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서를 발칵 뒤집은 노래를 아십니까

조호진 2026. 7. 23.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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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를 만드는 사람들] 거리의 목사&시드니의 택시 기사 지성수 목사

활동가 인터뷰 프로젝트 <변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공익활동가의 지역·영역·세대를 잇는 사회적 지지와 연대의 플랫폼, 2026 공익활동가주간과 함께합니다. 공익활동, 캠페인의 성과보다 그 일을 한 활동가 개인의 이야기에 시선을 맞추는 이 프로젝트는 다양한 지역과 분야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활동가들을 직접 만나 이들의 일과 삶을 기록합니다. <기자말>

[조호진]

 거리의 목사이자 시드니의 택시 기사였던 지성수 목사
ⓒ 조호진
지성수(78) 목사는 부천 지역 1980~1990년대 시민운동의 산증인이다. 빈민 운동가, 민주화 운동가, 문화비평가이자 저술가 그리고, 시드니의 택시 기사이자 이민자 사역자였던 지 목사는 1997년 부천을 떠나 시드니에서 택시 운전사로 15년간 일하다가 2021년 원대 복귀했다. 현재 공익 단체와 활동가 등을 도우면서 진보 종교인들의 유튜브 모임 '신신사'(信神사)를 운영하고 있다.

문화비평가이자 칼럼니스트인 그는 <옛날 하나님 요즘 하나님>(예루살렘·1991년) <공부 못하는 아들에게>(예루살렘·1992년) <슬픔도 힘이 된다>(나눔터·1994년) <교회야 교회야 뭐하니>(예루살렘·1994년) <뒤집어 보는 성서이야기>(예루살렘·1996년) <비뚤어진 영성>(예루살렘·2007년> <시드니 택시 기사의 문화 관찰기>(생각비행·2016년) 등 8권의 저서를 펴냈으며 현재는 페북과 유튜브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와 함께 <빈들의 소리>라는 불온 문서를 10년간 발행했다. 독재정권의 언론통제 하에서 발간된 <빈들의 소리>는 성서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빈민운동과 민주화운동, 지역운동과 시민운동 등 주류 언론에서는 접할 수 없었던 뉴스와 주장을 담았다. 지하 유통망을 통해 퍼져 나간 <빈들의 소리>는 국내뿐 아니라 국외까지 전해졌으며 이 불온 문서를 읽다 들킨 군인들은 보안사에 끌려가기도 했다.
 ‘우찌무라 간조’를 스승으로 삼은 지성수 목사는 안수식에서 목사 선서하지 않으면서 가시밭길을 선택했다.
ⓒ 지성수 제공
1. 목회자의 길

"목사 안수받기 위해 선서할 때 나만 하지 않았던 이유는 내가 목사가 될 자격이 있는가? 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회를 직업으로 택했으므로 목사 안수받는 걸 피할 수 없었지만 나는 이미 '우찌무라 간조'의 제자였기에 기성교회 제도에 무게를 두지 않았습니다. 그 후 나는 우찌무라 간조의 가르침을 따라 직업 목회자의 길을 떠났습니다. 목사가 교단을 떠난다든지 혹은 목회를 못하게 된다는 것은 사형선고를 받는 것과 같은 현실 앞에서 불안했던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입니다."

건국대를 중퇴한 후 서울신학대를 졸업한 그는 목사 안수식에서 목사 선서를 하지 않았다. '우찌무라 간조'(内村鑑三 1861~1930)라는 일본 기독교 사상가를 스승으로 모셨기 때문이었다. '무교회주의자'(無敎會主義者)였던 '우찌무라 간조'는 "기독교 신앙의 유일한 근거는 성서일 뿐이며, 교회와 그 관습은 기독교를 담아내는 껍데기"라고 했다. 종교인이자 독립유공자인 김교신(1901~1945)과 재야 사회운동가 함석헌(1901~1989) 등이 '우찌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았다.

지 목사는 우찌무라 간조의 제자였지만 동시에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었다. 신학생 시절에 결혼한 그는 농촌 미자립 교회와 서울의 빈민가에서 활동했으나 늘 생계 곤란에 시달렸다. 마침 종합상사를 하던 고교 동창의 요청으로 봉제공장 총무과장을 맡았으나 회사가 부도나면서 실업계 고교에서 교목'(校牧) 생활로 생계를 이어갔다. 허위와 위선을 싫어하는 그는 자신의 칼럼에서 '생계와 생존'에 대해 이렇게 고백했다.

"누가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큰 소리로 자신 있게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도 예수도 아니고 돈 버는 일이다."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예수는 나중에 만나도 되지만 오늘 돈을 벌지 않으면 당장 내일 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40년 전 신학생 시절,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서 농촌의 미자립 교회부터 목회를 시작해서 10년간 목회자로서 밥을 벌어먹었습니다."

