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환 탄생 100주년, 낭만과 고독의 시인을 만나다
[최옥화 기자]
감수성이 충만했던 여고 시절이나 문학을 좋아했던 젊은 날을 지나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구절 하나쯤은 기억할 것이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박인환 시인의 시 '목마와 숙녀' 중 첫 구절이다.
그리고 가수 박인희의 노래로 더 널리 알려진 우리에게 익숙한 '세월이 가면'도 그의 시다.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올해는 이 시들의 주인, 박인환(1926~1956) 시인이 태어난 지 백 년이 되는 해다. 그동안 나에게 박인환은 '목마와 숙녀'와 '세월이 가면'을 쓴, 허무와 낭만의 모더니즘 시인 정도로만 남아 있었다.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 서른한 살에 세상을 떠난 사연이 무엇인지, 김수영과는 또 어떤 사이였는지는 알지 못한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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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원도 인제 박인환문학관 |
| ⓒ 최옥화 |
2009년에 개관한 이 문학관은 2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놀랍게도 산속 도시 인제 한복판에 1950년대 서울 명동 거리가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단순히 글과 사진만 나열된 곳이 아니라 해방 이후 박인환 시인이 활동했던 1950년대 서울 명동의 거리와 술집, 서점 등을 입체적으로 재현해 놓은 것이 큰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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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인환문학관 1층 재현 공간 |
| ⓒ 최옥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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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원도 인제 박인환문학관 |
| ⓒ 최옥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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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인환 시 세월이 가면이 탄생한 경상도집 박인환 시 '세월이 가면'이 탄생한 경상도집 |
| ⓒ 최옥화 |
김수영과 달랐던 문학의 길, 그리고 치열했던 삶
박인환을 이야기할 때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풀'로 유명한 시인 김수영이다. 비슷한 시대를 살았지만 전혀 다른 길을 걸었던 두 사람. 사회 참여를 둘러싸고 문인들이 진영을 나누던 시절, 박인환은 순수문학을, 김수영은 참여문학을 대표했다. 혹자는 박인환이 시대정신을 잊은 채 술과 낭만에만 취해 있었고 그 결과가 '목마와 숙녀'와 '세월이 가면'이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대립은 단순한 감정싸움이나 모더니즘 노선의 차이라기보다 각자가 선택한 시어가 대중에게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를 두고 벌인 치열한 고민의 결과였을 것이다. 순수와 참여, 그 어느 쪽이 옳고 틀리지 않았다. 다만 시대를 견디는 방식이 저마다 달랐을 뿐이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6·25 전쟁을 거쳐 대구로 부산으로 피난하다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의 삶은 잔혹했던 세월 그 자체였다. 그 고단한 삶속에서도 그는 결코 펜을 놓지 않았고, 서점을 열고, 토론을 벌이고, 영화 평론가로도 누구보다 치열한 삶을 살다 갔다.
역사는 그가 얼마나 힘들게 살았느냐보다, 어떤 작품을 남겼느냐를 기억한다.
인제 박인환문학관을 나오며 문득 스친 생각이다. 전쟁과 가난의 폐허 속에서도 낭만과 존엄을 포기하지 않았던 한 청년 시인의 삶을 돌아보며, 오늘을 살아가는 '나는 과연 세상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조용히 자문해 보게 되는 뜻깊은 시간이었다.
인제의 산과 계곡을 보러 왔다가 뜻밖에 명동의 밤 한복판을 걸어 나온 하루였다. 시인은 서른한 살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쓴 한 잔의 술과 한 편의 시는 백 년이 지난 오늘도 누군가의 가슴속에서 여전히 눈동자와 입술로 살아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 스토리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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