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미탑승 고객' 부르는 목소리... 그게 내가 될 줄이야
[서부원 기자]
이럴 때 어울리는 속담 같진 않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머피의 법칙', 아니 '설상가상'이라는 표현이 가장 적확할 듯싶은 하루였다. 예상대로 되는 게 단 한 가지도 없었다. 하마터면 공항에서 비행기까지 놓칠 뻔했다. 종일 손에 땀을 쥐게 한 아찔한 순간의 연속이었다.
인천국제공항에서 저녁 7시 40분에 출발하는 항공편이었다. 내가 사는 광주에서 공항까지는 고속버스 편도 많고 평소 4시간 정도 소요되는 거리다. 출국 수속 시간을 고려해도 점심까지 챙겨 먹고 가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오후 1시 30분에 출발하는 버스표를 일찌감치 예매했다.
그런데, 전날 저녁에 오전 11시 30분에 출발하는 버스표로 바꿨다. 2시간이나 앞당긴 거다. 정시 출발해도 여유로운 시간이었지만, '느낌적 느낌'이지만 서둘러야 할 것 같았다. 항공사 홈페이지로 예약한 '무료 환승 호텔 서비스'가 미덥지 않아 공항에서 직접 확인하고도 싶었다.
참고로, 항공사마다 밤늦게 도착해 다음 날 아침에 출발하는 환승(lay-over)의 경우, 공항 인근의 호텔과 픽업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한다. 물론, 동일한 항공사여야 하고, 특가로 구매한 항공권이라면 이용이 제한되기도 한다. 선착순이어서 서비스가 일찍 마감되는 경우도 있다.
안 풀리는 하루의 서막
출발 당일 아침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설상가상'의 하루를 견뎌낸 이제 와서 보니 별일도 아니었는데, 아무튼 그땐 적잖이 놀랐다. 노트북의 충전기가 말썽을 일으킨 거다. 내게 노트북은 해외여행을 갈 때 여권만큼이나 중요한 물건이다. 지금껏 노트북을 두고 떠난 적은 없었다.
인터넷의 '총알 배송'을 이용하기에도 시간이 촉박했다. 전자 제품 전문 매장을 직접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 또한 문제는 시간이었다. 매장마다 오전 10시가 넘어서야 문을 연다기에 본의 아니게 '오픈 런'을 시도했다. 가게 문을 열기도 전에 줄을 서보기는 태어나 처음이었다.
대형 매장인데도 정격 출력이 60W를 넘는 노트북용 충전기가 걸린 매대는 썰렁했다. 찾는 손님이 적어선지, 아니면 다 팔려선지 몇 개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 일이 꼬이려니 이마저도 날 괴롭혔다. 찾던 가성비 좋은 제품은 없고, 두 배 넘게 비싼 것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값비싼 충전기를 구매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 전에만 고장이 났어도 불필요한 지출은 막을 수 있었다. 억울한 마음에 괜히 고장 난 충전기에 화풀이했다. 작동 상태를 확인한 뒤 노트북과 충전기를 가방에 주섬주섬 챙겨 넣으니 점심 먹을 시간조차 빠듯했다.
자칫 버스 편을 두 시간 앞당긴 게 화근이 될 뻔했다. 여느 때 같으면 버스를 오르기 전에 여유롭게 아메리카노 한 잔 마시는 게 루틴이었는데, 타자마자 단 1초의 에누리도 없이 정시에 출발했다. 기실 교통 체증이 문제일 뿐, 요즘 고속버스는 KTX만큼이나 정시성을 자랑한다.
돌발 상황은 그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요 며칠 쏟아지던 폭우도 멈추고 말끔해진 고속도로 위를 잘 달리나 싶었는데, 꽉 막힌 도로 위에서 버스가 앞차와 추돌했다. 편도 2차선 중 한 차선을 막고 공사 중이었는데, 앞차가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으면서 일어난 접촉 사고였다.