그의 출생은 축복이 아닌 아픔이었다. 젖을 떼기도 전에 부모가 이혼하면서 양육과 돌봄을 받지 못한 그에게 가족은 십자가였다. 서른셋에 십자가 처형당한 청년 예수는 몰랐을 것이다. 십자가를 메고 넘어가던 골고다 언덕 못지않게 고통스러운 생존의 언덕, 처자식의 생계를 이고 지고 가는 가장의 십자가를 예수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생계의 창에 찔린 가장이 살아남기 위해 비루하고 비참한 삶의 십자가를 메야만 하는 비애를 예수가 헤아릴 수 있을까?
 (상단 좌측) 대학생 임수경이 방북으로 구속된 1989년 부천 석왕사 마당에서 임수경의 어머니를 모시고 집회를 열었다. (상단 우측) 지하 유통망을 통해 퍼져 나간 <빈들의 소리>는 100호까지 발행됐다. (하단 좌측) 광명시 하안동에서 빈민운동 하던 1986년 안양천 범람으로 철거민촌 피해가 발생하자 가톨릭 농민회 회장 서경원, 재야운동가 계훈제 선생 등이 구호품을 가지고 방문했다. (하단 우측)하안동과 철산동 빈민촌에서 놀이방을 운영하던 지성수 목사와 연대 교육과 학생들과 빈민촌 아이들.
ⓒ 지성수 제공
2. 거리 목사의 삶

"신학교 졸업생들 사이에는 농담으로 '당회'(堂會 목사와 장로가 모이는 회합으로 교회의 사무처리와 출교 등을 결정하고 감독, 일종의 이사회)가 있는 교회에서 목회하면 '별을 달았다'라고 표현합니다."

지 목사는 서른여섯에 교인 300명이 넘는 당회가 있는 교회, 자택과 자가용, 교목 시절보다 2배의 '사례비'(월급)에다 400%의 보너스를 받는 교회의 담임목사로 취임하면서 가정 평화와 생계 안정을 누렸다. 하지만 안정된 목회는 3년 만에 끝났다. 한 교인이 선물한 고(故)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라는 불온 도서를 읽으면서 월남전쟁이 미국의 침략 전쟁이라는 실상을 알게 된 것이다. 이 책을 쓴 리영희 선생은 박정희 유신정권에 의해 반공법 위반으로 2년간 옥살이했다.

월남전 파병 용사였던 자신의 총구가 사실은 공산주의에 맞선 성전의 총구가 아니라 식민지 억압에 시달리던 베트남 민족의 민족해방전쟁을 훼방하는 총구였다는 사실은 깨달은 그는 부끄러웠다. 무교회주의자였던 자신이 교회가 제공한 생계 안정에 취해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다 둘 다 구덩이에 빠지는 건 아닌가? 라고 자각한 지 목사는 교회를 떠나서 가시밭 세상으로 향했다.

"길거리 목사의 삶은 춥고 떨리고 배고픈 것은 기본이고 거칠고 험한 길이었습니다. 이 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인 노동자, 도시 빈민, 장애인 등과 함께 살면서 싸워야 하는 거리의 목사의 생활은 죽자고 애를 써봐도 결과는 나타나지 않고 그저 애만 써야 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아무리 그들을 위해 열심히 일해도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 개선되지 않는 것을 보면서 때론 절망했고 때론 울부짖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싸움이 헛된 것 같았으나 결코 헛된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월급 받는 목사는 설교가 주된 일이지만 받는 게 무일푼인 거리 목사의 일은 한도 끝도 없었다. 그의 일은 집회와 시위 현장에서 앞장서는 일은 기본이고, 시위 학생을 폭행하는 경찰에 항의했다가 폭행당하는 일, 임금체불과 산재 당한 노동자를 대신해 악덕 사업주와 싸우는 일, 취업을 부탁하는 철거민의 직장을 알아보는 일, 병이 나거나 사고를 당한 주민을 치료해줄 수 있는 병원을 알아보는 일, 가난한 남자와 동거하던 판자촌 여성이 돈이 없다면서 제왕절개 수술비 도움을 청하고 돕는 일뿐만이 아니었다.

