 바꾸지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 하드락과 헤비메탈만 연주했다. 대중적인 음악을 찾던 손님들은 자연스럽게 발길을 끊었다. 황씨는 월세는 낼 수 있으니 충분하다고 했다.

“젊은 친구들에게 배울 게 많아요”
원하는 소리를 찾는 과정은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비싼 장비도 마음에 드는 음색이 나오지 않으면 중고로 되팔았다. 다른 이펙터와 음향 장비를 사서 무대에서 시험하기를 거듭했다.
새 장비에 관한 정보는 젊은 연주자들에게서 얻는다. 황씨는 홍대 인근의 라이브 공연장을 꾸준히 찾아 공연을 본다.
“젊은 친구들에게 배울 게 많아요. 요즘은 정보화 시대라 여러 자료가 많잖아요. 젊은 친구들은 제가 안 써본 이펙터에도 관심이 많아요. 공연을 보다가 소리가 괜찮으면 어떤 걸 쓰는지 물어보고 바로 사진을 찍어요. 그다음 중고로 구입해서 직접 써보는 거죠.”
황씨는 젊은 음악인들과도 나이의 벽을 느끼지 않는다고 했다. 음악을 하는 사람은 모두 형제이고, 자신은 나이가 조금 많은 ‘큰형’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뮤지션은 하나예요. ‘브라더’거나 ‘빅 브라더’죠. 나이는 관계없어요.”

꿈은 하나, 100살까지 헤비메탈
경기 파주에 사는 이윤지(30)씨도 지난해 펜타포트에서 황씨를 만났다. 더위에 지쳐 그늘 밑 벤치에서 쉬던 중 황씨가 먼저 다가왔다. “스타일이 누가 봐도 로큰롤이셨는데, 그 연배 어르신을 펜타포트에서 뵙는 게 흔한 일은 아니라 처음엔 조금 경계했어요. 그런데 그냥 ‘메탈 러버’셨어요. 그날 라인업에 있던 헤비메탈밴드 메써드 공연을 꼭 보라고 ‘영업’하고 가셔서 친구랑 한참 웃었죠.”
황씨에게 ‘영업’을 당한 이씨는 그날 펜타포트에서 메써드의 공연을 관람했다. 이씨는 “공연을 보는데 피가 끓는 것처럼 신나고 재미있었다”며 “허공을 향해 ‘할아버지, 약속 지켰어요. 감사합니다’라고 계속 외쳤다”고 말했다.
세월이 흘러도 황씨의 자리는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제는 행사장에서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생겼다는 점이다.
FM락카페가 외지의 헤비메탈 팬들에게 알려진 계기도 지난해 펜타포트였다. 황씨에 따르면 사흘 내내 축제를 보기 위해 인천에 숙소를 잡았던 청년들이 인천 차이나타운을 둘러보다 우연히 가게를 발견했다. 이들이 소셜미디어에 후기를 올린 뒤 부산과 청주, 서울 등 전국 각지에서 헤비메탈 팬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메탈 음악을 기타 치면서 노래하는 곳이 여기밖에 없어요. 보고 싶어도 볼 곳이 없잖아요. 그래서 입소문을 듣고 오는 거죠.”
미혼인 황씨는 밴드와 기타에 대부분의 시간을 쏟아온 삶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밴드 가운데 하나는 1973년 결성돼 50년 넘게 활동을 이어온 호주 록 밴드 AC/DC다. 황씨가 후배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도 그 꾸준함이다.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무대에서 물러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자신의 연주로 증명하고 싶어 했다.
“이렇게 나이를 먹었어도 무대를 할 수 있다는 자체가 행복해요. 후배들에게 보여주는 거죠. 나이는 전혀 관계하지 말라고. 꿈은 하나예요. 100살까지 헤비메탈을 연주하고 공연하는 것. 그러려면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져야 하니까 밤새도록 공부하는 거예요.”
그날 FM락카페의 객석은 끝까지 비어 있었다. 그래도 황씨는 연습을 멈추지 않았다. 여든의 기타리스트에게 이곳은 손님을 기다리는 가게가 아니라, 100세 무대를 준비하는 연습실이었다.

백재연 기자 energy@kmib.co.kr,전병준 기자 jb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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