급브레이크에 승객들의 몸이 붕 떴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대부분 잠들어 있던 터라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두 차량의 범퍼가 살짝 찌그러진 정도의 경미한 사고였지만, 기사는 승객들의 안전을 일일이 확인하고선 버스를 잠시 노견에 세우고 내렸다.
앞차 운전자와 사고 수습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뒤, 다시 버스가 출발할 때까지 한참의 시간이 지나갔다. 다들 비행기 시간에 쫓기지 않았는지 발을 동동 구르는 승객은 다행히 없었고, 되레 기사를 걱정하는 눈치였다. 버스는 예정 시간보다 40여 분 늦게 공항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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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공지능 도구로 만든 이미지. |
| ⓒ 오마이뉴스 |
그러잖아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카운터 직원 한 분에게 떼를 쓰듯 매달렸다. 홈페이지에 서비스를 신청했고 '예약 완료(Booked)'라는 창이 떴는데, 왜 확정된 예약 내용을 알려주는 메일이나 바우처가 제공되지 않는지, 예약 방법을 시연하고 캡처 화면까지 보여주며 설명했다.
그는 내내 공감을 표했지만, 답변은 의외로 허망했다. 한사코 공항의 카운터에서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없고, 직접 본사나 서울 사무소에 연락해 보라고 했다. 아무리 대표 번호로 전화를 걸어도 통화가 안 된다고 했더니, 그조차 자신들이 도와줄 수 없는 일이라며 고개를 숙였다.
카운터에서 직원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출국 수속을 위한 승객들의 대기 줄이 구절양장처럼 통로에 가득 찼다. 아직 출발 시간이 2시간가량 남았으니 걱정할 일은 아니었지만, 지연된 항공편의 수속이 겹친 듯 보였다. 그렇듯 '게도 구럭도 다 잃은 채' 맨 뒤에 줄을 서야 했다.
시간이 가도 대기 줄은 줄어들 줄 몰랐고, 결국 직원들이 줄 사이를 오가며 탑승 시간이 빠듯해진 항공편의 승객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나 역시 그들의 '배려'로 서둘러 수속을 마쳤다. 인파에 떠밀려 출국장에 들어서서 숨 돌리듯 시계를 보니 이미 탑승 시간을 훌쩍 넘어버렸다.
아뿔싸. 탑승구에 가자면 '셔틀 트레인'을 타야 했다. 공항에서 100m 달리기하듯 뛰어본 것도 처음이었다. 가는 통로엔 빨간색 '탑승 마감 콜' 사인이 연신 반짝거렸고, 미탑승 고객을 부르는 직원의 목소리도 쩌렁쩌렁 울렸다. 숨을 헉헉거리며 비행기에 올랐고, 이내 문이 닫혔다.
비행기 좌석에 앉아 안전띠를 매고서야 다사다난했던 하루가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사라지만, 매일이 오늘 하루만 같다면 단 며칠도 버텨내지 못할 성싶었다. 그만큼 힘들었고, 주변 사람들 모두가 날 저주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승무원이 건넨 시원한 냉수와 톡 쏘는 사이다 한 컵을 들이킨 뒤에야 낯선 길을 떠나는 여행자라는 자각이 돌아왔다. 진정 여행의 묘미는 수시로 돌발 상황을 맞닥뜨리고 슬기롭게 헤쳐 나가는 과정에 있다.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평온한' 여행이라면, 딱히 배울 것도, 기억될 것도 없는 '시간의 사치'일 뿐이라는 게 내 지론이다.
항공사에 '컴플레인'을 거는 건 여행이 끝난 뒤에야 할 일이고, 일단은 황급히 환승 호텔을 검색해야 했다. 탑승 전에 끝내야 했는데, 헐레벌떡 뛰느라 깜빡 잊고 있었던 거다. 그런데, 이번엔 미리 준비한 스마트폰 'e-sim'에 문제가 생겼다. '산 넘어 산'이었지만, 그냥 스마트폰을 끈 채 목베개를 집어 들었다.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생각하니 기분 좋은 졸음이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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