서울로 돈 벌러 왔다가 연탄가스 사고로 사망한 시골 처녀, 부모 없이 할머니 손에서 자란 짠한 처녀의 허망한 죽음을 배웅하던 일, 경찰과 검찰에 불려간 주민의 신원을 보증하는 일, 주민등록이 말소된 주민의 주민등록을 되살리는 일을 비롯해 돈 없고, 힘이 없고, 억울하고 분하고 짠한 민중의 삶을 위무하면서 대신 싸우고, 협상하고, 대변해야 했다. 대다수 교회와 목사들은 무겁고 곤란한 짐을 떠맡게 되면 기도로 하나님께 떠넘기기 일쑤지만 거리 목사인 그는 하나님께 떠넘기지 않았다. 기독교 세계관과 역사관이 담긴 그의 발언은 이렇다.

"마그나 카르타, 프랑스 대혁명, 인권 선언, 유엔 인권 헌장 등등 모두 하나님이 내려 준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피 흘려 이룬 것들입니다. 오히려 기성 종교는 중요한 고비마다 인간을 억압하는 기제로 사용되었습니다. 2천 년 교회사를 통하여 기독교가 그 사회의 다수가 되었을 때 긍정적 역할을 한 적이 있었습니까."
 철거로 폐허가 된 빈민촌과 아이들. 왼쪽부터 지성수 목사, 지 목사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박종훈 원장(부천 삼화한의원), 그리고 신학생 배건수(현재 뉴욕 거주)
ⓒ 지성수 제공
3. 슬픔이 힘이던 시대의 노래

"험난한 시대의 언덕을 넘어오시느라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그 시대, 그의 모교인 서울신학대는 지성수 목사를 신학생들을 빨갛게 물들이는 빨갱이 또는 학생운동의 배후조종자로 보고 총장이 교단에 징계 요청까지 했을 정도로 적대적이었다. 자기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 예언자처럼 모교에서 배척당한 채 고난의 십자가를 메고 험난한 시대를 살아온 원로 목사에게 위로의 말씀을 드리면서 그 시대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랬더니 '이 세상 사는 동안'이란 민중가요를 들려주었다.

"1980년대 어느 날, 시위하던 서울신학대 학생들이 연행돼 부평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면회를 갔더니 여러 학교에서 연행된 학생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특별히 서울신대 학생들과만 대화할 수가 없어서 서로 쳐다보고만 있는데 어떤 학생이 '이 세상 사는 동안'이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서 다른 학생들도 따라 부르면서 경찰서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이 세상 사는 동안'이란 노래는 찬송가 풍의 민중가요로 개신교 청년운동권에서 불리던 노래인데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슬프고 거룩한 노래입니다. 40여 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가슴 깊숙하게 새겨져 있는 그 장면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억압과 압제에 맞서 싸우다 맞고, 갇히고, 죽기까지 했던 야만의 시대였지만 이에 맞선 청년들은 아름다웠습니다."

"이 세상 사는 동안 내 흘릴 눈물들
이 생명 다한 후엔 다 씻어 지리니
이 길을 가는 동안 지쳐 쓰러져도
그보다 더욱 귀한 건 생명을 봄이라
곤한 내 혼아 눈을 들어 저 빛을 향하여
아무도 뺏지 못할 생의 자유를 되찾자

투쟁의 길 가는 동안 내 받을 상처들
이 몸이 묻힌 후엔 다 잊혀지리니
이 길을 가는 동안 지쳐 쓰러져도
그보다 더욱 귀한 건 자유를 봄이라
곤한 내 혼아 눈을 들어 저 빛을 향하여
아무도 뺏지 못할 생의 자유를 되찾자

곤한 내 혼아 눈을 들어 저 빛을 향하여
아무도 뺏지 못할 생의 자유를 되찾자."
- '이 세상 사는 동안' 가사 전문/ 작사·작곡: 미상

서울대 법대생이었던 청년은 인천 지역 공장에 노동자로 위장 취업했다가 공장주의 신고로 경찰에 붙잡혔다. 집행 유예로 풀려나서는 또다시 위장 취업했다. 그리고는 철야 작업 중에 깜박 졸다가 컨베이어 벨트에 휘말리면서 숨지고 말았다. 청년은 강원도 태백 출신으로 아버지가 광부라고 했다. 그의 사건을 담당했던 경찰은 "의식화된 운동권 학생이 아니라 수줍음이 많은 천주교인"이라고 기억했다. 이름 모를 그 청년이 생전에 불렀던 노래가 '이 세상 사는 동안'이다.

조정식 열사는 1982년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하여 전두환 군사정권 반대 집회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가 1984년 학교에서 제적된 뒤 노동 운동에 투신, 1987년 국가보안법위반 등으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수감 생활하다 1988년 가석방으로 풀려난 후에 공장에서 일하던 중에 산재사고로 절명했습니다. 그의 애창곡 '이 세상 사는 동안', 스물다섯에 생을 마감한 청년의 노래를 들으면 가슴이 미어진다. 이 세상 사는 동안에 무엇을 해야 덜 부끄러울까. 뉘우쳐 본다.
 지성수 목사의 <슬픔도 힘이 된다> 등의 출판기념회 모습.
ⓒ 지성수 제공
#. 에필로그, "공익활동가들의 선한 싸움을 응원합니다!"

"가난 때문에 다른 공부를 못하고 신학대학을 다녀 목사가 됐다. 신학 때문에 목회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빈민 운동가가 됐다. 생계 때문에 빈민운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호주로 도망갔다. 영어 때문에 좋은 직업을 구하지 못하고 택시 운전사가 됐다."

지성수 목사가 호주 시드니에서 15년간 택시 기사를 하면서 쓴 <시드니 택시 기사의 문화 관찰기>(생각비행·2016년>에서 자신을 소개한 글이다. 국회의원 비서와 월남전 참전 등 파란만장한 청년기를 거쳐 87년 6월 항쟁 당시 '민주헌법쟁취 부천국민운동본부'를 시작으로 40대 10년간을 군부독재에 맞서 싸워 끝내 승리했으나 생계와의 투쟁에선 패배했다. 생계보다 더 고통스러운 두 아들의 미래, 대학 진학한 아들의 학비에 쫓기던 그는 시드니의 택시 기사가 됐다.

삶을 되돌아보면 '회한'(悔恨)이 밀려든다. 팔순을 앞둔 원로 목사이자 원로 활동가인 그는 시대의 부름에 온몸 받쳐 헌신했다. 젖을 떼지도 못한 어린 자식 곁을 떠난 모친과 이혼한 부친, 부모의 사랑과 돌봄을 제대로 받지 못한 상처와 아픔에도 자신처럼 버림받은 이웃과 사회적 약자의 피눈물을 닦아주느라 내 가족의 피눈물은 닦아주지 못했다. 가족에게 그는 죄인이다.

공익의 길, 이 세상 사는 동안 이 길을 가리라. 다짐하고 다짐하지만 길이 흔들린다. 아니다, 흔들리는 건 길이 아니라 삶이다. 나보다 남을 위한 공익의 길 위에 흐르는 가족의 눈물을 생각하면 인생이 흔들린다. 사익 추구에 성공한 사람은 부귀영화라는 훈장을 달지만 공익을 위해 헌신한 사람에겐 딱지 같은 가난과 상처가 숙명처럼 따라다닌다. 그 무거운 십자가를 메고 살아온 원로 활동가에게 후배 활동가들을 위해 한 말씀 해달라고 부탁했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 시대의 운동은 가족의 고통을 전제로 운동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도저히 침묵할 수 없어서 불의한 시대에 맞서 싸웠습니다. 누군가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여서 싸웠으나 그 고통과 희생은 가족의 몫이었습니다. 부족한 가장으로 인해 고통을 겪은 아내와 아들들에게 미안함을 감출 수 없습니다. 이런 아픔을 겪은 선배로서 후배 활동가들은 좀 더 나은 세상을 살기를 바라지만 여전히 저임금과 생활 불안과 미래 불안 속에서 활동하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호주 시드니에서 택시 기사로 일하면서 국영방송을 봤는데 기부와 후원에 대한 공익광고가 수시로 나왔습니다. 호주 사회에서 기부와 후원은 특별한 헌신이나 희생이 아니라 시민의 당연한 의무였고 이를 행하지 않는 사람은 교양 없는 사람으로 취급받습니다. 우리 사회도 그런 사회로 진일보해야 합니다. 제가 부천을 자랑스러워하는 건 이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 헌신하는 분들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정인조(74) 부천희망재단 전 이사장이 대표적인 분입니다.

그는 2011년 퇴직금 1억 5천만 원을 기부하면서 '부천희망재단'을 만든 것을 시작으로 기후위기비상행동기금 1억 원, 지역사회혁신기금 1억 원, 시민활동가기금 1억 원을 비롯해 20억 원 이상을 기부한 데 이어서 유산 기부 의사까지 밝혔습니다. 세계 최빈국이었던 대한민국의 발전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의인들의 희생과 헌신의 바탕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수고하는 공익활동가들의 선한 싸움을 응원합니다."
 후배 활동가들의 선한 싸움을 응원하는 원로 활동가 지성수 목사님
ⓒ 조호진
인터뷰어: 조호진
1989년 <노동해방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시집으로는 <우린 식구다>(2009년)와 <소년원의 봄>(2015년)이 있고 에세이집 <소년의 눈물>(2017년)과 <희망 한 톨>(2023년)을 펴냈습니다. 현재, 경기도 부천에서 이주 청소년 지원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변화를만드는사람들 홈페이지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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